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단 한 가지뿐.
행복할 것.

<온 더 무브>, <인섬니악 시티> 책으로 읽는 사랑

by 문성 Moon song Kim

1.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여전히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달갑지 않다. 게다가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은, 몸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누운 채로 해야 할 일들을 꼽아보다 나에게 사기를 친 사람이 했던 거짓말들이 떠오른다. 울컥 일어나는 혐오와 분노. 사람들이 -나조차도- 싫어진다. 그대로 어두움 속에 가라앉고 싶지 않아서 나는 죽을힘을 다해 밝은 곳으로 눈을 돌린다. 여전히 따뜻한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내가 믿는 사랑이라는 것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나는 다시금 빌 헤이스와 올리버 색스의 글을 익사 직전의 구명조끼를 움켜쥐듯 붙든다. 한문장 한문장 읽어내려가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미소 짓고 그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2.

빌 헤이스는 십육 년이 넘게 함께 했던 그의 파트너를 잃고 하루하루를 견뎠다. 그는 오랫동안 불면증을 앓았고 하필이면 수면제 반 알을 먹고 잠든 어느 날 밤 곁에 누워있던 그의 파트너 스티브가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

십육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것이 내 인생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잠을, 그래, 아기처럼 자는 남자하고 살았다. 많은 밤, 얼마나 숱한 밤을 문자 그대로 그 잠을 훔치고 싶었는지,...... 하필이면 내가 깊이 잠들었던 날 스티브가 내 옆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런 아이러니가 있을까. 십 년 전 그날 밤 수면제 반 알을 먹지 않았더라면 나는 깨어 있었을 것이고 스티브를 살릴 수 있었을까?

...... 스티브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기간 동안 나는 잠은 모자라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이승과 저승의 문지방에 있는 듯,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스티브와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그 기간은 낯선 사람들-우체국이 되었건 식료품점이 되었건 불쑥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아니면 그저 상냥한 말 몇 마디를 건네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만나는 놀라운 시간이기도 했다. 그때 나는 스티브가 내 앞에 나타나 준 것이라고, 단 한 번의 의심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 나는 여전히 스티브가 늘 지켜보고 있다고 느꼈지만, 죽음과 함께 모든 판단은 뒤로 하고 떠난 것이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동의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다. 어느 쪽에도 표를 던지지 않았다. 스티브가 내게 바라는 것은 한 가지, 단 한 가지뿐이라고 나는 여겼다. 행복할 것.

...... 얼마 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벗어나 런던에서 한 달을 보내기로 했다.... 런던은 아무렇게나 고른 장소가 아니었다. 스티브와 나는 지난번 책 조사 작업 때 두 번 런던을 찾았고, 이 도시와 사랑에 빠졌다. 다시 런던에 가면 기운이 날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런데 너무 순진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하마터면 며칠도 못 있고 그대로 돌아서서 런던을 떠나올 뻔했다. 내가 가져간 단 하나의 짐, 카메라만 아니었다면.

...... 나는 지하철에서, 공원 벤치에서, 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걷는 커플들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랑에 푹 빠진 커플들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의 얼굴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은 한 장 찍어도 되는지 묻지도 못할 만큼 수줍음이 많아서는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에 머금은 미소에 가슴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찍은 것은 그들의 손이나 발이었다. 기도하듯 깍지 낀 그들의 손이나 키스의 전주곡이 될 염무를 추는 그들의 발이었다.

-


3.

나는 빌 헤이스의 글을 읽으며 엄마는 여전히 용인의 치매전문병원에 있음에도, 허우적대며 그와 같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었음을 알았다. 허우적대며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의 아주 작은 친절에도 깊이 감사했음을. 그리고 코로나로 고립된 와중에 온라인에서 만난 낯선 이를 순진하게도 믿었다는 것을. 사기임을 깨닫고 나서는 나 자신에게조차 깊은 환멸을 느끼며 허우적대고 있음을. 다시금 빌 헤이스의 상실감을 가늠해본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을.

빌 헤이스의 문장들 중에서도 저 문장들을 옮겨 적을 수밖에 없었던 건, 나 역시 그렇게 눈물을 흘린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곳이 어디이든 앞에 누가 있든 무슨 일이 벌어지든 신경쓸 겨를조차 없을 정도로 경황이 없는 그런 순간. 지나는 커플들이 주고받는 눈길, 다정한 몸짓들에 가슴이 저려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순간. 질리도록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백발의 노부부가 지는 석양을 등에 이고 애틋하게 손을 잡고 걷는 모습에 무릎이 꺾여버렸던 그런 순간.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지만 다시금 나는 읽어내려간다.


4.

빌은 상실과 애도의 시간을 보내다가 이십오 년 동안 살아온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뉴욕으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나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그 순간들을 충분히 겪었고 새로운 일을 시도했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들로 나의 시간을 채워왔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오랫동안 겪었던 그의 불면의 밤과 같은 불면의 모습 그 자체인 뉴욕에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곳에서 올리버 색스를 만난다. 이미 저자와 독자로, 서신을 교환하고 여행 중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사이는 달라진다.


*

우리는 나라의 양끝에 살고 있었다. 30년이라는 나이 차는 말할 것도 없고. 한 해가 넘게 지나서 뉴욕으로 이사하기로 했던 내 결정은 사실 올리버와 관계가 없었고, 그와의 관계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저 내 이생의 행로에서 샌프란시스코와 그 안에 담긴 모든 추억에서 벗어나 새 출발을 시작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사와 동시에 O와 나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금세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


*

우리 둘 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었고, 실은 이것이 우리가 만난 계기이기도 했다. 빌리의 책 <해부학자>의 교정쇄를 읽고 깊이 감명받아 혹시 동부에 올 일이 있거든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는데, 2008년 9월에 빌리가 뉴욕에 오면서 정말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진중하면서도 밝은 빌리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타인의 감정을 읽고 공감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솔직함과 섬세함이 잘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온 더 무브>, 올리버 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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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지나온 길들을 담백한 문장들을 통해서 그려본다. 그들은 담담히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껴안았고 받아들이려 애썼으며 그 와중에 서로를 만났다. 이미 과거의 일이고 그들의 역사일 뿐임에도 나는 그들의 만남을 글을 읽는 나의 시점에서 축복하고 기뻐한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보았다는 것,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사랑의 행복을 얻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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