쿠엔틴 타란티노 (Quentin Tarantino)

영화라는 이름의 놀이터에서 노는 남자

by HeeHee

쿠엔틴 타란티노를 이해하려면 그를 감독이나 예술가라는 틀 안에 가두려고 하면 안 된다. 그는 영화를 순수하게 즐거움을 주는 매체로 생각하는 드문 감독이다. 그의 영화들은 항상 질문한다. '이건 재미있니?' 그 질문의 답이 '예'라면, 윤리와 도덕적 경계라는 건 그에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난감일 뿐이다. 숭고함과 감동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처럼, 타란티노의 영화들이 주는 원초적인 오락적 쾌감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무언가이며, 현실이 주지 못하는 정의감과 흥분을 영화 속에서 마음껏 누리게 해 준다. 타란티노는 이를 꿰뚫고 있는 감독이고,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것이다.


타란티노가 영감 받은 감독들을 알면, 그의 영화가 왜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지가 명확해진다. 그의 최대 영감원은 세르지오 레오네다. 타란티노 자신이 말하기를, "내 작업에 가장 영향을 끼친 예술가는 세르지오 레오네이다"라고 했으며, 심지어 그의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황야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라고 선언했을 정도다. 레오네의 드라마틱한 음악 사용, 세트피스 중심의 연출, 그리고 "절반은 엉망이지만 웅장한" 그 오페라적 품질이 타란티노에게 직결되어 있다.


그 외에도 타란티노는 하워드 호크스(영화 <리오 브라보>의 감독)를 "단 하나의 최고의 스토리텔러"라고 극찬했고, 브라이언 드 팔마의 서스펜스 연출을 사상처럼 따랐으며, 장 뤽 고다르의 누벨바그 정신을 존경해 왔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의 개인적 취미다. 타란티노는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삶이라고 선언할 정도의 극도의 영화광이다. 그는 호화로운 휴가나 파티 대신 하루 종일 영화관에 앉아 수천 개의 영화를 본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이탈리아 카우보이 영화부터 일본 사무라이 영화, 공포 영화까지 모두 본다. 그의 집에는 VHS 테이프와 비닐 컬렉션이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이 그가 말하는 한 문장으로 집약된다: "나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영화에서 훔친다. 위대한 예술가는 오마주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타란티노의 모든 것 — 그의 대사, 음악, 폭력, 그리고 구성 — 은 과거의 영화들로부터 온다. 하지만 그것이 그곳에서 생겨난 순간, 그것은 타란티노의 것이 되어버린다.


비디오 가게 청년에서 영화의 마법사로

타란티노의 삶은 명확한 순간으로 나뉜다. 'before'과 'after'를 가르는 그 순간은 캘리포니아 맨해튼 비치의 비디오 가게였다. 1963년 생의 타란티노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여러 잡일을 전전하다가 22세에 이곳에 들어갔다. 성인 영화관인 푸시캣 시어터에 16세 때 일했던 아저씨가 16세라고 거짓말을 해야 했던 그 경험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진정한 의미의 '영화 교육'이 시작된 곳이다. 비디오 가게에서 타란티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영화를 보았다. B급 영화들, 1960~70년대 저예산 영화들, 유럽 예술영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까지 말이다.


그의 어머니는 영화광이었고 어린 시절 로스앤젤레스의 영화관들을 다니며 수없이 많은 영화를 봤지만, 비디오 가게에서의 경험은 달랐다. 여기서 그는 단순히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연구'했다. 자신이 본 영화들을 고객들과 토론했고, 왜 어떤 장면이 효과적인지, 어떤 대사 처리가 흥미로운지를 끊임없이 분석했다. 비디오테이프를 돌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봤다. 이 과정에서 타란티노는 자신을 만들었다. 그는 영화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영화 그 자체가 그의 최고의 교사였다.


흥미로운 점은 초기 타란티노가 감독이 되길 원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배우가 되고 싶었고 6년간 연기를 공부했다. 배우 제임스 베스트에게 사사했지만, 결국 그의 길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 '우회'가 그를 세운 것이다. 배우가 되려던 그 열정이, 결국 영화 자체에 빠져 감독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인생을 영화처럼 설계한 것처럼, 타란티노의 모든 경험은 그의 영화 제작에 직결되었다.


현실을 거부하는 영화관

타란티노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현실과의 단절'이다. 많은 감독들이 영화를 현실의 연장선으로 보거나 사회적 의제를 담아낸다면, 타란티노는 다르다. 그에게 영화란 환상의 자유로운 공간이다. 현실의 법칙을 따를 이유가 없는, 순수하게 상상력의 놀이터인 것이다.


