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 속에서 인간을 해부하는 외과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를 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고, 느끼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 대사는 무미건조하게 읽히고, 폭력은 예고 없이 터져 나오며, 규칙은 설명되지 않은 채 강요된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란티모스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그는 우리를 익숙한 세계에서 끌어내어 낯선 곳에 던져놓고, 그곳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만든다. 란티모스의 영화는 부조리극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가족의 폭력성, 사랑의 강제성, 그리고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의 작품들이 우리 삶에 주는 것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힘이며, 그를 통해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칙과 규범을 의심하게 된다.
1973년 아테네에서 태어난 란티모스는 우연한 경로로 영화감독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리스 국가대표 농구선수였고, 란티모스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농구를 했다. 하지만 부상으로 농구 경력이 끝나면서, 그는 19세에 영화 연출을 공부하기로 결정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처음부터 감독이 되려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영화학교에 입학할 당시 그가 생각한 것은 "광고를 만들어서 먹고살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1990년대 내내 광고, 뮤직비디오, 무용 영상을 연출하며 기술을 익혔고,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 기획팀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란티모스가 어린 시절 영화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존 휴즈나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그리고 브루스 리의 액션 영화를 즐겼을 뿐이다. 또한 17세에 어머니를 잃은 후 혼자 생계를 꾸려가야 했지만, 그는 이를 "그저 계속 나아가야 했다"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이 모든 경험들—농구 선수의 꿈, 광고 제작의 실용성, 그리고 홀로서기—이 그를 만들었다. 란티모스는 예술영화 엘리트가 아니라, 실무에서 단련된 장인이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는 철학적이면서도 기술적으로 정교하고, 추상적이면서도 명확하다.
규칙이 지배하는 세계
란티모스의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규칙이다. 그의 모든 영화는 특정한 규칙이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송곳니>에서는 송곳니가 빠지기 전까지 집 밖을 나갈 수 없고, <더 랍스터>에서는 45일 안에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 <킬링 디어>에서는 신의 저주 같은 초자연적 규칙이 한 가족을 파멸로 몰아간다. 이 규칙들은 설명되지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으며, 협상 불가능하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란티모스는 이 규칙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규범을 드러낸다. <더 랍스터>의 세계에서 "혼자 있는 것은 범죄"라는 설정은 과장되어 보이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도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암묵적 압박이 존재한다. <송곳니>의 부모가 자식들에게 왜곡된 언어를 가르치는 것은 모든 부모가 자식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주입하는 과정의 극단적 표현이다. 란티모스는 이렇게 일상의 규칙을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본질을 폭로한다.
란티모스 자신은 이렇게 설명한다. "특정 인물을 실험실에 가두고 특수한 상황을 부여한 뒤,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관찰하듯 소재를 구상한다." 그의 영화는 일종의 사회적 실험이다. 변수를 하나 조작하고(예를 들어 "커플이 아니면 살 수 없다"는) 그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지켜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유의지와 사회적 강제, 개인과 집단, 그리고 순응과 저항의 경계를 목격한다.
무표정한 배우, 왜곡된 렌즈
란티모스의 시각적 언어는 그의 철학만큼이나 독특하다. 그의 초기 영화들, <송곳니>와 <알프스>, 에서 카메라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고정된 삼각대, 넓은 프레임, 그리고 수평적인 카메라 워킹이 전부였다. 이 정적인 촬영 방식은 관객에게 거리감을 주고, 인물들을 마치 표본처럼 관찰하게 만든다. 스탠리 큐브릭과 루이스 부뉘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는 란티모스의 형식미는, 웨스 앤더슨과도 비교되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다. 앤더슨이 따뜻하고 동화적이라면, 란티모스는 냉정하고 잔인하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와 <가여운 것들>에서 란티모스는 촬영감독 로비 라이언과 함께 새로운 시각적 실험을 시도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어안렌즈(fisheye lens)의 사용이다. <더 페이버릿>에서는 6mm 초광각 렌즈가 궁전의 복도를 왜곡된 미로로 만들고, <가여운 것들>에서는 4mm 렌즈가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같은 효과를 낸다. 라이언은 란티모스가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에서 그 렌즈를 요청했다"고 설명한다. 왜곡된 이미지는 인물의 혼란과 고립을 시각화한다. 벨라가 세상에 대해 혼란스러워할 때, 던컨이 술에 취해 현실감을 잃을 때, 우리는 그 왜곡된 시선을 통해 그들의 내면을 본다.
