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하지 않고 모셔두기만 했던 물건들 정리가 끝나자 매일 게임의 난이도가 제곱으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거실수납함과 주방 상부장과 하부장, 다용도서랍장의 물건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만큼 정리하기가 쉬웠지만 그다음부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막막했다.
사용하던 것들,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쉽사리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마주하고 그것들 중에서도 어떤 것을 남기고 어떤 것을 나누어주고 어떤 것을 폐기할지 분류의 기준을 정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나는 이대로 그만두고 싶은 건가. 아니 정리하고 조금 더 가볍게 살고 싶은 건 분명한데. 혼자 자문자답하며 새삼 익숙한 것을 유지하려고 하는 습관이 변화를 바라는 마음과 부딪힐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렇다. 미니멀리스트게임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과정이자 자문자답으로 회고와 성찰을 연속하는 과정인 셈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자 왜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인지, 계속해서 도전하는 기분이 드는지 납득이 갔다.
2. 20일, 작은 집 전체를 훑다
더는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이 과정을 차분히 지속해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매일 더해지는 날짜만큼의 개수만 정리하면 된다는 게임의 룰이 고민을 질질 끌지 않고 기준을 정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지나치게 혹은 한꺼번에 치워버리거나 놓아버리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수납함에서 눈을 돌려 공간별로 그리고 사용하는 품목별로 계속해서 정리를 이어나갔다. 매일 아침 날짜를 확인하고 날짜만큼 정리할 물건을 고르고 한데 모아 사진으로 기록을 남겨두었다. 11일째, 12일째, …20일째가 되자 책장, 화장대 겸 수납장, 미니드레스룸(행거와 서랍함), 침대 및 수납공간까지 나의 작은 집 전체를(!) 훑을 수 있었다.
10 평남짓의 작은 집을 20일 동안 정리한다는 게 오래 걸린 건지 짧게 걸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물건들을 통해서 내 일상과 삶의 방식을 바라본다는 건 예상치 못했던 신선한 경험이었다. 감각하지 못하고 매일을 살다가 줌아웃으로 몇 걸음 물러나서 나와 나의 일상을 다른 이들의 일상을 보듯 제삼자의 눈으로 지켜보는 듯했다. 품목별로 정리할 것들을 선택하면서도 느꼈지만 매일 남겨둔 사진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니 더더욱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이 많고 또 어떤 것에는 관심이 없는지, 어떤 것은 집착하고 또 어떤 것에서 망설이고 부담을 느끼는지, 어떤 걸 어려워하는지 확연히 드러났다.
3. 취향과 선호의 확인
1) 책, 쌓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으로
무엇보다 내가 가장 집착하고 또 정리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역시나 책과 서류파일, 노트와 아이디어메모들이었다. 분야별로 정리해 둔 책장과 지금까지 공부했던 내용들, 일하며 모아둔 자료들은 제각기 그 나름대로 모아둔 까닭이 있었기에 책장에 테트리스하듯이 채우고 또 쌓아두고도 그것들을 정리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질문들 - 미니멀리스트들의 책에서 참고한 정리가이드가 되는 질문들- 세월과 추억이 담긴 책들과 자료들에서 더는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골라냈다. 그래도 다시 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여전히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지 않을까, 속삭이며 나를 붙잡는 망설임을 뒤로하고 오랫동안 읽지 않은 것, 분명히 더는 펼쳐보지 않을 것, 참고용 혹은 정보나열이나 소개용 책들이라 최신판을 보아야 하는 것들, 선물 받았고 읽었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것들. 하나씩 정리해나가다 보니 망설여지는 것들이 있었다. 결국 15권을 기부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며 시간을 두고 정리해 나갈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더불어 좀 더 자주 책장을 들여다보고 책을 뒤적이고 읽고 다 읽은 책 중에서 더는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책들은 정리하는 흐름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내 책장이 책들이 최종적으로 모여들어 붙박인 장식품이 되는 곳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일으키고 저자들과 대화하듯 생각을 이어나가고 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역동적인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도. 나는 책장을 공간정리하는 이들이나 인테리어, 건축을 하는 이들의 조언처럼 적어도 20%의 여백을 만들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과 함께, 아이디어메모지와 노트, 드로잉으로 생각을 전개할 수 있는 도구들도 책장 한편에 더해두었다.
