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재로서의 뮤지엄museum
1. 대학박물관, 한국박물관 발전의 교두보
국립중앙박물관에 이어 두 번째로 살펴볼 우리나라의 주요 박물관은 대학박물관.
대학박물관이 그리 중요한가 싶을 수도 대학박물관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대학박물관에 무심했다가 박물관사를 돌아보며 다시 눈여겨 보게 되었으며. 특히 황윤의 <박물관 보는 법>을 읽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았음을 밝힌다. (우리나라 박물관사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꼭 한번 읽어보길. 꽤 재미있다.)
우리나라의 대학박물관은 1924년 연세전문학교에서 최초로 조선인 주도로 박물관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아래 연표에서 보듯 30년대 고려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가 이어 박물관을 설립했고 이후 50년대와 60년대에도 경희대와 동아대, 동국대, 성균관대에서 박물관을 설립한다. 이들 대학박물관들은 국립박물관에서 사립박물관으로 발전해나가는 과정의 중간단계의 역할을 해주었다. 실제 60년대 한국의 박물관 35개 전체 중에서 대학박물관이 15개로 43%라는 수치가 당시의 상황을 증명한다.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폐허가 된 나라에서 국립박물관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자리를 잡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낙후되어 사립박물관이 발전하기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 대학박물관들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우리나라의 주요 유물들을 수집, 전시하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발굴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학문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우리나라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된다. 특히 60년대까지 설립된 대학박물관들을 살펴보면, 국보를 비롯해 국가주요문화재로 지정된 수준 높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또 다양한 발굴조사를 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경희대, 동아대, 동국대, 성균관대 등)
대학박물관 연표
2. 근대지성의 상징, 대학박물관
<박물관보는 법>에서는 이들 대학들이 박물관에 공을 들인 것은 박물관이 근대지성의 상징으로서 대학의 위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일제의 식민지배로 근대화가 시작되고 그들이 주도해서 시작된 국립박물관이 근대화의 일환이자 식민지배 내면화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면 대학박물관은 우리나라사람들의 근대화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의 일환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갑작스러운 근대화와 식민지배에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자 한 가장 적극적인 대응이 바로 근대적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해방 이후에는 고등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이어졌다면, 대학은 ‘대내적으로는 교육의 질을 제고하고 대외적으로는 근대교육기관이라는 홍보가치를 지닌(황윤, 박물관 보는 법)’ 대학박물관을 설립하고 규모를 확장하는 것으로 대응한다.
우리나라의 대학박물관만이 아니라 서구 박물관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박물관은 근대에서야 등장한 공공기관이자 교육기관이기도 했다. 영국의 첫 박물관 애쉬몰리언 박물관 역시 옥스퍼드대학교 내에 세워진 기관으로 교육적인 목적으로 기증된 소장품들을 전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지금도 역시 뛰어난 소장품과 전시, 연구와 교육을 이어가는 세계의 유명박물관 중에는 대학박물관들이 포함되어 있다. 과거의 유물을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 교육하고 그것의 예술적인 가치를 공유하고 드높이며 나아가 작품들을 통해서 예술의 영역 자체를 확장해온 박물관의 역사는 근대지성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자면 박물관은 기본적으로 소장품을 수집하고 그것을 보존하고 또 연구하는 것에 나아가 전시를 할 수 있어야하는 공공시설이기 때문에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재원이 필요했다. 소장품을 갖추고 건물을 세웠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소장품을 제대로 보관하고 계속되는 연구와 전시를 통해서 박물관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박물관의 존재 여부가 문화적 역량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라고도 볼 수 있었다.
사진순대로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자대 박물관의 전경, 주요 대학박물관은 근대적 지성의 상징이자 대학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출발했고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척박한 우리나라 박물관의 상황에 어느 정도 기여해왔다.
3. 대학박물관의 빛과 그림자
대학박물관들은 우리나라의 유물을 적극적으로 매입하고 소장, 전시하면서 우리나라의 유물을 지키고 또 그 가치를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박물관의 설립기관이었던 대학들이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지배시기 식민지배를 묵인하거나 적극적으로 동참하면서 친일을 하기도 했다는 것 역시 밝혀야 한다.
예를 들어,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 인사로 거론되는 김활란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은 박물관 건립에 매우 공을 들인 것으로도 알려졌다. 한국전쟁으로 소장품이 소실되자 김활란은 자신의 소장품을 기증해서 박물관을 다시 정비했고 대학재단을 설득해서 당시 초고가였던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1년후 국보로 지정, 조선4대 명품 도자기 중 하나라고 평가받음)를 매입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이 소실되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그는 일제통치 시대 내내 대학교육을 일제화의 수단으로 삼았고 대학의 산하기관으로 박물관을 운영하며 조선총독부 산하의 제실박물관이나 이왕가박물관과 다르지 않은 관점으로 우리나라의 유물을 수집하고 소장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친일행적 정리는 정치블로거 아이엠피터의 정리를 인용, 박물관에 대한 노력은 <박물관 보는 법> 참고)
대학 박물관들은, 해방 이후에도 유물과 작품들을 수집하고 소장, 전시하며 국립박물관의 부족한 부분을 메웠고 연구과 교육을 통해서 박물관의 발전에 기여했기에 1967년 문교부에서는 대학설립기준을 제시하며 종합대학의 대학박물관 설립을 무화한다. 대학박물관을 대학설립의 기준으로 삼았으니, 대학교육의 수준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대학박물관의 폭발적인 증가에 기여하게 된다.
하지만 양적인 증가가 질적인 증가를 담보하는 법은 아니었기에 대학박물관들은 설립 당시 그대로 방치된 채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1982년 대학박물관 설립 의무규정 삭제 이후 1999년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서도 대학박물관은 기본적인 사항을 명시한 선언에 그친 내용은 실제 대학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이 쉽지 않은 일임을 짐작하게 한다.
4. 대학박물관의 현재, 대학의 현재
현재 한국대학박물관협회에 따르면 대학박물관은 110여개에 이르지만 박물관의 소장품의 규모나 수준, 전시기획과 연구, 교육의 수준은 천차만별이고 이들 중에서 박물관으로서의 가치와 역할이 일반관람객들의 주목을 받는 경우는 손에 꼽는다. 이는 포화상태에 이른 대학의 숫자와 대다수가 대학에 가서 고등교육이 일반화된 현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학문연구보다는 취업률이 더욱 중요하고 인문학이 천대를 받는 지경에 이른 대학교육의 붕괴 역시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소장품을 폭넓게 보유하고 상설전만이 아니라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서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전시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한편 연구의 성과를 알리고 다양한 방면의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대학박물관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소장품들의 가치를 우리에게 알리는 공공시설로서 역할을 충실히 하는 동시에 근현대사에서 대학박물관, 대학의 역할을 돌아보게 하는 대학박물관들을 지금의 옅은 존재감 때문에 평가절하 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덧붙이자면, <박물관 보는 법>에서 저자는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동아대학교의 박물관을 추천하고 있다. 대학의 박물관들은 보통 캠퍼스 내에 있고 대학의 역사를 한눈에 돌아볼 수 있는 전시관도 운영하고 있어서 캠퍼스와 함께 그 대학의 분위기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개인적으로는, 이화여자대학교의 박물관의 미술사를 기반으로 하는 전시, 고려대학교의 한국사 기반의 전시, 서울대학교의 고고학자료가 충실한 박물관과 현대미술의 흐름을 짚어내는 미술관 전시, 홍익대학교의 한국현대미술의 압축판과도 같은 미술관 전시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