란티모스의 또 다른 시그니처는 무표정한 연기다. 그는 배우들에게 최소한의 감정으로 대사를 읽도록 지시한다. 그 결과 인물들은 로봇처럼 말하고, 기계적으로 행동한다. <더 랍스터>의 콜린 파렐은 억눌린 어색함으로, <킬링 디어>의 배리 키오건은 차가운 정중함으로, 각자의 역할을 완성한다. 이 "란티모스 무표정(Lanthimos Deadpan)"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최면을 건다. 우리는 그 비현실적인 말투와 행동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발견하게 된다.
<송곳니>, 가족이라는 감옥
한 교외의 주택에 부모와 성인이 된 세 자녀가 산다. 하지만 이 자녀들은 한 번도 집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왜곡된 언어를 가르친다. "바다"는 "안락의자"를 의미하고, 비행기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난감이다. 자녀들은 송곳니가 빠질 때까지 집을 나갈 수 없다고 믿는다. 이것이 <송곳니>(2009)의 세계다.
<송곳니>는 가족이라는 제도의 병리학적 단면을 보여준다. 부모의 통제는 절대적이고, 자녀들은 영원한 어린아이로 머문다. 아버지는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는 경비원 크리스티나를 데려와 아들의 성적 욕구를 해결하게 하고, 자녀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기며, 외부 세계에 대한 공포를 심는다. 하지만 크리스티나가 큰딸에게 <록키>와 <죠스> 같은 영화 비디오테이프를 몰래 건네면서 균열이 생긴다. 큰딸은 영화 속 대사를 암송하고, 춤을 따라 하며, 결국 아령으로 자신의 송곳니를 부러뜨린 후 아버지 차의 트렁크에 숨어 탈출을 시도한다.
이 영화의 공포는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폭력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는 데 있다. 부모는 자녀를 "보호"한다고 믿고, 자녀들은 순종이 당연하다고 배운다. 하지만 큰딸이 자신의 얼굴을 아령으로 내리치는 장면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그녀는 자유를 원했지만, 아버지가 심어놓은 규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송곳니가 빠져야 나갈 수 있다"는 거짓말을 믿는다. <송곳니>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가 믿는 규칙 중 얼마나 많은 것이 누군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거짓말인가?
<더 랍스터>, 사랑의 강제
어느 근미래, 혼자 사는 것은 범죄다. 배우자를 잃거나 이혼한 사람들은 호텔로 보내지고, 45일 안에 새로운 짝을 찾지 못하면 자신이 선택한 동물로 변한다. 데이비드(콜린 파렐)는 아내에게 버림받은 후 이 호텔에 도착한다. 그는 바닷가재가 되기를 원한다. 호텔에서 사람들은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코피를 자주 흘리거나, 절뚝거리거나. 하지만 데이비드는 실패하고 숲으로 도망쳐 혼자 사는 사람들의 집단에 합류한다. 그곳에서 그는 근시안인 여자(레이첼 와이즈)와 사랑에 빠지지만, 이 집단은 사랑을 금지한다.
<더 랍스터>(2015)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체주의를 풍자한다. 호텔은 커플이 되어야 한다고 강요하고, 숲 속 집단은 혼자 있어야 한다고 강요한다. 양쪽 모두 극단이고, 양쪽 모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 란티모스는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고 강요하는지를 보여준다.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하고, "정상 가족"을 꾸려야 한다는 압박. 혼자 사는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영화의 가장 날카로운 장면은 호텔에서 새로 결혼한 커플의 결혼식이다. 전통적인 서약 대신, 남편은 "나는 행복합니다"라고 말하고, 아내는 "저도요!"라고 대답한다. 그게 전부다. 란티모스는 묻는다. 사랑이 있는가? 아니면 그저 "커플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켰을 뿐인가? 영화의 결말은 모호하다. 데이비드와 그의 연인은 같은 조건(근시안)을 가지기 위해 데이비드가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려 하는 장면이 연출되지만, 우리는 그가 실제로 그렇게 했는지 알 수 없다. 이 모호함이 영화의 힘이다. 란티모스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질문만 남긴다.
