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무브>, <인섬니악 시티> 책으로 읽는 사랑
1.
5월도 중반이 되었다. 아빠는 선언했다. 엄마를 데려오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엄마를 데리러 가겠노라고. 엄마가 용인의 국가치매전담병원에서 보낸지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지나고 있었다. 코로나는 4차유행단계로 접어든 게 분명했고 아빠는 심지어 겨울에 손목이 부러지고 손가락의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엄마를 기다리기 위해서 체력을 키운다며 한겨울에 뒷산에 산책을 나섰다가 미끄러지며 부러진 손목뼈가 붙긴했지만 신경을 누르는 상태였다.
나도 언니들도 아빠가 엄마를 보는 게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와도 엄마와 함께 보내는 걸 예전보다 더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고도 혹은 엄마 역시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고도.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집에 와야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빠는 우리의 입이나 영상통화를 통해 짧게 엄마를 보는 게 아니라 함께 지내보아야 엄마의 현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엄마와의 마지막을 준비해야할지도 몰랐다.
엄마의 주치의와 상담을 하고 집에 입주해서 엄마를 돌볼 24시간 요양사를 구하고 언니들과 면접을 보았다. 챙겨야할 것들, 침대, 휠체어, 워커 등을 알아보았다. 이미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고 있는 비용은 아마도 달라지지 않으리라. 언니들과 나는 예전에 비하면 담담해졌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은 여전했다. 내 상황을 듣고 상담선생님은 말했다. 엄마는 치매의 가장 마지막 단계로 온 것 같다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조금만 더 버티라고 내가 엄마를 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내 눈을 보며 덧붙였다. 내가 물었다. 어째서 놓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냐고. 나의 자기연민 그리고 엄마에 대한 연민때문에. 나는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2.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고통을 겪어본 이들 그리고 그들 곁에서 함께하는 식구 혹은 그들을 사랑하는 이들은 알 것이다. 고통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동시에 품위있게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럼에도 그러고자, 그 하루하루 속에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을. 아마도 그것이 내가 올리버 색스와 빌 헤이스에게 경이와 위로를 느끼게 된 이유일 것이다. 올리버 색스는 노년에 안암으로 투병하다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자신의 일에 몰두했고 또 변화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경험들을 탐구하고 기록하고 나누고 심지어 즐기며 그의 삶을 최대치로 살았다. 무릎수술, 좌골신경통의 고통속에서도 그는 빌 헤이스와의 관계를 이어간다. 빌 역시 그런 올리버를 있는 그대로 봐주었고 곁에서 지켜주었다.
*
나는 칠십대에 들어서도 훌륭한 건강 상태를 유지했다. 몇 가지 정형외과적 문제는 겪고 있었지만 심각하거나 생명에 위협이 될 것은 없었다. 친형 세 명을 모두 잃고 많은 친구와 동시대인이 세상을 떠났어도 병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던 2005년 12월, 내 인생에 갑자기 암이 등장해 극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냈다. 시야 한 부분이 갑자기 하얘지더니 반맹이 되어버린 오른쪽 눈. 진단은 흑색종이었다. ...흑색종이 워낙 악명 높은 병인지라 진단이 나오는 순간 나는 사형선고로 받아들였다...
방사선요법에 이어서 레이저치료까지 수차례 받았다. 일부 부위가 계속 재발했기 때문이다....그럴 때마다 공포에 사로잡혔다가 안도했다가는 다시 공포에 사로잡히는 감정의 극단을 오갔다.
...
앞을 볼 수 없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죽음이었다. 그래서 흑색종하고 일종의 흥정을 했다. 꼭 그래야겠다면 눈을 가져가라. 하지만 나머지는 남겨다오.
2009년 9월, 항암 치료를 받은 지 3년 반 만에 방사선에 약해진 오른쪽 눈 망막에서 출혈이 일어나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 ...입체시를 잃는다는 것은 열렬한 입체광인 내게는 슬픈 일이었고, 나아가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나는 이 모든 현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내 흑색종 일기는 9만 단어에 이르렀다) 각종 지각 실험을 통해 연구했다....내 경험을 글로 쓰는 것은 그 모든 환자들을 대신해서 쓰는 글이 될 테고. 그럼에도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신나는 생각에 나는 그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었던 듯하다. 그런 들뜬 기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이고, 환자를 진료하고 집필을 이어갈 힘 또한 얻지 못했으리라.
