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을 설계하다

2025 문화예술프로그램기획: 남양주어린이비전센터 플리마켓프로그램

by 문성 Moon song Kim

기획과 실행의 현장 기록

문화예술 프로젝트의 기획·실행·조정 과정을 현장 기록으로 남긴다. 문화예술 실천이 어떻게 판단과 지식을 만들어내는지, 아이디어가 현실과 만나 기획이 되고 실행이 되는 과정을 따라가며 그 속에서 얻은 것을 기록한다.



0. 공백에서 시작된 프로그램

2025년 두 번째 문화예술프로그램 기획도 남양주어린이비전센터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어린이날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가을 프로그램도 기획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플리마켓을 하려고 한다”는 요청이었다. 어린이비전센터 개관 10주년 행사라는 맥락은 있었지만, 플리마켓 외에는 구체적인 콘텐츠가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는, 완성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공백이 주어진 셈이었다. 아이디어의 부재는 막막함이라기보다 가능성의 공간에 가까웠다. 제약 조건은 방향 설정의 자유로 전환될 수 있었고, 기획의 출발점은 오히려 그 지점에서 분명해졌다.


1. 주어진 조건 속에 확장되는 기획

명확한 콘셉트나 완성된 프로그램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플리마켓 제한된 조건 속에서 어떤 식으로 풀어가도 좋다는 비교적 열린 요청으로 출발했다는 조건은, 기획의 범위를 좁히는 동시에 방향을 설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당연히 공백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기획의 첫 판단이 되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플리마켓은 소비 중심의 행사로 머물 수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경험이 발생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단순한 소비 행사를 문화예술적 경험의 장으로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이번 작업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플리마켓이라는 형식은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그 형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경험으로 확장할 것인지는 기획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제약 조건은 기획을 제한하기보다 오히려 질문을 만들어내는 출발점이 된 셈이었다.


2. 핵심 질문: 어떻게 순환을 경험으로 바꿀 것인가

나는 플리마켓을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경험을 넘어 환경을 고려하는 실천이라는 본질을 경험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로 마음먹었다. 플리마켓을 물건의 교환이 아니라 관계와 가치의 순환 경험으로 확장하는 장으로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어린이날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잠시 모여 함께 활동하고 교류한 뒤 다시 흩어지던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이날 프로그램에서 이미 목도했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그 순간을 더 자주, 더 활발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강화하고자 했다. 그 짧은 교류의 순간을 더 의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다면, 행사의 성격 자체가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을 넘어 머물고 관계를 경험하는 장으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플리마켓의 취지는 자연스럽게 순환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었다. 재사용과 교환, 나눔과 관계, 지속가능한 생활의 감각. 지속가능성은 설명으로 이해되기보다 경험을 통해 체득되는 감각이었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뿐 아니라 예술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두이고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조건과 연결된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플리마켓을 중심으로 문화예술프로그램을 더하며 모든 프로그램에서 친환경적인 주제와 내용, 방법을 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이 플리마켓과 더불어 놀이와 예술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속가능한 생활의 감각을 경험하고 다음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시 말하면, 놀이와 예술 활동 속에서 순환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프로그램의 방향이 되었다. 순환이라는 개념을 놀이와 예술의 경험으로 체득할 수 있다면 이 행사는 하루의 이벤트를 넘어 그들의 문화예술의 향유에도 생활에도 삶에도 도움이 되는 확장적 감각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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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취사선택: 구성의 확장, 프로그램 생태계 만들기

기획 의도가 구체화되면서 프로그램 구성도 점차 확장되었다. 보호자와 아이가 동반하여 참여하는 무용 기반 움직임 프로그램, 자연물 놀이, 천연염색 체험, 재활용 플라스틱 만들기 활동, 풍경종 만들기 등 워크숍이 구성되었고, 센터에서는 더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가해 보자는 제안이 이어졌다. 오가며 누구나 모여서 참여할 수 있는 광장 분필아트와 폴라로이드 사진 촬영, 인형극 공연, 공독서가 책방, 지역 보육사업 부스, 먹거리 부스 등이 더해져 예상보다 훨씬 풍성하고 북적이는 구조가 되었다.

특히 집중했던 것은 순수예술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이었다. 재미있고 친근한 방식으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프로그램 설계 방법을 고민했고, 이러한 방향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예술강사들을 섭외했다. 프로그램의 주제와 소재, 도구와 진행 방식은 강사들과의 대화를 통해 조율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시각적 분위기 역시 기획의 일부로 다루었다. 디자이너에게 요청해 손으로 그린 듯한 질감이 살아 있는, 따뜻한 인상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했고, 행사 전반의 홍보물과 안내물에 적용했다. 매끈하고 상업적인 이미지 대신 사람의 손맛이 느껴지는 시각 언어를 선택한 것은 의도적인 판단이었다. 이는 점점 공동체적 접점이 약해져 가는 아파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남양주의 아이들에게 이번 행사가 조금 더 따뜻한 공동체적 공간의 경험으로 감각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내용뿐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와 시각 언어까지 포함해 하나의 장면을 설계하고자 했다.

저녁에는 사계절썰매장에서 가족들이 돗자리를 펴고 음식을 나누며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가족영화상영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캠핑을 나온 듯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낮 동안의 활동이 관계를 만드는 경험이었다면, 저녁의 영화 상영은 함께 머무르는 경험을 완성하는 장면이 되기를 기대했다.

