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의 내 일부가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얼마전의 나도 나였는데. 얼마전의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이 아주 멀리 느껴진다.
이전의 나도 얼마전의 나도 지금의 나도 모두 나지만.
지금껏 살아오며 마음 속 깊이 새기곤 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감각한다.
매 순간의 아름다움. 햇살과 바람의 흔들림. 계절의 향취. 지나치는 이들의 살아있는 표정. 나지막이 건네는 말의 따뜻함. 포옹으로 전해지는 마음. 생경함이 주는 활기와 호기심. 웃음을 더하는 유머. 느긋한 움직임이 주는 여유.
얼마전의 순간들에서 배운다. 웃지 못한다면. 무감각하다면. 내 자신이 싫어진다면. 시야가 좁아져 옆이 보이지 않는다면. 쉬고만 싶다면. 힘들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있음을. 아무리 바쁜 순간이라도 멈추어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고 나자신을 들여다봐야한다는 것을.
몰랐던 나를 새롭게 알아간다.
나는 엄마의 감정에 민감한 아이였다. 어느 누가 그렇지 않으랴만은. 지금도 다른 이들의 감정에 민감도가 높다. 민감도가 높다는 그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특성일 텐데.
때로 예민하게 때로 다정하게 드러나고 때로는 감응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다.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이 곤란한 일을 겪으면 해결해나갈 걸 알면서도 차마 그 상황을 보지 못하는 민감도가 높은 아이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생각보다 많고 그래서 채널을 돌려버리거나 장면를 건너뛰는 경우도 많으며 그렇게 정서적으로 감응하는 민감도가 높은 이들을 부르는 심리학적 용어가 따로 있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았다.) 힘들 때는 고통을 겪는 이들에 대한 뉴스나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등장하는 공포영화도 좋아하는 정치인이 토론에서 말도 안 되는 무시를 당하는 걸 보는 것조차 어렵다. 활자로 정리된 기사를 그것도 주간지와 같은 기사를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든 것들도 견딜 수 없을 때까지 견디는 편이라는 것도 책임감이 강한 편이라는 것도. 그간의 일들을 듣던 이들이 같이 눈물을 흘리고 말해주어 새삼 알게 되었다.
민감도를 낮추려는 본능적인 노력으로 덤덤하게 표현하고 털털하게 받아들이고 넘기곤 했던 외향적인 나도 나지만 민감하게 감응하는 탓에 부끄러움도 많고 겁도 많고 조심스러워 하는 내향적인 나도 나라는 것을.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가 무엇보다도 큰 영향을 미치고 나를 좌우한다는 것을. 내 삶의 방향이나 가치들까지도. 진정 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의 길을 지지해주며 함께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나갈 수 있는 관계임을 절실히 느낀다.
감정들을 스스로 헤아리는데 정신을 쏟는다. 그 감정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적절히 표현해내려고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해 집중한다.
이전의 나도 나 자신과, 곁에 있는 이와, 세상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고 싶어 오래도록 노력해왔음을. 얼마전의 나도. 그러니까 언제나 그와 같은 마음이었지만 그것을 일상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임을 안다. 지금의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백척간두허공에서 한 걸음 떼듯. 두려움에 떨면서도 미지의 세계로 발을 딛는다.
나를 내려놓고 상대에 온전히 귀기울이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또 함께 맞추어 나가는 순간이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그대로 맡긴다.
가장 내밀한 나 자신과의 대화에서든 가게 점원과의 대화나 가족들과의 통화와 같은 사소하고 익숙한 순간이든 이력서를 쓰고 인터뷰를 하는 낯설고 어색한 순간이든.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에 집중한다. 그렇게 한 걸음이 두 걸음이 되고 세 걸음이 되리라는 걸 안다.
새로이 만나는 낯선 이들 속에서도.
새로이 시작하는 일에서도.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도 얼마전의 나도 아님을 느낀다. 이전의 나와 얼마전의 나는 나의 일부가 되어 지금의 내가 그것을 딛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디딤돌이 되어주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