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드는 이미지 속에서 사는 것이 당연해진 지금. 의식을 하건 하지 않건 공해처럼 쏟아지는 이미지들 속에서도, 본다는 행위가 가장 적극적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나는 이따금 생각한다. 그건 아마도 사랑하는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일 것이라고. 물론 사랑하는 사람일수도 사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정을 수반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라보며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일 수도, 떨림이 이어져 사랑이 커지는 순간일 수도, 다시 한번 바라보며 사랑의 절정을 맛보는 순간일 수도 있다.
아마도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은 본다는 행위 자체가 가장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가 되는 순간 중의 하나가 아닐까. 소유하지 못해도 바라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무엇이 아닐까.
어차피 소유한다 해도 그것을 항상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2.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혁명정부는 가장 먼저 국왕의, 정부가 소유한 작품들을 공공의 것으로 돌리고 궁정을 museum(우리나라에서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구분하지만 사실상 미술관은 미술전문 박물관으로 박물관의 하위분류에 가깝다. 일제의 잔제로 이어지는 용어의 문제라 일단은 뮤지엄으로 통칭한다.)으로 바꾸어 모두가 그것을 볼 수 있게 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출발한 뮤지엄은 몇백년이 지나 이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었다. 바라보는 것이 허용되는 걸 넘어 권장이 되는 혹은 바라봄 자체를 위한 공간. 뒤집어 말하면, 뮤지엄을 통해서 시각문화의 흐름을, 특히나 시각문화의 공공성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뮤지엄이 갖는 공공재로서의 가치, 시각문화에서 그들의 공공성이 갖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뮤지엄 바라보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