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지금은 잊힌 말 1

by 명경수



입주 가정교사


앞으로 한 두 편의 글은 칙칙한 흑백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글의 효과나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의 경험이 암울한 60년대 말에 포커스가 맞춰지기 때문이다. 아제 게그도 이 시대 것이면 아무도 주목하거나 쓴웃음을 웃어 줄 사람이 없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말할 수 없는 여린 경험들이 세상을 위해 펼쳐진다고 이해를 하면 좋겠다.


1967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가을에 먼 친척벌인 형수님이 우리 집안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종갓집인 우리 집은 1년에도 많은 제사를 지냈다. 어머님은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이 복을 받고 자식들이 잘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어려운 형편에도 말로만 들었던 잘 살던 시절의 흉내를 내어 제상을 차리곤 하였다.


제사가 끝나고, 형수님은 자연스레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형편과 아들들의 성장 과정을 두루 들어 보시고 나서 나를 자기 집 막내아들의 가정교사로 맞이하겠다고 하였다. 학용품과 교복 등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가지고 당장 집으로 들어가자고 하셨다. 4녀 1남의 막내아들이 중1인데 공부를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큰 걱정을 하시며 집에 와서 같이 먹고 자고 하며 사람을 좀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나를, 사람 만들 사람으로 보았으니 ‘기생충’ 영화에 나오는 기택이 집안의 기우나 기정이와는 판이게 다른 것은 틀림없지 않은가?

이력서를 위조한 것도 내가 가정교사를 원하여 구직을 한 것도 아닌 것은 물론이고 부잣집을 저주한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기에 말이다.


나는 어머니와 상의하여 바로 입주 가정교사로 결정을 하였다. 나의 이 결정에는 시집간 큰 누님과 군대 입대한 큰 형님 외 1녀 3남을 어머니 혼자서 집안 살림을 모두 책임지며 궂은일도 마다하고 자식들 공부시키는데 매달리시기에 형제와 상의 없이 결정하였다.

최소한 등록금과 먹는 입 하나는 줄여 어머님의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 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들어 보긴 하였다. 입주 가정교사는 시골에서 서울이나 부산 등지 대도시로 유학 온 대학생들이 학비와 하숙비를 절감할 요량으로 가정에 입주하여 공부를 가르치는 대학생들의 전유물 정도로 알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일찍 나는 새로운 세상의 경험이 열린 셈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없이 바뀐 세상 아닌가?


우리 집은 부산의 변두리에 있었다. 큰길에서 버스에 내려 30여 분을 걸어야 나타나는 산자락의 집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시내를 건너 수수깡으로 빗자루 메는 집과 두부 만드는 집에서 나오는 김을 마시며 걸어서 한참을 올라가야 있는 공무원 관사이다. 이 집도 축산진흥원 산하 목장의 책임자가 옛날에 우리 집 신세를 지고 시골에서 공부를 한 고마움으로, 1953년 겨울, 부산역 큰 불로 어렵게 된 어머니께 마련해 준 거처였다.


말로만 듣던 부잣집 인심


그런데 여기는 부산의 중심가다. 버스나 전차에서 내리면 5분이면 도착하는 골목 안 궁월이다. ‘ㄱ’, ’ㄴ’ 자 모양의 한옥으로 지은 안채와 별채, 너른 마당과 벽돌담, 담 위는 뾰족한 유리 조각을 박아놓고 그 위에는 윤형(輪形) 철조망을 둘러쳐서 양상군자가 얼씬도 못하게 해 놓았다.

너른 마당의 평상 위에는 배가 부른 일본제 흑백 브라운관 TV가 한 대 놓여있고 그 옆의 소쿠리에는 고구마나 찐 옥수수를 항상 마련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인기 연속극이나 운동 경기를 보러 올 때 심심하지 않게 간식으로 먹게끔 안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숨어 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현안의 정곡을 짚어 해결하고 조치하는 능력이 뛰어난 형수님은 말이 곧 법이며, 남편의 결심도 받지 않고 척척 해결하고 일을 줄여 나가는 것이 내조라고 생각하고 처신하였다.

