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금은 잊힌 말 2

by 명경수


귀국 박스


참 희한한 역사가 만들어낸 아픈 말이다. 그리고 정성이 가득한 귀한 말이며, 사랑이 있었기에 생긴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있어서 해당되는 말이다.

‘귀국 박스’는 베트남 전쟁(당시는 월남전)에 참전한 우리 군인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군장 외 가족에게 줄 선물이나 전쟁을 기념하는 물품을 넣은 나무 궤짝을 말한다. 물론 이 박스는 군부대의 검열을 거친 주월한국군 사령부가 인정한 것이었다. 이 귀국 박스에 얽힌 휴먼 드라마를 풀어보자.


베트남 전쟁은 어떤 전쟁인가요?


제2차 세계대전 후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46년 12월에 베트남과 그 주변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에 전쟁을 일으킨다. 공방을 거듭한 지루한 전쟁은, 1954년 인도, 폴란드, 캐나다 정부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이 감독하여 제네바에서 협정을 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식민 정책은 해체되고, 베트남은 북위 17도 선을 휴전선으로 하여 남과 북으로 분할된다.

북베트남(당시는 월맹)은 호찌민이 지도하는 공산주의, 남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이 지도하는 반공정권이 된다.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들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 이후 1955년 11월부터 1975년 4월 사이에 벌어진 내전인 동시에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와 소련과 중국이 주축이 된 공산주의의 이념 전쟁을 말한다.


미국은 왜 개입했나요?

1960년 남베트남 정부의 부패로 반 정부 세력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NFL, 일명 베트콩)과 정부 사이 내전이 시작되었고 급기야 1964년 8월 7일 통킹만 사건 (미국의 구축함이 북베트남의 어뢰 공격을 받음)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한 뒤에 미국과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미국의 민주당 정권인 제35대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제36대 린든 B존슨 대통령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연쇄적으로 공산화되는 ‘도미노 현상’을 우려한 나머지 소극적인 참전에서 적극적으로 확전을 추진하고 베트남에 민주주의를 조기에 정착시키겠다는 결의를 보인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이란 기후와 지형, 베트콩의 오랜 전쟁으로 몸에 밴 특수한 생존전략에 최신 무기로 전쟁을 하였지만 승리를 이루지 못하였다. 미국 내 국민들의 반전 시위와 저항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결국, 1973년 평화협정 이후 미군은 철수를 결정하였다. 곧이어 1975년에는 남베트남이 완전히 종결되고 이듬해인 1976년 남북한 통합된 사회주의 공화국이 출범한다.


인구 2억의 최강의 미국이 인구 1천5백만의 최빈의 베트남에 고배를 들었다.


미국은 9년 동안 270만 명이 참전하였고 5만 8천 명의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베트남도 남, 북 합쳐서 110만 명이 전사하였다.


한국은 왜 참전합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7월 국회 동의를 받은 후 1965년 2월, 2천 명의 후방 지원 부대를 필두로 7월엔 2만 명을 추가 파병하고 1966년 ‘브라운각서’ 체결한 후 본격적인 전투 부대의 대량 파병을 단행한다. 이렇게 하여 1973년까지 육군을 중심으로 연인원 32만 명을 파병한다.


파병의 중요 이유는,

* 미국 존슨 대통령의 확전과 개입 정책에 동맹국으로서 민주주의 수호에 찬성하며, 군사 혁명으로 잡은 정권의 신뢰와 호감을 얻기 위함이다.

* 6.25 전쟁으로 자원, 기술, 자금이 바닥난 최빈국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든다.

* 주한 미군의 감축을 막고, 파병으로 국방비를 절감하며 국군의 현대화를 앞당긴다.

* 한국전에서 일본이 특수(特需)를 누린 것 같이 한국도 기업의 성장을 도모하는 기회로 삼는다.


한국의 위상과 얻은 것과 잃은 것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얻은 것은 가난을 벗어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64년 파병 직전의 1인 GNP(국민 총생산) $103에서 1974년 종전 직전에 $541로 5배가 넘었다.

당시 외환 보유액의 30%($10억)가 파병 군인들의 참전 수당과 진출 기업들의 수입이었다.

이 자금은 경부고속도로를 닦고, 포항종합제철소를 만드는데 투입되어 근대화를 앞당기는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군의 전투력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과 정반대의 전투 방식으로 철저한 정찰 후 지형에 맞게 부대를 운영하며 신속하고 완전한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중 ‘고보이 전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와 미국 등 연합군이 12년간 점령에 실패한 전략 요충지를 한국군이 2시간 만에 완전히 정복하여 미국을 포함한 동맹국은 한국군 작전 방식을 현장 전술 교범으로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콩도 한국군 회피법을 따로 교육할 정도였다.


참전 기업들의 경험이 자산이 되어 중동 진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9년간 파병과 기업들이 진출하는 사이에 우리 사회의 변화가 문화적인 변화로 연결되어 영화, 소설, 드라마, 가요, 뮤지컬, 만화 등 전 분야에도 활발한 활동이 이어졌다.