새 책 <마음의 눈>집필에 열중하던 시기에 불운한 사고와 수술이 줄줄이 강타했다. 2009년 9월, 오른쪽 눈에 출혈이 일어난 직후에는 왼쪽 인공 무릎관절 수술을 받아야했다. ...재활운동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움직임과 힘의 폭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달갑지 않은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오랜 세월 싸웠던 좌골신경통이 재발한 것이다. 처음에는 스멀스멀 느리게 진행되더니 한순간에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통증으로 치달았다. 무릎관절 수술 때의 모르핀이 아직 다량 남아 있었지만 척수신경 압박 손상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신경 통증에는 사실상 쓸모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는 것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단 1초도.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
2009. 10 추가한 기록
입원한 O를 찾아갔다. O는 슬프게도, 다년간 들었던 슈퍼헤비급 역도의 후유증으로 무릎관절 전치환술을 받았다. 처음에는 우리 사이를 알지 못하는 한 친구가 병문안을 와 있었던 까닭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 내가 찾아와서 기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3.
빌은 올리버의 나이나 병은 이미 거리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올리버의 일상을 곁에서 함께하며 그가 투병 와중에도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글쓰기를 더욱 잘할 수 있도록 서서 일할 수 있는 책상을 만들어준다. 담담한 문장들 속에서 그 행간을 읽는다. 그것이야말로 올리버가 통증을 잊고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탈출구였음을 느낀다. 그러나 결국은 극심한 통증이 그 모든 것을 중단하고 자살충동을 느끼게 했다고 고백할 만큼 그를 몰고 갔다. 오랜 시간 아픈 이들을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으로 돌보고 응원하며 살아온 그가 자살충동을 느낄 만큼이었다는 그 고통의 강도를 나는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엄마로 인해 지새웠던 수많은 밤들을 떠올리며 그의 고통을 짐작해본다. 마음이 아려온다. 그 와중에 빌은 그의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고 올리버 역시 빌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다. 그의 긴 외로움과 극도의 수줍음을 뛰어넘게 만든 마음을. 두 사람의 마음이 너무 소중해서 나도 모르게 애틋해진다. 그렇다. 나의 연민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엄마에게도, 이들에게도 향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고마워진다. 그들도 엄마도 나도 고통속에서도 총천연색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알기에 나는 내가 흘리는 눈물이 아깝지 않다.
2009.11.11
무릎 수술이 좌골신경통과 디스크 같은 다른 문제들을 악화시켰다. O는 격심한 통증 때문에 앉은 자세로는 글을 쓸 수 없었다. 이러다 척추 수술까지 받아야할 판이었다. 나는 주방 조리대에다 지하실에서 찾은 널빤지 한 장과 책 더미를 이용해 직립용 책상을 만들어주었다. 올리버는 이제 밤새도록 쉬지 않고 새 책 <마음의 눈> 집필에 몰두할 수 있다.
"글 쓰는 것이 통증보다 훨 씬 더 중요한 일이야." 올리버가 말했다.
<인섬니악시티>, 빌 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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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가능해서 전부 서서 했다. ...글쓰기에 집중하는 것이 거의 모르핀만큼 효과가 있을 뿐더러 부작용마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도 싫었고 누워서 지옥같은 통증을 고스란히 느끼는 것도 싫어서 내가 즉흥적으로 설치한 직립용 책상에서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냈다. ...12월에 들어서자 좌골신경통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어 더이상 책을 읽을 수도 생각에 집중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었고, 평생 처음으로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2009년 12월이 되어서야, 무릎과 척추 수술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통증과 씨름하던 와중에, 비로소 (빌리에 대한 감정이) 얼마나 깊은 감정이었는지 깨달았다.
빌리는 가족과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시애틀로 떠나는 길에 잠시 나를 보러 와서는 (빌리 특유의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저는 당신을 향한 깊은 사랑을 잉태했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 아니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숨겨왔던 것을 깨달았다. 나 역시 그를 향한 깊은 사랑을 잉태했음을. 내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빌리는 내게 키스했고, 바로 떠났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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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휴일을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 공항에 가는 길, 작별 인사를 하려고 O의 사무실에 들렀다. 지금까지 몇 주동안 마음속에서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지만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는 무언가를 고백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올리버." 올리버가 눈물을 꾹 참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머리에 입 맞추고 그를 꼭 안고서 다 괜찮을 거라고 그에게 말했다. 시애틀에서 금방 돌아올 거라고. 그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우리는 O의 방에서 나왔다. 두명의 비서 케이트와 헤일리가 일하고 있었다. "이 친구 잘 감시해요." 내가 말했다.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