<킬링 디어>, 그리스 비극의 현대적 재해석
성공한 심장외과 의사 스티븐 머피(콜린 파렐)는 이상한 십 대 소년 마틴(배리 키오건)과 친분을 유지한다. 하지만 마틴의 아버지는 몇 년 전 스티븐의 수술대 위에서 죽었고, 마틴은 스티븐에게 복수를 원한다. 마틴은 스티븐에게 선택을 강요한다—자신의 가족 중 한 명을 죽이거나, 아니면 가족 모두가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지켜보거나. 스티븐의 아내 안나(니콜 키드먼)와 두 자녀는 원인 불명의 마비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고, 스티븐은 선택해야 한다.
<킬링 디어>(2017)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에서 아가멤논 왕은 여신 아르테미스의 성스러운 사슴을 실수로 죽이고, 그 대가로 자신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킬링 디어>에서 마틴은 아르테미스의 역할을 하고, 스티븐은 아가멤논이 되며, 스티븐의 자녀들은 이피게네이아가 된다. 하지만 란티모스는 고전 비극의 숭고함을 현대의 냉소로 대체한다.
가장 불편한 점은 스티븐과 안나의 반응이다. 두 부모 모두 자신을 희생하는 대신 자녀 중 누구를 죽일지 고민한다. 안나는 스티븐에게 "다시 아이를 낳으면 되잖아"라고 말한다. 스티븐은 학교 교장과 만나 "어느 자녀가 더 가치 있는지"를 판단하려 한다. 이들의 행동은 비이성적이고 도덕적으로 파탄 나 있다. 하지만 란티모스는 그것을 무표정하게 제시할 뿐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스티븐은 눈을 가린 채 가족을 향해 총을 쏘고, 결국 아들 밥이 죽는다. 저주는 풀리지만, 가족은 그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계속한다. 이 냉담함이야말로 란티모스의 진짜 공포다. 우리는 비극 앞에서도 일상을 유지한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권력의 삼각관계
18세기 초 영국, 여왕 앤(올리비아 콜맨)은 병약하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 그녀는 17마리의 (죽은 자녀들을 대신하는) 토끼를 기르며 국정에는 관심이 없다. 실질적인 통치는 여왕의 측근이자 비밀 연인인 사라 처칠(레이첼 와이즈)이 맡는다. 하지만 사라의 사촌 애비게일 힐(엠마 스톤)이 궁전에 도착하면서 권력의 균형이 무너진다. 애비게일은 여왕의 통풍을 치료하며 신뢰를 얻고, 곧 사라와 여왕의 애정을 두고 경쟁한다. 두 여자의 싸움은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성적이고, 냉혹하면서도 희극적이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는 란티모스가 토니 맥나마라와 처음 협업한 작품이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전환점이 되는 영화다. 이전 작품들의 냉정한 거리감은 여전하지만, 더 화려하고 더 접근 가능하다. 어안렌즈는 궁전의 화려함과 등장인물들의 갇힌 상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자연광 촬영은 18세기의 촛불과 햇빛을 그대로 담아낸다. 하지만 란티모스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이 영화 역시 권력과 통제에 관한 이야기다.
세 여자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을 원한다. 사라는 국가를 통치하고 싶어 하고, 애비게일은 귀족의 지위를 되찾고 싶어 하며, 앤은 그저 사랑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도 승리하지 못한다. 사라는 추방되고, 애비게일은 권력을 얻지만 앤의 노예가 되며, 앤은 두 사람 모두를 잃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앤은 애비게일에게 자신의 다리를 마사지하라고 명령하고, 애비게일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애비게일은 고통스러워하지만 계속 마사지한다. 그 순간 카메라는 앤의 토끼들을 비춘다. 우리는 깨닫는다. 이 세계에서는 모두가 누군가의 애완동물이다.
<가여운 것들>, 벨라의 재탄생
빅토리아 시대 런던, 고드윈 백스터 박사(윌렘 대포)는 자살한 임신부의 시체를 되살린다. 그는 여자의 뇌를 태아의 뇌로 교체하고, 그녀에게 벨라 백스터라는 이름을 준다. 벨라(엠마 스톤)는 성인의 몸을 가졌지만 유아의 정신을 가진 존재다. 고드윈은 그녀를 집 안에 가두지만, 벨라는 호기심이 많고,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녀는 던컨 웨더번(마크 러팔로)이라는 변호사와 함께 유럽으로 떠나고, 리스본에서 성적 쾌락을 발견하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빈곤을 목격하며, 파리의 매춘업소에서 일하며 사회주의를 배운다. 벨라는 성장하고, 배우고, 결국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다.
