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터멘션 Feb 21. 2020

프라하 보름살기,
오직 나만을 바라보았던 시간

혼자 '프라하' 다녀오겠습니다.




여행을 ‘처방’ 받아요.



 나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여행’이라는 단어를 찾곤 한다. 온갖 걱정이 만무했던 졸업을 앞두고, 졸업 작품과 과제에 치이다 보니 유난히 여행의 욕구가 커졌던 것 같다. "졸업하면 뭐할 거야?"라는 질문에 나는 취업과 관련된 대답 대신, "짧아도 한 달 이상 여행 다닐 거야!"라고 동문서답을 내뱉었고, 상상만으로도 힘이 되는 여행은 내게 큰 버팀목이 되어주곤 했다. 사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 가족, 친구와 함께 짧고 빡빡한 일정 속에 피곤함이 따라다니는 여행을 해왔던 것 같다. 그래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나 홀로 길게 느슨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던 게 아닐까.


그렇게 졸업을 하고, 나는 부모님께 반 협박으로 "나 혼자 유럽 여행 갈래"라고 선전포고를 날렸고, 아직도 그날 당황하시던 엄마의 눈빛과 매몰차게 무시하던 아빠의 모습이 생생하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며 극구 반대하셨지만, 꼭 가야겠다는 의지 하나로 부모님 몰래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약 한 달간 부모님을 어르고 달래며 설득했다. 그렇게 별다른 준비 없이 시작된 나의 프라하 반 달 살기.







내가 사랑한 그곳, 프라하


프라하 반 달 살기를 결심한 건 4년 전, 처음 유럽여행을 갔을 때, 2박 3일간 프라하를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빨간 지붕에 까맣게 쌓인 먼지마저 아름답던 건축물들이 잊히지 않았고, 이런 곳을 이틀만 머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꼭 다시 오겠노라’ 스스로 다짐했었고 그렇게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프라하 반 달 살기를 결심했다. 


프라하행 티켓을 끊은 후, 처음엔 별걱정이 들지 않았다. 혼자 미국도 가봤기에 '이제 곧 간다!'라는 부푼 마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출국일이 다가올수록 '빠진 건 없나?', '비상약은?‘, '환승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겠지?' 등 온갖 걱정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끼였고, 결국 출발 전날, 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타러 갔다.




 



우여곡절 끝에 프라하 공항에 도착해 4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반겨주는 조형물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하지만 '아, 정말 내가 프라하에 다시 돌아왔구나!'라는 벅찬 마음도 잠시, 택시를 타고 어두운 골목골목을 지나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12시가 넘은 시각. 긴장감이 풀리니 피로가 확 몰려와 대충 씻고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 비몽사몽 눈을 떴을 때 창밖으로 보이는 붉은색 지붕과 종소리에 그제야 프라하에 왔다는 것 실감했다. 어젯밤 내내 마음 졸였던 순간들이 사라졌고, 기분 좋게 옆 침대의 친구들과 인사 후, 설레는 마음으로 얼른 씻고 밖을 나서니 칼바람이 먼저 나를 반겨주었다. 하지만 뭐 어때, 그래도 좋은걸!


숙소 바로 뒤가 프라하성이라서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니 보이는 탁 트인 풍경.  30분 동안 멍하니 빨간 지붕만 내려다봤다. 걱정거리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어도 좋았던 순간이었다. 슬슬 추워지려는 찰나에 스타벅스에 들어가 샌드위치로 하루를 시작했다. 밖을 나와 한 걸음씩 걷다 보니, 4년 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타국에서 지도를 보지 않아도 길을 알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 기분이 새롭고 즐거웠다. 예전 기억이 떠올라, 그 순간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전화해 '나 지금 여기 있어!'를 외쳤다.







무계획이 곧, 내 계획


7일 정도 혼자 지내다가 여행 정보를 얻기 위해 '유랑'이라는 카페를 가입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동행을 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일 혼자 먹는 식사가 지루해지던 시기라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들.