이 철학이 있기에 타란티노의 영화에서는 우리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 일어난다. 독일인 주인을 만나 탈출할 길 없어 보이던 노예가 결국 자유를 손에 넣는다. 나치 지도자들이 영화관에서 화염에 휩싸인다. 복수심 가득한 여인이 황색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인 자들을 차례차례 찾아간다. 현실은 이렇게 정의롭지 않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라면? 그곳에서는 정의가 승리한다. 그 승리는 파장이 없다. 도덕적 질타도, 후속 결과도 없다. 마치 우리가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자유로웠던 것처럼.


타란티노의 폭력은 이 철학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그가 이해하는 바는 명확하다. 현실의 폭력은 끔찍하고 추하다. 하지만 영화 속의 폭력은 다를 수 있다. 실제로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과도하게 과장되고 만화적으로 표현되는 폭력은, 그 과도함 자체가 관객에게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현실 같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도덕적 불안감 없이 그 순간의 쾌감, 정의감,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약삭빠른 계산이 아니라 철저한 철학이다.


대사의 마술사

타란티노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폭력이 아니라 대사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 우리는 고민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대사에 빨려 들어간다. 펄프 픽션의 유명한 햄버거 장면에서 두 남자는 20분을 넘게 음식 이야기를 한다. 뭔가 중대한 일이 있을 것 같지만,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이 남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성격인지, 심지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까지 알게 된다.


타란티노 대사의 특징은 '음악성'이다. 그는 대사를 단순한 정보 전달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대사는 리듬이고 음악이다. 각 문장의 길이를 조절하고, 단어들 사이의 간격을 만들고, 반복을 이용하고, 예기치 못한 순간에 펀치라인을 터뜨린다. 마치 재즈 뮤지션이 악보 위에서 자유를 찾는 것처럼, 타란티노는 대사라는 악보 위에서 자신의 시그니처를 만들어낸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영화를 쓰기 시작할 때 끝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저 캐릭터와 장면으로 시작하고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를 지켜본다. 캐릭터들이 주도권을 가져가고 타란티노는 그저 그들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기록한다. 이는 마치 빙의 상태 같다. 타란티노 자신이 아니라 그 인물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방식 때문에 그의 대사는 본질적으로 '살아 있다'.


<펄프 픽션>, 현대 영화의 터닝포인트

이 영화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비선형 구조로 엮어낸다. 갱단 보스 마르셀러스 월리스(빙 라메스)의 부하인 두 명의 암살자 빈센트(존 트라볼타)와 줄스(사무엘 잭슨)가 브리프케이스를 되찾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사이 마르셀러스의 아내 미아(우마 서먼)가 빈센트와 로맨틱한 저녁을 보내고, 복싱 선수 부치(브루스 윌리스)는 싸움을 던지고 도망치려 한다. 이 모든 일들이 얽혀있으면서 폭력과 구원의 이야기들이 교차한다.


<펄프 픽션> (1994)은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현대 영화사의 분기점이다. 이 영화 이전의 할리우드 범죄영화와 이후는 완전히 다르다. 물론 비선형 서사 구조는 타란티노가 발명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범죄영화의 매력과 결합한 것은 그였다.


펄프 픽션이 주는 쾌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첫째, 우리는 이 영화 속에서 명확한 영웅과 악당을 찾을 수 없다. 착한 사람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다. 그저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각자의 논리 안에서 행동한다. 둘째, 이 영화는 관객에게 결말을 먼저 보여주고도 우리가 자꾸만 앞으로 돌아가고 싶게 만든다. 셋째, 그 악명 높은 오버드로스 장면을 포함해 즉각적이고 격렬한 순간들이 언제든 터져 나온다. 이 모든 요소가 합쳐지면서 관객은 영화 내내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더욱이 펄프 픽션은 '낮은 것'을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올렸다. B급 영화의 감성, 대중소설의 오락성, 그리고 유럽 예술영화의 형식이 한데 섞였다. 이 영화 이전까지 이런 혼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타란티노는 말하기를, "나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모든 영화에서 훔친다." 펄프 픽션은 그 철학을 완벽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과거의 영화들을 본다. 하지만 그것이 어색하지 않다. 타란티노의 손을 거치면서 모든 레퍼런스가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펄프 픽션>의 더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과거의 영화들에서 얼마나 노골적으로 영감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다. 잭 래빗 슬림스의 댄스 장면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8½>에서 직접 차용되었고, 여러 장면들은 뉴 웨이브 영화, 필름 누아르, 고전 범죄 스릴러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렇지만 여기가 중요한 부분이다. 타란티노는 이런 '차용'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훌륭한 예술가는 훔친다. 그들은 오마주를 하지 않는다." 즉, 단순한 인용이 아니라 완전한 재구성이라는 뜻이다. 각 레퍼런스는 새로운 맥락 안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이것이 펄프 픽션이 B급 영화의 감성, 프랑스 예술영화의 형식, 그리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오락성을 결합하면서도 '도용'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킬빌> 두 부작, 복수의 미학

