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가 남긴 구옥을 리모델링하다
일상실험연구실
생활을 하나의 실험처럼 다루며, 일상의 선택과 반복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주거, 소비, 돌봄, 상실 이후의 삶을 살아가며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나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주거, 소비, 돌봄, 상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과 경험을 나누고자 하는 시도이다.
1. 아침 햇살, 커튼의 필요
커튼을 가장 먼저 단 곳은 침실이었다. 4월이 거의 다 지날 무렵이었으니, 이사를 하고도 세 달은 커튼 없이 지낸 셈이었다. 이사 첫날, 고단한 몸을 침대에 뉘었을 때, 창밖에 달이 보였다. 어둠 속에 달의 은은한 광채가 번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햇살 속에 눈을 뜨며,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는 것을 몸으로 감각하는 아침이 신선했다. 햇살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돌이켜보면 집안에 어린 빛을 인식하고 그 아름다움을 이렇게 음미했던 적이 있었나 기억나질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벽면을 가구로 채웠고 창문이 있는 벽도 예외는 없었다. 늘 물건으로 가득 차 햇살도 창문도 먼 배경처럼 여겨졌을 뿐이었다.
해가 뜨고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가 다시 물러가는 것을 매일같이 목도하며 자연스레 시간의 흐름이 몸에 배는 게 좋았다. 어둠이 내려앉고 나면,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게 신경이 쓰여서기도 했지만 어둠 자체가 좋아서 최소한의 조명을 낮은 조도로 켰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분명 모두가 태양이 뜨고 지는 속도에 맞추어 활동하고 어둠 속에 깊은 잠에 들었으리라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로 시간의 리듬에 맞춰 지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겨울을 보내고 봄을 지나며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침은 날이 갈수록 빨라졌고 덩달아 햇살은 거세졌다. 피곤을 느끼면서도 감은 눈을 아프게 찔러대는 햇살에 비명을 지르듯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어느 날, 커튼을 달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아프게 내리꽂는 햇살을 가릴 무언가를 달지 않으면 매일매일이 고통이 될 터였다.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태양의 위력을 경험하며 자연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 그리고 조금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얼마나 쉽게 고통을 느끼는 하찮은 존재인가 실감했다.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덜어줄 수 있도록 시폰 그리고 암막커튼을 주문해 이중으로 달았다. 화이트와 우드조합에 최소한의 가구만 있는 단출한 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도록 녹색으로 주문서를 넣고 마침내 커튼이 도착했을 때, 전동드릴로 커튼레일을 다는 것쯤은 이젠 일도 아니었다. 커튼을 닫고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줄어드는 걸 보며 우습지만 처음 커튼의 용도를 깨달은 원시인처럼 집을 짓고 창문을 내고 커튼을 발명한 역사 속 인물들을 그려보며 감사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한참 동안 나머지 창들은 그대로 두었다.
2. 여름의 문턱, 암막의 절실함
나머지 창에 커튼을 단 것은 한 달도 더 지난 어느 날이었다. 봄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낮기온이 삼십 도를 오르내리던 며칠을 지낸 아침, 각 방 창의 치수를 쟀다. 잠에서 깨서 막 거실에 섰을 뿐인데, 이미 이른 아침부터 쏟아져 들어온 햇살에 달궈진 열기로 숨이 막혔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얼마나 더 높이 기온이 치솟을지 또 얼마나 오랫동안 열대야를 이어갈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여름이면 늘 밤늦도록 더위 속에 힘들어하던 엄마와 아빠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창이 많은 2층 주택 우리 집은 주변에 높은 건물이 없는 골목이었기에 낮동안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를 고스란히 흡수했다가 밤새도록 뿜어내며 찜통이 되곤 했다. 밤늦도록 에어컨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다 지쳐 잠든 아빠의 이부자리 곁에는 늘 돌아가던 선풍기. 여름은 옆 사람을 미워하게 만든다던 신영복 선생님 책의 글귀가 떠올라 괜히 슬퍼졌다.
벌집형 블라인드, 암막커튼, 이중커튼, 부자재까지 비용을 계산하고 예산을 가늠해 보다가 결국 이중커튼은 포기했지만 두꺼운 암막 장커튼으로 주문했다. 침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목창이었기에 여름의 더위도 겨울의 추위도 조금이나마 덜려면 열기를 물리적으로 막아줄 암막은 포기할 수 없었다. 알루미늄새시와 목창, 암막 커튼이 차례로 공기로 단열층을 만들어 열기를 그리고 추위를 덜어주기를 바라며.