2) 옷, 걸어놓는 것이 아니라 입는 것으로
다음으로 정리하기가 어려웠던 것은 옷들이었다. 겨울이 시작되며 겨울옷더미로 동굴이 되었던 미니드레스룸(이라고 쓰고 행거와 가벽으로 만든 작은 공간이라고 읽어야 하는 무엇)은 일차적으로 정리해 두었지만 여전히 빽빽했다. 미니멀한 옷장 만들기 일 년짜리 약속을 결심한 것도 정리하면서도 옷을 줄이는 것에 저항감을 느끼고 심지어 억울해하는 나 자신을 느껴서, 다시 말하면 정리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스스로와 약속을 하며 정한 세부적인 기준들이 고민과 망설임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 입었을 때 불편한 옷이거나 활용도가 떨어져 손이 가지 않는 옷들을 섬세하게 검토하며 추가로 추려냈다. 예를 들면, 입었을 때 불편하거나 걸리는 것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이 마음에 꼭 들지 않거나 선물 받아서 입고 있긴 하지만 어쩐지 손이 가지 않는 옷, 비슷한 스타일의 옷이 두 개 이상 있고 그중에서 활용도가 떨어져서 손이 잘 가지 않는 옷, 너무 무겁거나 소매가 짧아서 혹은 앞섶이 깊게 파져 있다거나 계절아이템으로서 역할이 부족해서 역시 손이 가지 않는 옷, 공식적인 자리나 격식이 있는 자리에 적합한 옷이지만 다른 아이템들에 비해서 다양하게 믹스매치할 수 없어서 맘먹지 않으면 거의 입지 않는 옷들. 그리고 낡거나 닳은 - 주로 속옷과 양말과 같이 자주 입고 빠는- 옷들.
두 번째 정리를 하면서 옷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던 건 다양성과 변화의 가능성을 줄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았다. 만족스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입어보면 나쁘진 않잖아 반문하고 실제로 입지 않음에도 입더라도 새로운 아이디어로 믹스매치한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이유를 찾는 내가 있었다. 다시금 차분히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 자신을 설득하고 정리에 힘을 더하는데 그간 읽어온 책들과 적어온 글들이 도움이 되었다. 나는 늘 나를 최선으로 보여주는 혹은 적어도 그날의 컨디션을 북돋아주는 옷을 입고 또 그 옷이 다른 이들에게도 나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길 바라고 있었다. 그것이 나를 표현하는 또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그러니까 내 개성이 묻어나는 하나의 표현수단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 옷이 주는 컬러와 질감, 다양한 묘미들을 즐기며 다양하게 매치하는 것으로 하루하루에 재미와 신선함을 더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옷이 많아봤자 어차피 그 옷들을 입을 수 있는 몸뚱이는 하나이고 옷을 입고 보내는 시공간 역시 한정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지금 행거에 걸려있는 겨울옷들을 그대로 두었다면 갖고 있는 상의와 하의, 외투의 조합만으로도 겨울-아무리 겨울이 길어졌다고 해봤자 11월 말 경부터 2월 말 경까지 세 달 남짓한 기간- 을 지내는 것을 넘어 일 년 내내 다른 옷차림이 가능할 지경이었다. 한층 여유가 생긴 드레스룸에서 또 조금씩 좋아하지 않는 옷들을 정리해 나가서 역시 20% 정도의 여유를 두는 것으로 그래서 결국은 그냥 걸어두는 옷 없이 즐겨 입는 옷들만으로도 채우기로 한번 더 마음을 먹었다.
3) 용도에 맞게, 필요하고 좋아하는 것들만
책에 이어 옷장까지 고심하며 정리하고 넘어가자 다른 품목들을 정리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어서 스카프나 벨트, 가방을 비롯해 귀걸이나 반지, 팔찌, 목걸이 같은 액세서리까지는 옷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었다. 옷과 같은 기준으로 실용성과 표현수단으로써 활용도가 떨어지거나 어울리지 않는 것들, 만족스럽지 않지만 갖고 있었던 것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도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나눔 할 것들 낡아서 버릴 것들을 정리하다가 주얼리나 가방이나 신발을 애지중지하고 모으던 지인들을 떠올라 새삼 내가 주얼리나 가방, 신발에는 관심이 없지만 유독 옷에는 애착이 심하다는 것을 한번 더 깨달았다. 나의 선호를 더 분명히 알고 나자 옷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좋아하는 것들로만 콤팩트하게 정리하는 것이 홀가분하고 신나기까지 했다.
화장대. 평상침대 아래 수납장. 욕실수납장. 주방의 상부장과 하부장. 신발장과 현관계단 아래 수납함. 오래도록 남겨두었던 그러나 쓰지 않았던 물건들. 혹시나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싶었던 그러나 실제론 한 번도 나를 위해 쓸 것이라고 염두에 두지 않았던 물건들을 정리했다. 사진을 찍어 당근에 올려 저렴한 가격에 판매를 하기도 하고 나눔으로 필요했던 이들에게 곧바로 건네주기도 했다. 더는 쓸 수 없는 것들은 플라스틱과 종이, 고철과 나머지를 분리수거로 마무리 짓고 나자 집은 조금 더 깔끔해졌고 나는 집에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상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