임신한 신부와 신랑이 결혼식 리허설을 하던 중, 신부의 옛 연인이자 치명적인 독사 암살단의 수장인 빌(데이비드 캐러딘)이 나타난다. 빌은 더 브라이드(The Bride; 우마 서먼)의 머리에 총을 쏘고 암살단을 시켜 모두를 죽인다. 하지만 더 브라이드는 살아남고, 4년 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자신을 죽인 암살단 멤버들을 하나씩 찾아가 복수하기 시작한다.


<킬빌> (2003)은 타란티노 영화 중 가장 장르적인 작품이다. 이것은 복수 영화이면서 동시에 무술 영화이고, 홍콩 액션의 오마주이면서도 분명 타란티노 고유의 스타일을 지닌 영화이다. <킬빌>의 진정한 매력은 비에타의 여행에 있다. 우마 써먼이 연기한 더 브라이드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다. 그녀는 행동하는 주체이다.


당시 영화계에서 이는 꽤 파격적이었다. 복수라는 주제는 남성 주인공의 전유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칼을 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는 여인이 결국 그 손가락을 움직이고, 칼을 들고, 그 칼로 자신을 죽인 자들을 찾아간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도덕적 질문이 없다. 더 브라이드는 악한가?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원한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원한을 실행한다. 마침내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 우리는 관객으로서 배타적인 쾌감을 느낀다.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킬빌>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형식의 자유로움이다. 영화는 다양한 영화의 언어를 차용한다. 애니메이션 장면이 나타나고, 무술 영화의 스타일이 들어오고, 서양 스파게티 웨스턴(1960~70년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서부극으로, 과장된 폭력과 독특한 음악이 특징)의 관습도 차용된다. 타란티노는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언어로 소화해 냈다. 이는 그가 영화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이해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가 비디오 가게에서 보았던 모든 영화들의 기억이, 더 브라이드라는 한 인물의 복수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킬빌>의 음악적 선택도 이 영화의 매력의 핵심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더 브라이드가 살인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울려 퍼지는 그 특이한 휘파람 소리인데, 이것은 1968년 영국 심리 공포 영화 <트위스티드 너브>를 위해 작곡가 버나드 허만이 만들었던 곡이다. 타란티노는 이 거의 잊혀진 과거의 영화 음악을 가져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휘파람 소리가 울릴 때마다 관객은 혼란을 느끼다가 결국 그것이 죽음의 신호임을 알아챈다. <킬빌>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음악 신호인 "아이언사이드"가 더 브라이드가 자신을 죽인 자들을 발견했을 때마다 울려 퍼진다. 이 재즈 기반의 경쾌한 곡이 폭력적인 장면과 만나는 순간, 그 대비는 관객에게 독특한 흥분감을 준다. 흥미롭게도 더 브라이드가 마지막으로 빌과 대면했을 때는 이 음악이 울리지 않는다. 그 침묵과 공백은 지금까지의 복수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역사를 정복하다

2차 세계대전 시기의 프랑스, 유대인 소녀 쇼샤나 드레퓌스(멜라니 로랑)는 나치 친위대 대령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에 의해 가족이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홀로 탈출한다. 몇 년 후 쇼샤나는 파리에서 에마뉘엘 미미외라는 가명으로 영화관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한편 미국 육군 중위 알도 레인(브래드 피트)은 유대계 미국인 군인들로 구성된 특수부대 "바스터즈"를 이끌고 나치를 무자비하게 처형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독일군 영웅 프레드릭 졸러(다니엘 브륄)가 쇼샤나의 영화관에서 자신이 주연한 선전 영화의 시사회를 열기로 하면서, 히틀러와 나치 고위층이 모두 참석하게 된다. 쇼샤나와 바스터즈는 각자 독립적으로 이 기회를 이용해 나치 지도부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2009)은 타란티노의 변화를 보여준다. 만약 <킬빌>이 B급 영화의 미학을 숭배한다면, <바스터즈>는 고전 영화의 우아함과 만난다. 영상미가 한층 정교해졌고, 각 장면의 구성이 더욱 세련되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타란티노의 근본적인 철학은 변하지 않는다.