우리나라는 1967년부터 1970년 사이 수출은 매년 40% 이상 초고속 성장을 한다.


잃은 것은 무엇보다도 미국 다음으로 많은 32만 명이 파병되었으며, 그중 전사자가 5천 명과 부상자자 1만 명 이상 발생하였다. 자유를 지키고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데 숭고한 희생이 따랐다.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지금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거나, 불구의 몸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참전 용사들은 나라가 제대로 돌보아야 할 것이다.

피 값으로 산 자유를 소중이 지키고 한국전쟁 때 우리를 도운 참전국에게 진 빚을 우리도 말끔히 청산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너무나 값비싼 희생이 따랐다.


귀국 박스와 나

나의 형님은 1971년부터 1972년까지 1년간 맹호부대 사병(병장)으로 자원하여 참전하게 된다. 대부분의 군인들이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난을 탈피하겠다는 일념으로 지원을 하였는데, 형님도 마찬가지였다.


부산항 부두에는 가족과 환송을 축하하는 학생들이 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파월 장병들을 열렬히 환송하였다. 나도 고등학생 때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송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


전쟁기념관에 자랑스럽게 기록된 맹호 부대의 ‘안케 전투’를 직접 체험하며 1년 후 전쟁터에서 살아서 돌아가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병장의 1 개월 전투 수당은 $54 정도다. 80% 정도는 본국으로 송금하고 남은 쥐꼬리 만한 용돈을 모아서 가족에게 줄 선물을 설렘 속에서 마련한다. 미군 PX나 외출 나가서 귀국 준비를 짬짬이 하였다.


귀국 박스에 단골로 들어가는 것은 미제 담배와 라이터, 비누, 가전제품, 전투 식품인 C 레이션, 돈이 없는 장병들은 탄피를 모으거나 빈 알루미늄 맥주 캔, 심지어 구리 전선과 보급된 낙하산 천(실크), 군용 텐트, 베트콩에게 노획한 장구류도 추억 거리로 챙겼다.


1m가 좀 넘는 육면체 상자에는 넣고 싶은 물품은 많으나 형편이 허락하지 않은 병사들은 거저 지켜만 볼 뿐이었다. 귀국하는 배에 1천 명의 병사 중 15~20%만 귀국 박스를 만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귀국 박스를 준비한 장병들은 개선장군과도 같았을 것이다.


형님의 귀국 박스에는 어머니가 자식 공부를 시키면서 생긴 빚을 갚겠다는 각오가 있었기에 준비도 마음먹고 단단히 한 것이다. 소형(C형) 귀국 박스에는 일본산 소형냉장고(180L)와 미제 담배 15*보루, 다이얼 비누 150장 그리고 정글화와 전자 제품 충진용 미군 군복 4 벌이 전부였다.

* 보루[Boru] 담배 열 갑을 한 묶음으로 세는 단위


냉장고는 미군 PX에서 두 달치 전투 수당에 상당하는 $100(한화 5만 원)에 샀다. 그 당시한국에서는 라디오나 TV, 냉장고는 엄두도 못 내는 귀한 물품일뿐더러 마을에서 부잣집 한 두 군데에만 볼 수 있는 호사품이었다.

1970년대 우리나라의 라디오 보급률 25%, 흑백 TV은 4.7%인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된다.


형님은 1972년 10월 부산항에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였다.

생명 같은 박스는 남포동 전자 상가 직원들의 흥정도 뿌리치고 집으로 가져왔다. 어머니와 상의한 후 형편이 그래도 괜찮은 막내 이모님 댁에 처분하여 30만 원의 현금을 확보하였다. 당시 대기업 대졸사원의 초임이 10만 원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큰돈이었다.

이 돈과 본국으로 송금된 전투수당을 합쳐서 어머님께 올려드리고 곧바로 어머님의 평소 소원인 “남에게 줄 빚만 없어도 두 다리 뻗고 살겠다”는 소원을 이루게 하였다.


담배와 비누는 친척과 가까운 동네 사람에게 기념으로 나누어 주었다. 성냥도 귀하던 시절, 양담배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 광경은 동네 사람들이 볼 때는 마술쇼를 보는 것 같이 신기해하였다.

귀국 박스는 전쟁 기념품인 동시에 1989년 해외여행 자율화 이전에 발생한 외국 문물을 대량으로 받아들이는 소비문화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나는 형님이 가져온 군복과 장글화를 신고 뽐내며, 신병훈련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하였다. 군기가 빠져서 전쟁에 참전도 않은 사병이 폼만 잡는다고 심한 얼차려를 받고 말았다. 군복과 신발은 압수당하고 한동안 형님에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가난을 청산한 귀국 박스는 우리 집안의 가보(家寶)와도 같은 소중한 추억이다. 지금도 형님을 대하는 동생들의 태도는 무조건 복종이요, 무조건 존경 그 자체이다.

국립현충원에 유택이 마련된 70 후반의 형님은 심신이 평안하며 투철한 국가관을 지닌 애국자다.

부디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빈다.


전쟁은 경제력과 전투력 만으론 승리할 수 없는 많은 복합적인 요소들이 잠재하는 게임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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