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 전과 후로 나와 언니들은 여러가지 잡무들을 처리해야 했다. 퇴원수속, 장기요양계약서의 변경, 요양사를 구하고 환자를 위한 침대와 여러가지 도구들을 세팅하고 엄마의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며 정신이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모든 서비스나 제도적 절차는 온라인이나 전화로만 변경이나 신청, 상담이 가능했고 전화는 시시때때로 "고객님이 많아서 응답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몇 시간씩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를 기대하는 나는 초조했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에 세팅이 되어야하는 것들 모두가 하나씩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는데 결국 어느 시점에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엄마의 침대를 들여놓기 위해 정리한 물건들을 수거하는 구에서 지정한 수거업체조차 전화가 매번 통화중이어서 며칠의 기다림끝에야 통화가 되었고 인터넷게시판 문의글도 확인하지 않은 그들에게 소리치고 말았다. "제발요, 폐기물 수거해가시지 않으면 저희 엄마가 집안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울먹이며 엄마는 차에서 내려서도 환자이기때문에 누군가의 부축으로만 집에 들어올 수 있다며 상황을 마저 설명하자 전화를 받은 여직원은 서둘러 처리해주었다. 며칠의 기다림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안도했다. 우습게도 그 사소한 일 하나를 끝낸 것이 엄마가 집에 적응을 할 수 있을까와 같은 근본적인 걱정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큰 사고나 심각한 상황도 막상 닥치면 지난한 일상으로 무뎌진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언니들에게 하소연을 하고 시덥지 않은 농담을 하며 엄마를 맞이했고 며칠이 지났다. 나는 다시 올리버 색스와 빌 헤이스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들은 사랑에 빠졌고 그것을 인정했고 서로가 각자의 인생에 들어와있음을 인정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껴안으려 애썼다. 상대가 아프든 말든, 상대가 나이가 많든 말든, 상대가 까다롭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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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돌아보면 내 인생이 일상의 즐거움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곤 했는데, 이것이 빌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달라졌다. 스무 살에 처음 리처드 셀리그와 사랑에 빠졌고, 스물일곱 살 때는 멜을 만나 애만 태웠고, 서른두 살에 만났던 가를과의 관계는 정체가 불분명했고, 그리고 지금 나는 (맙소사!) 일흔일곱 살이 되었다.
지각변동에 가까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 내 경우에는 평생을 홀로 살아오면서 몸에 밴 습관들, 자기중심적인 생활 태도, 주위를 돌아볼 필요 없이 자기 일에만 몰두하면 되었던 생활, 이 모든 게 바뀌어야 했다. 새로운 관계에는 새로운 욕구, 새로운 두려움도 둥지를 틀게 된다. 상대방에 대한 욕구,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 새로운 관계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적응의 시간이 필요하다.
빌리와 내게는 공통된 관심사와 활동 덕분에 이런 변화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우리 둘 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고, 실은 이것이 우리가 만난 계기이기도 했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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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18.
우리는 <로마의 비가>에서 괴테가 잠든 연인의 등을 6보격 시 가락에 맞추어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장면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의 잠 속 달콤하고 보드라운 숨결을 세는 손끝." O가 기억 속의 구절을 읊었다.
"또는 그의 잠 속." 내가 이어받았다.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
2.
올리버 색스는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 누군가를 자신의 인생에 받아들인다는 것이 '지각변동에 가까운, 근본적 변화가 일어나야 했다'는 간단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 간단한 문장이 얼마나 큰 변화를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상대의 고통과 한계 그리고 예측불가능한 미래까지도 받아들이고 함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있지를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그가 상대를 사랑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실은 나도 그 큰 변화를 다 알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새로운 욕구, 새로운 두려움, 이해와 적응을 할 수 있기를 바랄 뿐. 내가 그럴 수 있는 행운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랄 뿐. 그리고 올리버 색스에게 빌 헤이스가 있었듯 나에게도 그러한 존재가 있기를 바랄 뿐.
2010.2.1.
나른한 일요일, 오후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밤으로, 밤이 아침으로.
"난 그냥 당신 곁이나, 당신 옆에 있는 게 좋아요." O가 말한다.
그는 내 가슴에 귀를 갖다 대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수를 센다.
"예순둘." O가 만족스럽게 미소를 띠며 말하는데, 이보다 더 내밀한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2010.7.10.
식물원에 갔다가 차로 돌아오는 길, 좌석을 있는 대로 뒤로 젖히고 선글라스를 쓴 채 앉아있던 O가 별안간에 말을 시작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잠든 줄 알았다). "당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갑자기 깨달았어. 욕구를 일으키고는 그것을 채워주는 사람, 허기지게 만들어놓고는 그것을 달래주는 사람. 예수 같고 키에르케고르 같고 훈제연어 같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