<바스터즈>가 차용한 영화들은 매우 흥미롭다. 먼저 이 영화의 기본 구조는 클래식 전쟁 영화들(<The Dirty Dozen>, <The Great Escape>, <Where Eagles Dare>)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타란티노가 정말 원한 것은 더 흥미로운 장르의 혼합이었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2차 세계대전 배경의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만들고 싶었고,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언포기븐(Unforgiven)>의 오프닝 장면과 거의 동일하다. 또한 시네마토그래피에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의 영향이 명백한데, 레오네가 사용했던 긴장감 있는 클로즈업과 얼굴의 표정에 집중하는 방식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기에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극적인 명암과 그림자 처리도 더해진다. 결과적으로 <바스터즈>는 전쟁영화, 스파게티 웨스턴, 독일 표현주의, 그리고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 같은 장르들을 모두 녹여낸 하이브리드 작품이 된 것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대담함은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완전히 다르다. 히틀러와 나치 고위 인사들이 영화 시사회에 모인다. 그리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불타 죽는다.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것이 완벽하게 '일어난다'.


이 선택은 우연이 아니다. 타란티노는 영화의 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영화는 현실이 주지 못한 정의를 줄 수 있다. 우리 세대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비극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라면? 그곳에서는 그 악이 벌 받는다. 그리고 그 순간 관객은 통쾌함을 느낀다. 이것은 도피다. 하지만 우리가 현실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정의감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 노예제와 마주하다

1858년 텍사스에서 해방된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는 독일계 현상금 사냥꾼 킹 슐츠 박사(크리스토프 왈츠)를 만난다. 슐츠는 장고를 자유인으로 풀어주는 대신 현상금 사냥을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장고는 슐츠와 겨울을 함께 보내며 사격술을 배우고, 이제 분리된 아내 브룸힐다(케리 워싱턴)를 구하기 위해 악독한 농장주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영지로 향한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는 타란티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위험한' 영화이다. 노예제라는 미국 역사의 가장 깊은 상처를 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복잡한 반응을 낳는다. 한편으로는 노예 신분인 장고가 결국 자신의 아내를 구하고 자유를 얻는 순간의 쾌감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영화가 역사적 현실을 단순화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하지만 타란티노의 의도를 파악하려면 그가 역사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흑인 주인공이 결국 백인 주인의 시스템 안에서 힘을 얻고 복수한다는 것은, 현실의 노예제가 주지 못했던 것을 영화 속에서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타란티노의 영화 철학이다. 현실의 부당함을 영화 속에서 정정한다.


<장고: 분노의 추적자>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그 대사이다. 독일계 바운티 헌터인 슐츠와 장고의 만남, 슐츠와 캔디의 대화는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슐츠의 정중한 언어와 캔디의 거칠고 폭력적인 언어가 충돌하는 순간들, 그 음악성 있는 대사들이 영화의 진정한 힘이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폭력도 있고 긴장도 있지만, 본질은 여전히 잘 만든 대화와 그 대사의 리듬이다.


타란티노를 마주했을 때 우리가 얻는 것

타란티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종의 정신적 위안이다. 우리 삶은 불공정하다. 악인이 반드시 벌 받지 않고, 선인이 항상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도덕성이 높을수록 더 많이 상처받기도 한다. 우리는 이 불공정함 속에서 매일을 버텨낸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이 부당함을 일시적으로 교정해 준다. 그의 영화 속에서는 정의가 구현된다.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아름다움은 정확히 그 '지금 여기'의 환상 속에 있다. 우리가 <펄프 픽션>의 더 브라이드가 부활했을 때처럼 통쾌해하고, <바스터즈>에서 히틀러의 죽음을 지켜볼 때 기뻐하고, <장고>의 결말을 맞이했을 때 안도감을 느끼는 것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다.


그리고 타란티노는 이를 안다. 그가 영화를 만드는 방식, 그의 대사의 리듬, 폭력의 과장, 음악의 선택,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이 감정에 이르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그는 우리가 영화관을 나올 때 다른 사람이 되길 바란다. 혹은 적어도 그 시간 동안만이라도 우리가 현실의 부당함을 잠시 잊고 순수한 쾌감, 흥분, 그리고 통쾌함을 느끼길 바란다.


이것이 타란티노가 감독 중 가장 오락적이고, 가장 진정한 이유이다. 그는 영화를 숭고한 예술로 만들려는 야망을 버렸다. 대신 그는 영화를 우리 현실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그 놀이터에서 공정함이 지배하고 정의가 승리한다. 우리는 그 놀이터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타란티노의 손을 잡고.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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