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떠난 지 3주가 되었다. 장례식을 마무리하고 모친상 휴가도 마쳤다. 일터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일상이 일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상태가 계속된다. 크리스마스도 연말도 새해 첫날도 내가 맞이하는 순간들이라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시금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새로운 업무가 시작되었으나 나의 일부는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3주가 흘렀고 나는 다시금 올리버 색스와 빌 헤이스를 떠올린다. 엄마의 투병이 악화되면 될수록 내가 거의 유일하게 위안을 얻었던 그들의 글을 되짚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그 죽음에 슬퍼하던 순간, 더불어 그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순간들 속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받아들이던 그들의 모습을.
2011.6.7.
시애틀의 병원에서 O에게 전화했다. 어머니의 임종을 피할 수 없이 가까워진 시점이었다. O가 나보고 꼭 친구들하고 외출해서 웃고 떠들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 가장 오랜 벗이 바로 전화를 걸어왔어. 괘씸하기 짝이 없게도, 아주 음란한 우스갯소리를 연거푸 세 개나 말해주는 거야. 천장이 무너져라 웃고 나니까 비로소 눈물이 나오더라고."
나는 그의 조언을 따랐다.
2012.10.30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한 다음 날. 전날 밤의 정전이 해제되지 않았다. … 어느 날 밤, 나는 올리버에게 전화해서 아파트 옥상에서 만나자고 말했다. 나는 소박한 저녁상을 마련했다. 통닭구이, 좋은 빵, 올리브, 체리, 포도주를 준비했다. 포도주 잔을 잊고 안 가져와서 돌아가며 병나발을 불었다. 여름이었다. 태양이 허드슨 강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웃들도 옆에서 식탁을 차려놓고 즐거운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쾌적한 바람이 불어왔다. 우리를 에워싼 도시 풍광이 어떤 뮤지컬의 무대 배경처럼 보였다. … 그릇을 챙겨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올리버가 했던 말이 그 순간을 적절하게 묘사했다. “내가 죽지 않은 것이 기쁘다.” 이 말을 꽤 큰 소리로 했는데, 그의 귀가 잘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스스로 말해놓고도 놀란 표정이었다. …”선생님이 죽지 않은 것이 저도 기뻐요.” 한 이웃이 올리버의 말을 받아 쾌활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가 죽지 않은 것이 기뻐요.” 하고 또 다른 이웃이 말했다. 옥상 위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저마다 잔을 들어 올렸다. 지는 해를 위하여 건배, 우리를 위하여 건배.
… 살아있어서 기쁘다느니 인생은 짧다느니 하는 말은 너무 흔한 말이지만, 죽지 않은 것이 기쁘다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노령 또는 어떤 사무치는 경험 없이는 체득하지 못할, 상실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 그 절대성을 느껴봤어야 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죽는 방법은 다양하다-평화롭게, 폭력적으로, 갑자기, 천천히, 행복하게, 불행하게 또는 너무 이른.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죽었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살아있음은 그렇지 않아서 그 정도와 범위가 아주 다양하다. 뇌와 혈액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고 심장박동이 규칙적으로 뛴다 한들, 가는 세월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반쯤 잠든 채로 살아간다면, 온전히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태는 얼마든 회복이 가능하다. 비범한 것을 놓치지 않고 잠시 멈추는 법을 배운다면, 일상의 순간들을 기억하는 법을 배운다면, 온전한 삶은 회복할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여름밤의 옥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날 이후로 내가 사귄 사람 또 잃은 사람이 몇 명이었는지 생각한다. 어머니, 세 친구, 두 이웃, 그리고 내게는 두 번째 어머니나 다름없던 나의 에이전트 웬디. 웬디의 많은 친구들과 친척이 지난주 어느 오후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름답고 환희 가득한 의식이었다. 나는 아일랜드 사람답게, 하루 종일 울었다. 뭐, 어쩌겠나. 좋은 울음은 영혼의 세차 같은 것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인섬니악 시티>, 빌 헤이스
2.
여전히 툭하면 눈물이 흐른다. 지하철 속에 흔들리다가, 길을 걷다가, 물을 마시다가 문득. 눈물이 고이고 두둑 눈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새어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통곡하기도 한다. 여전히 눈물이 많은 나를 보며 엄마는 어떻게 생각할까. 눈물이 많았던 엄마를 닮았다고 할까. 뭐 , 어쩌겠나. 아마도 내 눈물은 충분히 흘릴 만큼 흘리고 나면 멈출 것이다. 나도 빌 헤이스처럼 울음은 영혼의 세차 같은 것이라고 여기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