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리고 기억의 조각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어린시절의 엄마는 끝없는 집안 일에 지쳐있었다. 종종걸음으로 해도 끝나지 않는 일거리에 피곤해하던 뒷모습. 나는 그런 엄마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멀찌감치 떨어져 혼자 놀곤 했다.
초등학교를 넘어 중학교에 가면서 엄마가 해야하는 집안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실감했다. 다섯딸의 엄마이자 아내, 맏며느리였던 엄마. 하루에 빨래를 두번하고 세끼 밥을 차리고 도시락을 열개넘게 싸야하는 수험생 뒷바라지를 거치는 동안 엄마는 고대병원 한양대병원 서울대병원을 진료과목별로 다닐 정도로 여기저기가 아팠고 막내딸인 내가 드디어 수험생이 되었을때 엄마는 이미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나는 반찬 투정 한 번 하지 않고 엄마의 병실을 방문해서 엄마를 들여다보고 면접을 보러가고 심지어 수능날에도 엄마가 내가 시험을 보러 가는 줄도 모르고 오늘 왜이리 일찍 나가냐고 물어볼 정도로 알아서 하는 착한 딸이었다. 엄마에게는 한번에 척척 대학에 붙은 착한 딸들이 가장 큰 자랑이자 행복이었고 그건 당신의 자아실현으로 보이기도 했다. 내가 당신의 행복에 일조를 한다는 던 나에게도 기쁨이었다.
다들 대학에 다니고 취업을 하고 언니들이 한 명씩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는 동안에도 엄마는 끊임없이 아팠다. 협심증. 관절염. 척추협착증. 담석증. 이석증...다 기억도 못할 끝없는 병명들이 이어지고 엄마는 자잘하게든 크게든 언제나 아픈 사람이 되고 있었고 한창 대학생활에 빠져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던 내 마음 한편을 무겁게 했다.
어느날부터인가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무릎관절이 거의 다 닳아 활동이 불편해졌고 불면이 심해져 그 고통을 호소하곤 했다. 언니들은 모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대학 끝무렵이었던 나는 엄마를 설득해 처음으로 정신과를 찾았다. 의사는 웃으며 거동이 불편해지면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우울을 겪는다고 그걸 노인성우울증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이를 먹으면 호르몬분비가 줄어들어 수면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호르몬분비를 유도하는 작은 알약 반개만 먹으면 된다는 덧붙임에 엄마는 웃었다. 자신이 수많은 사람들이 겪는 증상을 겪고있을 뿐이라는 사실에 안심하는것 같았다.
곧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여전히 종종 아팠고 무뚝뚝하고 무관심한 아빠도 직장과 육아로 바쁜 언니들도 아닌 나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밤잠이 안정되고 나서도 전화는 자주 울렸고 한밤중에도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에 달려가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그렇게 또 한 번 응급실에 가는구나 담담한 마음으로 구급차를 불러 응급실수속을 마치고는 급성간염으로 심각한 상태임을 통보받았다.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간수치에 엄마는 응급실에서 응급병동으로 옮겨졌고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지극히 상투적이면서도 서늘한 말로 나를 비롯한 가족들을 긴장시켰다. 스산한 시간들. 잠깐 위급함인줄 알았던 상태는 언제 위독해질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이틀 일주일 한달을 넘기며 이어졌고 겨우겨우 죽을 고비를 넘기고 엄마는 한참만에 그곳에서 나왔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엄마를 엄마처럼 살피게 되었던 것이. 언제 또 위급해져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러니 매순간을 소중히 보내야겠다는 간절함.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엄마는 여전히 긴 시간 혼자 집에서 보내는 것을 힘겨워했고 전화도 잦았다.
나는 엄마의 삶을 찾아주고 싶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얼 좋아하고 무얼하고 싶은지 궁금했고 내가 알고 있었던 엄마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엄마를 이해하고 이 사람의 남은 삶이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것이 내가 엄마를 사랑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엄마, 엄마는 학교다닐때 뭐가 제일 좋았어?" 나는 엄마에게 한마디씩 청해 길고 긴 이야기를 들었다. 해방이 되기도 전에 태어나 그 당시엔 당연했던 분위기에 고등학교도 마저 졸업하지 못하고 오빠의 학업을 뒷바라지하느라 하숙일을 했던 엄마. 빨리 결혼해야한다는 분위기에 선을 보고 결혼해 줄줄이 딸린 시동생들과 한칸방에서 살며 가부장적인 아빠와 시동생들을 뒷바라지 해야했던 엄마. 맏며느리에 아들을 낳지 못해 딸을 다섯 낳고 뒷바라지했던 엄마.
엄마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더해서 엄마가 해봄직한 것들을 찾아보고 슬쩍 권해보고 아예 손을 잡아끌고 데려가 등록을 시키기도했다.
그렇게 엄마는 아쿠아로빅을 실버체조를 시작했다. 엄마가 조금 더 활기차게 움직였다. 지역문학대회에서 시로 구청장에게 받은 상패는 아빠의 자랑이 되었다. 합창대회에 나가 노래를 부르고 부상으로 받은 멀티오디오플레이어와 엄마가 무대위에서 노래부르는 사진은 엄마의 화장대에 나란히 놓였다. 엄마는 점점 적극적으로 내가 건네주는 프로그램안내와 신청서를 받고 연극반에 참여해 연극무대에도 서고 실버합창단에 시험도 치고 들어가 열심히 합창단을 다니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연말공연을 치렀다. 나와 언니들은 엄마의 무대를 보러 복지관에 구청강당에 백화점에 찾아가 꽃다발을 전하고 더없이 환하게 웃는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한해가 지나면 환하게 웃는 엄마의 사진들을 뽑아 엄마에게 선물하고 가족들이 모였을 때 흐뭇하게 함께 보기도 했다. 나는 엄마가 이제 스스로 그리고 혼자서도 자신의 삶을 즐기고 있다고 앞으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나는 내 일에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과 만남에 집중하고 있었다.