<가여운 것들>(2023)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페미니즘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하지만 셸리의 괴물이 세상의 거부로 괴로워했다면, 벨라는 세상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인다. 그녀는 "정중한 사회"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성노동자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몸과 정신을 스스로 통제한다. 란티모스는 어안렌즈를 통해 벨라의 혼란과 흥분을 시각화하고, 엠마 스톤은 유아의 순진함에서 성인의 지성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천재적으로 연기한다.
<가여운 것들>의 핵심은 남자들이 벨라를 통제하려 하지만 실패한다는 것이다. 고드윈은 그녀를 집 안에 가두려 하고, 던컨은 그녀를 소유하려 하며, 전 남편 알피는 그녀를 다시 예속시키려 한다. 하지만 벨라는 그들 모두를 거부한다. 그녀는 배우고, 읽고, 의학을 공부하며, 결국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 영화는 묻는다. "가여운 것들"은 누구인가? 벨라인가, 아니면 그녀를 통제하려다 실패한 남자들인가?
음악으로 완성되는 부조리의 세계: 저스킨 펜드릭스와의 협업
<가여운 것들>에서 음악은 벨라의 내면을 반영하는 동시에 관객을 극도로 낯설고 불안한 세계로 이끈다. 란티모스는 기존 영화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음향 세계를 원했고, 신진 뮤지션 저스킨 펜드릭스(아방가르드 음악, 일렉트로닉, 포스트펑크까지 아우르는 독특한 감각을 가진 음악감독이자 뮤지션이다)를 추천받아 직접 음악을 들어본 후 '이상하고 예측 불가한 에너지'에 반해 바로 협업을 제안했다. 펜드릭스는 "란티모스는 내게 완전히 자유를 보장했고, 내가 해낸 작은 실험들까지 믿고 밀어줬다"고 말한다.
펜드릭스가 작곡한 사운드트랙은 유아의 심리와 성인의 깨달음 사이의 혼란을, 날카롭게 긁히는 듯한 현악의 고음, 불협화음의 음색, 그리고 반복적인 음계의 변주로 표현한다. 특히 벨라가 낯선 세상을 경험할 때, 극도로 미니멀하고 날카로운 음들이 공간을 채우며 관객을 감정적으로 흔든다.
특히 펜드릭스의 음악은 다음과 같은 독특한 기법들을 적극 활용한다.
하이 피치 현악: 벨라가 세상을 처음 접할 때, 극도로 높고 날카로운 바이올린·비올라·첼로의 한계를 밀어붙여 유아적 두려움과 장난스러운 혼란을 표현한다.
불협화음과 예측 불가한 코드 진행: 익숙한 멜로디를 의도적으로 깨뜨려, 정서적 안정과 불안정이 끊임없이 교차한다. 갑자기 등장하는 신경을 긁는 듯한 불안정한 소리와, 예측불가한 음색이 관객의 심리까지 흔든다.
반복적·집착적인 테마: 벨라의 습득-성장-반복 패턴에 따라 특정 음계, 패턴, 리듬이 점차 변화한다. 미니멀한 피아노, 목관 반복이 벨라의 내적 순환과 닮아 있다.
오케스트라의 파괴적 변주: 벨라가 쾌락, 공포, 성장, 혼란을 경험할 때,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갑자기 "불편한 소음"이 되어 터진다.
이러한 사운드는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라, 벨라의 정신과 세상의 기괴함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란티모스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음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벨라의 심리적 세계와 관객의 몰입을 동시에 증폭시키는 '또 하나의 살아있는 캐릭터'로 작동한다.
<부고니아>, 음모론자와 CEO의 충돌
테디 개츠(제시 플레먼스)는 양봉업자이자 음모론자다. 그는 꿀벌이 죽어가는 이유가 외계인 때문이라고 믿고, 제약회사 CEO 미셸 풀러(엠마 스톤)를 납치한다. 테디는 미셸이 "안드로메다인"이라는 악의적인 외계 종족의 일원이라고 확신하고, 그녀를 고문하며 진실을 밝히려 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우리는 누가 진짜 악인인지 알 수 없게 된다. 테디의 어머니는 미셸의 회사가 진행한 임상시험 때문에 혼수상태에 빠졌고, 미셸은 테디에게 대안적인 외계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를 조종한다.