주문한 커튼이 도착한 주말, 일정을 비우고 창문마다 커튼을 달았다. 따가운 햇살 속에 땀을 흘리며 브래킷과 커튼봉을 고정하고 커튼까지 걸고 내려와 커튼을 쳤다. 닫히는 커튼과 함께 빛이 줄어들면 열기는 더 이상 커튼을 넘지 못했다. 선반과 의자 그리고 바닥에 드리워진 그늘은 열기를 금세 가라앉혔다. 손등에 내리 꽂히던 햇살이 서늘한 그늘로 바뀌는 걸 피부로 느끼며 커튼이 필요를 너머 절실한 무엇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날부터 여름이 지나는 내내 커튼을 여닫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을이 오고도 다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도 마찬가지였다.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열며 햇살을 맞이하고 창문을 열어 서늘한 공기를 마주하는 일은 이제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해가 물러난 저녁 커튼을 치는 것도 역시 하루를 마무리하는 습관이 되었다. 이제 커튼을 여닫고 창문을 여닫는 일은 새로운 하루를 감사히 맞이하고 또 살아낸 하루를 감사히 보내는 의식이 되었다.
3. 몰입의 요건, 블라인드의 도움
두 군데에 커튼 대신 블라인드를 달았다. 특히 작업을 주로 하게 될 책장 옆 창가에는 조금 비싸도 탑다운 바텀업 블라인드를 달았다. 유일하게 건너편 집들 계단과 현관이 보이는 위치라 시선을 차단하면서도 햇살을 받고 또 빛의 양을 조절하거나 블라인드를 중간에만 치고 위아래로 환기를 시킬 수도 있었다. 여기에 벌집모양 허니콤구조로 골라 공기층을 품은 단열효과를 더해주었다. 밤이 되고 불을 켜두면 밖에서 안이 훤히 보여 신경이 쓰이던 시선까지 차단해 줘 이제는 밖에 보아도 은은한 빛만 번져 나올 뿐이었다. 엄마아빠의 유품들 그리고 언니들이 남겨둔 물건들을 모아둔 옥탑방에도 블라인드를 달아 강렬한 햇살을 막았다. 방의 치솟는 열기를 순환시키고 습기가 고이지 않도록 블라인드를 사선으로 쳐두고 창을 살짝 열어두었다.
하지만 한 군데, 책장 바로 위 창문은 커튼도 블라인드도 달지 않고 오래도록 그대로 놔두었다. 책상에 앉았을 때 옆에 위치한 창문으로 앉았을 때 곁으로 살짝 눈만 돌리면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무렵 바로 옆집의 오래된 벽돌주택 2층이 그리고 늘 닫혀있는 갈색 알루미늄새시도 눈에 들어왔다. 옆집에는 우리 엄마아빠가 그랬듯 집주인 노부부 두 분이 살고 계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창문을 통해서 그들의 일상을 알아차리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시야에 걸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따금 옥상에서는 우리 아빠가 그랬듯 화분에 텃밭을 가꾸는 할아버지의 느릿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여름이 시작되자 알루미늄창이 늘 열린 채로 오래되어 어두워진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되도록 시선을 두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언뜻 보이는 집안 풍경은 유품을 정리하기 직전 엄마아빠집의 모습처럼 잡동사니가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녁이 채 밤이 되기도 전에 불이 꺼져 두 분이 일찍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신다는 걸 짐작케 했다. 두 분은 우리 엄마아빠가 그랬듯 창밖을 보지도 않으셨고 둘러싸인 물건에만 집중하시는 것 같았다. 계절이 지나며 일 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창가에서 단 한 번도 서로를 마주하거나 눈이 마주친 적조차 없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아도 그분들의 창문에서는 우리 집 창안 쪽 책장과 책상이 보일 터였지만 그다지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내가 창문 옆에서 하는 일이라곤 책상에 앉아 작업하는 것 아니면 오가는 것뿐이었기에 그분들이 나를 보신다 한들 걱정될 것도 없었다. 그분들도 나도 서로가 생활해 나가는 풍경을 곁에 그대로 둔 채 여름과 가을 그리고 겨울을 맞았다. 어쩌면 나는 곁에서 다른 이들의 삶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해가 되고 소한과 대한을 넘기고도 한파가 계속되는 요즘 드디어 남겨두었던 창문에 달 블라인드를 주문했다. 조금이라도 추위를 덜고 겨울이 지나면 또 언제 추웠냐는 듯 시작될 강렬한 햇살과 열기를 조금이라도 덜기로 마음먹었다. 아마도 블라인드를 걷으며 책상에 앉아 작업을 시작할 마음을 다지고 또 어둠 속에 블라인드를 내리며 작업을 마무리할 것이다. 온전히 몰입하고 또 몰입에서 빠져나오는 나만의 의식을 만들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