플리마켓 중심의 구조가 하나의 프로그램 생태계로 확장된 셈이었다.

기획을 상상하고 펼치는 과정은 설레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쉽지 않은 작업이기도 했다. 협업과 조율의 과정에서 요구는 계속 늘어났고, 그에 따라 준비해야 할 일도 많아졌다. 각각의 프로그램이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다양한 장면이 형성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 인원, 대상 연령, 아이들의 발달 단계, 보호자의 참여 방식을 고려해 배치해야 했다. 프로그램 간 간섭이나 불편이 발생하지 않도록 공간과 시간을 조정하는 일 역시 중요한 과제였다.

모두가 예약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예약 없이도 참여할 수 있는 열린 프로그램을 충분히 마련하는 것도 중요했다. 야외 분필그림 활동과 인형극 공연,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은 그러한 배려 속에서 구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좀 더 많은 이들이 각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즐기는 것뿐만 아니라 센터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약 프로그램과 자율 참여 프로그램을 시간대별로 병렬 구조로 배치하고 운영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프로그램의 규모는 어린이날 행사보다 두 배 가까이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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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현과정: 기획과 현장 사이, 예기치 못한 변수들

사전 준비와 협의를 마치고, 스태프들에게도 프로그램의 방향과 현장 응대 방식을 공유하며 충분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늘 그렇듯 실제 현장은 언제나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였다.

가장 큰 돌발변수는 타 행사 일정과 날씨였다. 추석연휴로 하필이면 그날 많은 지역 행사들과 일정이 겹쳤고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 당일에는 비 예보까지 이어지며 예약 프로그램의 참여 인원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았고, 실제로 당일아침 뚝 떨어진 기온에 비까지 흩뿌렸다. 걱정 속에서 시작된 일정이었지만, 다행히 오전 중에 날이 개었고 플리마켓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야외 공개 프로그램에는 활발한 참여가 이어졌고, 예약하지 않았던 방문객들도 프로그램 안내를 받고 참여를 추가하며 현장의 흐름을 만들어가는 일이 이어졌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따뜻했다. 스태프들이 기록한 사진 속에서, 그리고 현장을 오가며 직접 마주한 보호자와 아이들의 밝은 표정과 웃음을 확인하며 그제야 안도와 기쁨을 느꼈다. 특히 저녁 무렵 사계절썰매장에서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영화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며, 플리마켓이라는 소비의 형식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 이제 가족과 지역주민들과 함께 머무르는 경험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환의 장은 관계 형성의 장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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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운영 회고: 전달과 경험 사이

이번 작업은 프로그램 기획과 운영 측면에서 방법론 축적의 기회이기도 했다. 참여 동선을 한층 정교하게 설계했고, 예약형 프로그램과 자율형 프로그램을 병렬로 운영하는 전략도 구체화되었다. 발달 단계와 보호자 참여를 고려한 프로그램 배치 방식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무엇보다 개별 프로그램이 아니라 장면을 설계한다는 접근이 더욱 분명해졌다. 예술을 생활의 의제로 번역하는 구조를 실제 행사 안에서 실험해 보며, 순수예술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식에 대한 참여자들의 반응과 운영에서의 변수들도 검토하게 되었다. 강사와의 사전 협업 구조와 현장 대응 방식 역시 어린이날 행사에 비해 한층 정교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경험들은 이후 프로그램 기획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될 방법론적 기반이 될 것이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 야외극장에서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은 한편으로 홍보와 참여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어린이날 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특정 프로그램을 참여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다른 프로그램들을 경험하게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들렀다가 프로그램의 존재를 알고 다음 일정에 대해 묻기도 했다. 프로그램이 좋으면 사람들은 분명히 반응한다는 것을 두 번의 프로그램 기획과 총괄 운영으로 마주한 얼굴들을 보며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확인하고 있었다.

요컨대, 문화예술프로그램이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는, 프로그램의 질과 참여의 폭이 비례하기보다는 오히려 홍보가 참여의 폭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야 참여가 가능하고 체험 이후에야 비로소 참여의 가치가 인식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홍보와 참여 사이의 간극, 그리고 일회성 행사 구조 안에서
지속가능성을 경험하게 하는 일의 어려움이 분명하게 드러난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함께 모여 활동하고 관계를 경험하는 장면을 한 번 더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번 프로그램은 문화예술프로그램의 가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6. 남은 이야기와 질문들

이번 가을 프로그램 기획은 플리마켓이라는 소비 중심의 형식을 체류와 관계의 경험으로 확장해 보는 실험이었다. 더 나아가서는, 순환이라는 개념을 프로그램의 구조와 경험으로 번역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참여한 아이들과 보호자들의 웃음 속에서 소비는 관계로, 행사는 체류로, 프로그램은 장면으로 확장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주하며 기쁘기도 했다. 결국 순환- 지속가능성은, 개념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구조라는 생각이 남았다.

그러나 질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좋은 프로그램을 어떻게 더 많은 사람에게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일회성 참여는 어떻게 지속적인 문화 경험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순환’이라는 감각은 행사 이후 사람들의 삶 속 어디에 남게 될까.


아마도 2026년의 다음 문화예술프로그램 기획이 이 질문들을 다시 검토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문화예술프로그램이 또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을 연결할 수 있을지, 다음 기록으로 이어가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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