참 현명한 여인으로 기억된다.


철제로 된 대문은 바깥 주인이 나들이할 때만 사용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쪽문을 이용하였다. 방직 회사 공장장인 바깥 주인이 퇴근하여 올 때가 되면 가정부가 나가서 삐걱거리며 대문을 활짝 열고 주인을 맞이한다. 모든 식구들이 크게 절하며 반갑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 이 집의 풍속이다. 가부장의 권위와 섬김이 배어 있는 집안이다.


나는 별채에 막내아들과 한 방을 쓰며 생활하였다. 옆 방에는 딸들이 하나씩 사용하는 방에서 공부를 방해하는 잡담과 웃음이 흘러나왔다. 대학생부터 중1 까지가 별채를 사용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먼 친척 벌인 건장한 아저씨가 들어왔으니 집안은 술렁거렸다. 그러나 잘 교육된 자녀들은 모두 착하고 배려가 많으며 쾌활한 가족들이었다.


지금도, 눈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모습들에 간혹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나는 내 공부는 뒷전으로 미루고, 잘 가르치고 잘 따라와서 학업성적이 좋아지길 기대하며 최선을 다하였다. 내가 여기에 왜 입주해 있는지? 그리고 부모들의 기대에도 어긋나지 않겠다는 다짐은 매일 이어졌다.


나의 제일 큰 변화는 내 도시락이 변한 것이었다. 친구 들은 의아해하며 조곤조곤 따져 묻기도 하였다.


나는 학교에서 공부와 운동(태권도)을 마치고 집에 와서 가르칠 모든 과목의 예습과 복습을 거쳐 하루의 중점 과목부터 두, 세 시간을 몰두하여 가르쳤다. 모든 일과가 끝나면 자정 가까이 된다. 안도감과 함께 피로가 몰려오면 내 공부는 대충 마감하고 내일을 준비한 후 잠자리에 든다.

이미 조카는 내 잠자리를 깔아놓고 꿈나라로 갔다. 이런 생황을 1 년 정도 하니 조카의 성적은, 이제 앞에서부터 세어도 좋을 정도가 되었다.


부모들의 반응도 좋았다. 휴일에는 운동도 같이하고 영화도 보고, 내가 학교에서 경험한 일들을 재미있게 말하면 웃음과 장난기가 많은 조카는 순수하게 잘 받아들였다.

형수님은 “도련님이 우리 애들과 동성동본만 아니면 계속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며 농담 같은 속내를 내 보이신 기억도 새롭게 다가온다.


중2, 3학년에 접어 들어서는 내가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큰 차질이 예상되어 참고서로 사전에 잘 대비하여 책임을 다 하였다. 마침 그 무렵, 큰 딸이 유학을 떠나자 나도 한 칸의 독방을 갖게 되었다.

혼자서 준비할 일과 밝히고 싶지 않은 개인적인 일들이 노출 없이 유지되니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2년의 입주를 마치고 조카 학생은 손색없는 고등학교를 지망할 정도로 성장하였고 내가 진로를 서울로 정하며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잘 가요, 아저씨

1969년 늦은 가을 나는 안채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온 가족의 아쉬움 속에서 과분한 사랑과 보상을 받고 아름다운 이별식을 하였다.

모든 식구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까까머리 아저씨 선생님을 도열하듯 한 줄로 서서 배웅하였다. 미련은 있지만 앞날이 창창한 나를 일으켜 세우고 이제 나를 위해 전진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주마등 같은 지난 2년의 소중한 시간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며 억지로 눈물을 참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모두 행복한 가운데 흠 없는 나의 인생 첫 과업은 성공리에 끝났다.

나는 많이 알지는 않아도 아는 것을 100% 전하는 능력이 있어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경험이 밑천이 되어 퇴임 후에 어린이들과 친하게 놀 수 있는 기회도 생겨났다. 최선을 다하면 태산도 옮겨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만 성적은 올랐는데, 사람은 만들었는지는 내가 평가할 문제는 아니었다.

부자의 그늘이 확실히 무섭긴 하였다.


지금은 잊힌 ‘입주 가정교사’의 훈장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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