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주일상실험: 미니멀리스트게임 day21-30
1. 추억 다루기
21일째, 처음 시작했던 거실 수납장부터 다시 정리를 시작했다.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들여다보며 필요와 선호, 취향을 생각하며 정리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정리가 조금 더 쉬워졌다. 마음도 함께 정리가 된 걸까. 이전에는 손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실수납장의 사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던 카세트테이프와 CD, LP를 꺼내어 하나씩 열어보고 나눔 할 것, 기부할 것, 분리수거할 것들을 분류하는 것이 그 출발이었다. 유년시절과 10대, 20대를 함께 지나온 추억을 간직하고픈 욕심에 그대로 쟁여두었던 것들에 먼지를 털고 정말로 좋아하는 것들 그리고 추억이 담겨있는 것들만 남겼다. 내친김에 고장 난 카세트플레이어도 세운상가의 수리수리협동조합에 맡겼다. 카세트도 CD도 LP도 원래의 용도에 맞게 자주 열어보고 듣기로 마음먹었다.
이어서 고등학교 때부터 모아 온 일기장과 편지들도 정리했다. 오랜 시간 모아두었지만 다시 열어보거나 읽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열어서 하나씩 확인해 보고 더는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스케줄러와 쪽지들을 분리수거했다. 그 물건들이 나의 지난 시절 같아서 그리고 그 시절의 나, 나와 함께한 사람들의 마음 같아서 그것들을 다루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찬찬히 들여다보고 정리하며 너무 치열했어서 소중하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떠올리며 지금 이 순간들에 감사해졌다.
2. 가능성 다루기
자연스럽게 글자들, 인쇄물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모아둔 설명서들, 안내서들, 여행을 다니며 모았던 손지도들, 문화예술과 관련된 안내 책자들, 행사나 전시에서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들고 와 모아두었던 리플릿이며 자료들, 그 모든 것들을 하나씩 다시 찬찬히 훑어보고 분류했다.
때론 호기심이었고 때론 흥미로운 관심사였고 때로는 아이디어를 위한 재료들이었다. 이것들을 계속해서 갖고 있었던 건 그리고 자꾸만 늘려나간 건 가능성을 놓지 않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활동,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아이디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작업, 조금이라도 더 넓고 깊은 통찰이 가능하길 바라는 나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걸 확인하고 나자 일상에 필요한 것들이나 이후에도 실제로 자료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미련 없이 종이분리수거로 넘길 수 있었다. 미술도구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스텔도, 동양화붓도, 삽화용 잉크도, 너덜너덜한 붓들도.
정말로 무언가를 원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모아둔 무엇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고 노력을 들여서 실행하고 또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며 움직여야만 해. 그래야 가능성이 가능성에서 끝나지 않을 거야. 남겨둔 최소한의 것을 그냥 그 자리에 두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고 또 쓰임이 다하면 정리하는 과정을 습관화할 때야. 나는 계속해서 정리를 해나가며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었다. 줄어드는 물건들과 여유가 생긴 책장을 보면서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느꼈다.
3. 걱정 다루기
다시 한번 옷장에서도 옷을 솎아냈다. 아직 입을만한 옷들이고 실제로 입었을 때에도 보았을 때에는 문제가 없는 옷들. 하지만 실제로 입고 움직였을 때 움직임이 불편하거나 길이가 너무 짧아서 혹은 너무 얇아서 신경이 쓰이는 옷들,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선물 받은 옷이라 계속해서 갖고 있었던 그래서 볼 때마다 활용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한 번씩 입고 나섰지만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던 옷들을 정리했다. 더불어 계속해서 갖고 있던 여분의 옷걸이들. 여분의 일회용 마스크들. 여분의 일회용 물품들, 여분의 일회용 화장품들도 함께 정했다. 정확히 30일째 되던 날까지 집안 전체를 한 번 더 훑은 셈이었다.
마지막 삼사일에 정리한 것들은 그래도 몰라, 혹시나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갖고 있던 여분의 것들이었다. 다른 옷들과 비교하면 언제나 차선으로 밀리는 옷들임에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들. 오래전부터 쓰지 않았음에도 필요할 때가 있을지 몰라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회용품들. 그 물건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혹은 일어난다 해도 문제가 되지 않을 일에 대한 대비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나 다름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고민할 여지도 없었다. 나는 박스를 구해 당근 나눔이나 분리수거를 해서 정리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물건들을 담았다. 그 물건들을 아마도 앞으로도 예비용으로 가지고 있을 나보다는 실제로 곧바로 유용하게 쓸 이들에게 보내주기로 했다.
미니멀리스트게임 30일을 마치고 나자 4개의 종이상자가 꽉 찼다. 구세군희망나누미에 기증신청을 하고 친절한 담당자와의 통화로 세액공제절차도 마쳤다. 며칠이 지나고 역시나 통화로 날짜를 예약해 택배수거로 박스까지 보내고 나자 그제야 게임이 정말로 끝난 듯했다.
그러고 나서도 굳이 브런치에 다시 10일씩 모아서 돌아보는 까닭은 이미 앞서 이야기한 대로 정리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쌓여있는 물건들은 사실은 내 선택들의 결과이자 과거부터 이어져온 현재의 내 모습임을. 물건을 선택하고 사용하고 보관하는 것은 그 물건과 연관된 생활을 관리하는 것임을. 물건들 속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도 연결되어 있음을.
미니멀리스트게임을 하는 동안 경험했던 순간들을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건을 통해서 나를 새롭게 보는 신선한 경험. 몰랐던 나의 선호와 취향을 알게 되고 차마 직면하지 못했던 감정들까지. 물건과의 관계가 이전보다 더 나아지기를 그러니까 물건을 통한 나 자신과의 대화가 좀 더 편안하고 즐거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