<부고니아>(2025)는 2003년 한국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란티모스가 에프티미스 필리푸와 8년 만에 재결합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음모론, 기업의 악, 그리고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탐구한다. 테디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 인물이지만, 동시에 거대 제약회사의 실제 피해자이기도 하다. 미셸은 냉혹한 CEO이지만, 그녀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다. 란티모스는 관객을 불편한 위치에 놓는다.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테디는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미셸의 차에서 가져온 부동액을 어머니의 정맥에 주사하고, 어머니는 죽는다. 이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테디의 망상은 그를 파괴했다. 하지만 란티모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미셸은 테디에게 외계인과의 만남을 약속하고, 테디는 다시 희망을 품는다. <부고니아>는 우리 시대의 초상이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가 흐려지며,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 수 없다.
<부고니아>의 음악: 키워드만으로 탄생한 사운드
<부고니아>의 사운드트랙 작업은 과감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저스킨 펜드릭스는 영화의 대본도, 완성본도 직접 보지 못했다. 대신 란티모스가 전해주는 "bees(벌), basement(지하실), spaceship(우주선)" 세 가지 키워드만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곡했다. 그는 자신이 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불협화음, 강렬한 현악기 사운드, 의도적으로 조화를 깨뜨리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냈고, 이 때문에 영화 전체가 실제 현실에 닿기보다는 꿈이나 악몽처럼 "느껴지는" 효과가 더욱 극대화됐다.
펜드릭스는 이 세 단어에서 받은 감각만을 바탕으로 기괴한 현악기 사운드와 오케스트라의 혼돈, 우주적이고 불안한 분위기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 결과, 음악은 영화의 미스터리함과 인물의 불안감을 한층 더 증폭시키는 '무의식의 신호'처럼 작동한다.
특히 90인조 오케스트라의 변칙적 연주, 오케스트라 내 연주자가 "실수한 듯" 서로 맞지 않는 소리를 내거나, 강렬한 하이 피치가 심리적 폭력을 더해준다. 이런 기법들은 영화의 음모론적 세계관과 완전히 일치하며, 시청각적으로 극도의 몰입과 불편함을 유발한다.
란티모스는 현장에서 촬영할 때 이미 이 음악을 틀어 놓으며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전체적인 정서와 감정의 톤을 공유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부고니아>의 사운드트랙은 음악 자체로 독립적이면서도, 영화의 영상·연기와 완전히 동등하게 작동하는 '또 하나의 현실'이 된다.
이러한 음악적 특징들은 란티모스 영화가 주는 '익숙함의 낯섦'을 한층 더 강렬하게 만든다. 관객은 캐릭터의 감정, 공간의 위화감을 단지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으로도 직접 체험하게 되며, 장면의 미스터리와 불안정이 한층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음악이 극의 흐름을 주도하고, 란티모스의 부조리한 세계관에 숨을 불어넣으며, 관객을 더욱 진한 몰입으로 이끈다. 란티모스 영화에서 음악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삶의 부조리와 감정의 균열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또 다른 '캐릭터'라 할 수 있다.
란티모스와 함께 사는 법
란티모스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편함을 견디는 연습이다. 그의 영화는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를 낯선 곳에 던져놓고, "여기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족, 사랑, 권력, 자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란티모스는 런던에서 아내이자 배우인 아리안 라베드와 함께 산다. 그들은 사무실 대신 단골 레스토랑에서 시나리오를 논의하고, 란티모스는 여전히 그리스의 작가 에프티미스 필리푸와 스카이프로 협업한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 외에는 특별한 취미가 없다. 그저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쓰고, 찍는다. 라베드는 말한다. "요르고스는 신비에 공간을 준다. 그는 배우들에게도 설명하지 않는다."
이것이 란티모스의 방식이다. 그는 답을 주지 않는다. 그는 질문만 던지고, 관객이 스스로 답을 찾길 원한다. 그의 영화는 끝나도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극장을 나온 후에도 계속 생각하게 된다. "송곳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이비드는 정말 눈을 찔렀을까?" "벨라는 정말 자유로운가?"
란티모스의 영화가 우리 삶에 주는 것은 비판적 거리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 예를 들어 가족의 사랑, 낭만적 관계의 필요성, 사회적 규범을 낯설게 만든다. 그 낯섦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믿는 규칙 중 일부는 누군가 우리에게 심어놓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사회가 우리를 선택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란티모스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때로는 역겨운 자유. 하지만 그 자유 속에서 우리는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의 역할이다. 란티모스의 손을 잡고, 그의 부조리한 세계로 들어가라. 거기서 당신은 당신 자신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