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을 넘었다. 아스타나를 출발해 모스크바로 향하는 2박 3일의 열차길의 둘째 날. 나를 채근하는 낮고 빠른 러시아어에 눈을 떴을 때 기차는 멈춰 있었다. 새벽 5시에 제복을 입은 이들이 침대칸으로 들어와 여권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그곳이 국경선 인지도 몰랐을 터였다.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 여권을 들여다보다가 급기야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나자 다시 잠을 청하기는커녕 웅크리고 앉고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불안과 막막함 그리고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창밖의 풍경을 손으로 더듬는 것뿐이었다.
그곳은 아주 작은 역이었다. 숲 속의 역사에는 표지판조차 없었다. 철로 옆으로 다 쓰러져가는 집 몇 채가 의지하듯 서로에게 버티어 서서 그곳이 역전임을 알리고 있었다. 새벽이라 그랬는지 외딴곳이라 그랬는지 인적조차 느껴지질 않아 꼭 꿈속에서 마주하고 있는 듯 눈앞에 있는 모든 게 아득하게 보였다. 연필로만 그림을 그렸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따금 다시 스케치북을 펼치면 그날의 풍경은 조금씩 조금씩 흐릿해졌다. 뭉개지고 번진 선이 아득하던 그날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해서 굳이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랬다.
스케치가 희미해지듯 그날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졌지만 아득한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아득한 기분이 되살아나곤 했다. 불안과 막막함 그리고 지루함으로 이어지는 일초가 하루 같던 순간. 그 순간을 견디는 유일한 방법은 은근한 기다림뿐이었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깨닫는다. 또다시 자다 일어나 어리둥절한 채로 낯설고 아득한 풍경과 마주하듯 낯설고 아득한 순간을 맞닥뜨려야 한다면 그때도 역시 은근한 기다림으로 지날 수 있으리라고.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