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 담았던 직장에서 공식적으로 골프를 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전설같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전제로 말한 공식적인 골프란, 임원으로 승진하면 승진 기념으로 대표이사 회장이 골프채를 한 벌씩 선물하였다. 물론 법인 골프 회원권도 배정이 되므로 업무상 골프를 쳐도 되는 인정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기에 고참 부장이나 차장급 간부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골프를 배운다. 나도 하늘의 별을 달 수 있는 반열에 올랐다고 자기 능력을 스스로 곧추세운다. 그러다가 절제를 못하고 골프가 독이 되어 대표이사의 선물을 받기는 커녕 아주 멀어진 경우도 종종 보았다. 업무의 역량과 능력이 먼저이고 골프가 나중인데 지나친 자기 사랑과 자기 과시로 과유불급의 쓴 잔을 받는 안타까운 경우를 수없이 목격하였다.
언니 줄 자 좀 가져와!
40 대 중반에 일찍이 영업 담당 임원으로 승진한 K이사의 이야기다.
다른 임원에 비하여 평균 4,5 년, 고참 임원 보다는 10년은 일찍 발탁되었다. 갑자기 선임 영업담당 임원이 회사를 그만 두면서 업무의 연속성이란 특수한 영업 상황 때문에 부장으로 있던 K가 임원으로 승진하였다. 그는 테니스, 축구도 잘 하였고 그동안 거래처와의 골프 때에도 그만 둔 선임 임원과 골프를 즐겼고 실력도 인정받았다.
승진한지 몇 개월이 지난 후 부회장이 임원들과 함께 친목 골프대회를 개최하였다.
부회장은 “K이사가 공을 잘 친다고 하니 나와 한 팀이 되어 실력을 한 번 보겠다”고 하였다. 신임 K이사는 어려운 상관과 한 팀으로 운동해야 하는 부담이 컸을 것이고 긴장도 잔뜩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회장은 승진 신고 골프 관례대로 내기 골프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K이사는 전반 9홀 동안 심한 긴장 탓에 실력도 제대로 보여 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돈도 제법 잃어 면목이 말이 아니었다.
후반에 들어서는 긴장도 좀 풀리며 실력도 점차 회복되었다. 직위 고하를 떠나 지기를 싫어하는 두 사람은 세 번째 홀에서 결정적인 상황을 맞았다. 수 십년 골프를 즐긴 부회장이 드라이브로 친 볼이 OB(Out of Bounds)지역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함께 현장으로 걸어 갔다. 쉽게 말해 플레이가 허용되지 않은 코스 경계선 밖으로 공이 나간 경우이며 해당 홀에서 친 타수에 2벌타를 가산하는 규정이 적용된다. 골프란 적게 친 사람이 이기는 경기인데, OB로 인해 한 홀에서 자기가 친 타수에 2벌타를 추가하는 혹독한 규정은 모든 골퍼들이 피해야 하는 악몽과도 같다. K이사가 보니 부회장의 공은 OB말뚝과 말뚝사이에 떨어 졌는데 가상의 직선을 연결하면 분명히 공은 밖으로 나간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다른 두 명의 임원은 무관심하였다. 부회장은 그 정도는 양해될 수 있을 것으로 알고 그 자리에서 두 번째 샷을 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러자 “부회장님 이건 OB인데요”하며 K이사가 말하였다. 민망한 부회장은 쓴 웃음을 지으며 “무슨 시합도 아닌데 융통성 없이 운동을 그렇게 하나?”하며 여전히 그 자리에서 치려고 하였다. 그 때 K이사는 정색을 하며 “언니, 여기 줄 자 좀 가져와!”하며 경기 보조원에게 OB여부를 판단하라고 미루었다. 경기 보조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색한 표정을 지었고 잠깐동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래 나 OB 야” 부회장은 채로 공을 툭 쳐내며 OB낸 사람이 다시 치도록 지정된 곳으로 옮겨갔다.
“영업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하나,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 영업이 문제네”하며 부회장은 속내를 다 들어 내었다. 끝날 때까지 냉랭한 분위기는 지속되었고 골프도 즐거울 리 없었다. 식사 자리에서도 부회장팀의 골프 해프닝이 화제에 올랐고 승진 기념 골프대회는 우울하게 끝났다. K이사는 기량을 회복하며 크게 돈을 잃지는 않았지만 친목과 축하를 위한 자리에서 상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매너 스포츠라는 골프 경기에서 비매너의 진상을 보여준 두 사람은 모두 수치를 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 후, K이사는 어려운 직장 생활을 지속하게 되었으며 이듬 해도 K이사에 관한 온갖 소문이 파다했다. 결국 3년차 정기 임원 인사에서 퇴임하게 되었고 미국 이민 길을 택하였다.
남자는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지 않았던가? 윗사람의 지지를 못 받는 직장인은 능력이 출중해도 힘든 과정을 겪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일이 있은 후 내가 몸 담았던 직장에서 동료들간 골프를 칠 때 OB선상에 공이 떨어지면 “언니야, 여기 줄 자 좀 가져와!”하는 멘트가 유행처럼 내려오고 있다. 진정하게 이기는 것이 무엇인가? 어려울수록 머리를 들어 전체 숲을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하다.
룰을 따져서 나의 의견이 설령 맞다고 해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아 분위기를 망치게 한 언행은 무엇이 이기는 것인지 우리를 한번 생각하게 한다.
잘 치고 돋보이고 싶은 욕심보다 화목이 중요할 때는 맞출 줄 아는 지혜와 관계의 소중함만 염두에 둔다면 골프라는 운동은 참으로 관계의 증진에 숨겨진 기회가 많은 신사의스포츠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