몇년이 흐르는 사이 엄마의 일상은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이따금 엄마를 보러가면 가방 속에는 잡동사니가 가득했고 깜박하고 잊어버린 자잘한 물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빠의 화가 큰 책망으로 다툼으로 이어지고 냉랭한 분위기에 위축되는 엄마를 보는 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집에 들어와 2층의 부모님과 옥탑에서 따로 또 같이 지내게 된 건 삐그덕거리는 그 분위기 속에 있는 엄마를, 자꾸만 전화하는 엄마를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곁을 떠난 사이 일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엄마를 못마땅해한 아빠가 집안일을 하나둘 주도해서 하고 있었고 엄마는 깜빡거리는 일이 더 잦아지고 있었다. 나는 아빠 몰래 엄마랑 데이트하며 드라이브를 하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사먹으러 가기도 하며 일주일에 한두번씩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엄마에게 활력을 주려 애를 썼지만 엄마의 악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나와 언니들은 엄습하는 불안을 달래며 엄마를 모시고 가 대학병원에서 검사를 했고 결국은 치매로 향하는 과정에 있다는 인지저하라는 판정을 받아들었다.
판정을 받은 날을 기억한다. 의사가 그려준 하향그래프와 기준선. 하향그래프를 막을수는 없지만 완화시킬수있다며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말투로 알츠하이머성 치매를 설명하던 목소리.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흐르자 "보호자분, 울지마시고, 가족이 잘 받아들여서 도와줘야지요." 하고 나무라며 설명을 이어가던 치매 분야 권위자 라는 교수의 온화하면서도 냉정하던 얼굴.
그래. 의사가 말한 대로 괜찮을거야. 아직은 심각한 수준이 아니라고 했으니 잘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되겠지. 의사 말대로 엄마만 그런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는데 슬퍼할 수만은 없지. 되뇌며 시간이 흘러갔고 엄마는 조금씩 기억을 잃다가 아빠가 쓰러지시고 병원에 입원하시고는 급격히 악화되셨다. 함께 긴 시간을 보내온 동반자가 옆에 없다는 게 받아들이 힘들었기 때문일까. 아빠의 무뚝뚝함과 구박이 엄마의 상태를 악화시킨다고 느꼈던 나는 아빠의 부재로 불안해하는 엄마를 보면서 어찌해야할 바를 몰랐다. 괴로웠다. 숨을 쉴 수 없는 희박한 공기 중에서 간신히 버티는 것 같은 나날이었다.
큰수술을 마치고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자 언니들과 내가 일손을 모으는 것으로는 엄마아빠의 일과를 챙기기에 역부족이었다. 여기저기 문의하고 서류를 떼고 처리하는 와중에도 불평을 늘어놓는 아빠와 여전히 불안정한 엄마를 보며 나는 절망스러웠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기는커녕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에 공포가 밀려왔다. 언니들에게 말해보아도 곁에서 지켜보는 나의 심정과 달리 언니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여기는 것 같아 더욱 괴로웠고 나는 웃음도 잃고 생기도 잃고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이가 그런 나에게 지쳐 더 이상 안되겠다는 말에, 그제야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엄마가 내민 손을 잡아주려던 방편이 이제는 내 삶을 위태롭게 흔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빠에게 처음으로 엄마에 대해 아빠에 대해 내가 어떻게 느끼며 견뎌왔는지 이야기하며 눈물은 오열이 되었다. 언니들에게 그간 내가 엄마의 기댐과 엄마아빠와의 관계속에 어떻게 버티고 참아왔는가 차분히 이야기하다가 역시 오열이 되고 말았다. 내 모든 걸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나를 있는 그대로 보이고 고통과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서 오열은 통곡이 되었다. 나는 나를 위해서도 엄마를 위해서도 그동안 내가 놓지 못하고 있던 엄마 손을 놓아도 된다는 것을 아니 놓아주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도 엄마의 삶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야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을 책임지던 엄마의 엄마역할을 놓았다.
언니들과의 의논 끝에 엄마를 데이케어센터에 보내고 엄마아빠의 삶은 집안일을 챙겨주시는 요양사와 두분의 몫으로 두고 나는 집을 나왔다. 아빠는 더이상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처음에는 불안해하며 나를 찾았지만 거짓말처럼 금세 적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언니들과 나는 다함께 엄마아빠 두분이 꾸려가는 삶을 거리를 지키고 보며 같이 또 나눠가며 챙긴다. 서로가 도와가며 각자의 일과를 열심히 살아간다.
또 다시 엄마아빠때문에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이 온다면 이제 우리 자매들은 주저없이 서로에게 털어놓고 나눌 것을 안다. 서로를 붙잡고 목놓아 울게 되더라도 다함께 차근차근 해결해나가리란 것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을 맞는다면 또 다시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 나약한 내 모습 그대로 마음을 표현하고 울고 웃으며 나눌 것이다. 가족들,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함께할 것이다. 완전히 무너져도 괜찮다는 것을 그렇게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해준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