동행들과 만나기로 한 당일, 맥주를 마시러 가기로 했는데 해가 쨍쨍하게 떠있음에도 소나기가 거세게 내렸다. 작은 우산이 있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그대로 비를 함께 맞으며 그냥 눈앞에 보이는 가게에 뛰어 들어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서로 웃으며 맥주를 마셨던 기억. 그리고 그날 함께 프라하 야경을 보겠다며, 칼바람도 이겨내고 올라갔던 레트나 공원. 어둑하게 불이 꺼진 조용한 프라하를 보고 피식 웃으며 다음에 꼭 다시 오자고 약속했다. 

일상이 되어버렸던, 프라하에서의 2주는 나에게 여유로운 여행이 무엇인지, 여행의 새로운 즐거움을 깨닫게 해 준 특별한 경험이었다. 피곤하면 늦잠을 자고, 느지막이 나와 지도를 보지 않고 무작정 발길 닿는 대로 걸어 다니며 예쁜 소품점이 있으면 들어가 구경을 하는 것이 좋았다. 매일 까를교를 건너 좋아하는 카페에서 오늘의 케이크를 먹고, 일기를 쓰는 것이 내 일상이었던 날들···.







프라하가 익숙해질 때 즈음, 무작정 아침에 기차표를 끊고 드레스덴에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역에 조금 일찍 도착해 과일과 프라하의 대표 과자인 ‘COLLONADA’를 사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차에 올라탔다. 따로 지정석 없이 원하는 룸 형식의 좌석에 앉으면 돼서 창가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6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는데, 내 앞에는 이탈리아 남성이, 끝자리에는 아시아계 남성이 앉아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과자를 그분들에게 권하면서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내 앞에 앉은 이탈리아 분은 비즈니스로 베를린에 출장을 간다며, 어린 나이에 여행 중인 내가 부럽다고 하소연하더라.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다 드레스덴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기차에서 내릴 채비를 하는 내게 좋은 추억을 만들고 가라며 응원해주었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고, 책을 읽고, 괜찮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독일식 족발(?) 학센을 먹으며 마음껏 여유를 부렸다. 날은 흐렸고, 공사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 자체로도 아름다웠던 곳. 마지막으로, DM에서 약 8만 원어치의 쇼핑을 한 채 버스를 타고 프라하의 저녁으로 돌아왔다. 내가 느낀 드레스덴은 프라하보다 더 현대적이면서도 역사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보전되고 있어 다른 매력이 느껴지더라.


드레스덴을 시작으로 갑자기 ‘여기 가고 싶다!’ 생각이 들면 바로 티켓을 사서 플젠으로, 때론 체스키로 다양한 근교 여행을 떠났다. 계획은 그 전날 혹은 당일에 티켓을 구매하는 걸로 충분했다. 이런 무계획 속에서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게 두렵지 않았으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하고 싶은 건 뭔지,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게 해 준 프라하.







나를 알아가는 시간


 이번 여행으로 혼자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던 다른 사람들의 인식을 부수고, 무엇보다 내 감정에 가장 솔직했던 시간을 보냈다. 좋고 싫음을 구분하며 나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었고,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다고 내가 나를 다독이고 위로하며 용기를 줬던, 소중하고 꿈만 같았던 시간이었다.

만약, 혼자 여행 갈 기회가 생긴다면 장기든 단기든 빠듯한 여행보다는 여유로운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뭔가를 꼭 해야겠다고 떠나는 여행도 좋다. 하지만 가끔은 아무 계획 없이 떠나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헤쳐 나가며 더 성장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분을 모두가 느껴봤으면 한다. 돈이 없다고, 시간이 없다고 망설이는 사람들도 여행이 꼭 거창할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장할 수 있는 여행을 꼭 경험했으면 한다.




2019.03.08 ~ 2019.03.23

'양지연'님의 쉼 이야기

Insta : zzzennie


더 많은 '쉼' 구경하러 가기▶▶


작가의 이전글 고생한 우리 가족과 내게 주는 선물, 제주 보름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