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함에 대한 쑥스러움이 없어졌던 시간들
다들 한 번쯤은 문득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저는 매번 힘들고 지칠 때마다 “아, 떠나버리고 싶다!”를 외치던 사람이거든요. 대학 생활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었고, 밤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풀다가 해가 뜨는걸 보고서야 ‘아싸 내일 공강이다!’ 하며 터덜터덜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렇다고 전공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정말 말 그대로 평범한, 보통의 대학생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버렸고 의도치 않게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어요. 뒤돌아보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몸이 조금씩 망가지고 있었더라고요. 의사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스트레스가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라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제 나름대로 잘 이겨내고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제 몸은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망가져버린 몸을 치료하는데 약 8개월이 걸렸어요. 치료는 너무나도 힘들었고 고통스러웠어요. 하지만 치료를 받는 저보다, 저를 지켜보며 함께 아파하고 또 저를 간호해주시는데 온 힘을 쏟으신 부모님이 더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저희 가족 모두 이 모든 것들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제가 받아야 하는 치료가 모두 끝나고, 당장 떠나고 싶었지만 체력이 따라주질 않아 회복기간을 가졌어요. 그러다 문득 ‘이 정도 체력이면 제주로는 떠나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번지르르하게 해외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을 수 있지만 내가 가장 편안할 수 있고 무리하지 않고도 즐길 수 있는 여행지로 떠오른 곳이 제주였어요. 그렇게 충동적으로 제주 여행을 결정하고 이틀 만에 숙소와 비행 편을 모두 예약해버렸어요. 엄마도 처음에는 불안해하셨지만 나중에는 제 여행 계획에 응해주시더라고요. 그렇게 갑작스럽게 엄마와 저는 제주도 여행을 가게 되었어요. 누구보다 고생한 우리에게 휴식을 선사하기로 한 거죠.
저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늘 바다를 찾고 바다를 보며 마음을 정화시키곤 했어요. 그래서인지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바닷가를 발밑에 둔 채로 날아가는 그 순간부터 뭔가 홀가분해지기 시작하더라고요. 시작이 좋았어요.
사실 2년 전 여름, 친구와 함께 3박 4일로 다녀온 제주 또한 저에게는 너무나도 만족스러웠어요. 유명한 식당과 감성이 넘치는 카페에 들려 서로의 휴대폰에 가장 예쁜 모습을 담아주었던, 밤에는 북적거리는 게스트하우스 파티에 참여해서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우다 지쳐서 잠에 들었던, 또 우리만의 이야기와 고민거리에 푹 빠져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주었던 알찬 여행이었죠.
하지만 이번 여행은 조금 달랐어요. 우선 엄마와 저는 목표를 세웠어요. 하루에 오름 하나는 정복하자라고요. 자연과 함께하고 또 제주의 삶에 한 번쯤은 동화되어보고 싶었어요. 단순히 맛집을 찾아 떠나는 여행, 카페 투어, 그리고 소품샵 투어가 아닌, 정말 그들의 삶에 녹아들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거든요. 이렇게 하루에 오름 하나씩을 정복해나가다 보니 몸도 마음도 회복됨을 느꼈어요. 치료를 받느라 조금은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라 처음엔 오름을 오르는 게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하지만 정상에 올라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때면 성취감과 동시에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저 멀리 보이는 바닷가, 그리고 뒤로 펼쳐진 한라산을 배경으로 엄마와 저는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서로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말하기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진지함에 대한 쑥스러움과 민망함을 핑계로 내뱉을까 말까 갈등하다 결국엔 매번 삼켜버리곤 했던 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제주에서만큼은 조금 달랐어요. 제주만이 줄 수 있는 그 편안함과 안락함이 저를 변화시켰어요. 속에 꽁꽁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하나둘씩 내뱉을 때마다 마음에 쌓여있던 짐이 하나둘씩 없어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오름이 조금은 지겹게 느껴지는 날이면 올레길을 걸었어요. 특히 1코스와 7코스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7코스의 초반은 오름으로, 중반부터는 바닷길로 구성되어있는데 제주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완주하는 데는 약 6시간 정도 소요되었어요. 짧은 코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난도의 코스는 아니었기에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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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코스를 걷다 보면 각종 해물과 라면을 파는 작은 집에서 귀여운 강아지들을 만날 수 있어요. 엄마 진돗개, 아빠 진돗개, 그리고 강아지 다섯 마리가 함께 사는 집인데 그 아이들의 귀여움에 삼십 분 동안 발이 묶여버렸어요. 주인 할머니랑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엄마 진돗개와 아빠 진돗개는 원래 유기견이라고 하셨어요. 하루 이틀 먹이를 주다 보니 할머니께서 주인이 되셨고 이제는 집도 지어주셨더라고요. 저는 이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소박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참 좋고 따뜻했어요. 이 또한 여유로운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아 참, 실제로 제주에는 무리를 지어서 돌아다니는 유기견들이 정말 많았어요. 개를 무서워하시는 분들이나 운전을 하실 때는 조심하세요. 그래도 사나운 친구들은 없었으니 너무 걱정은 안 하셔도 될 듯해요. 올레길 중간중간에 포기하고 그냥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생겼지만 꾹 참고 계속 걸어 나갔어요.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7코스의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고 완주에 성공한 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어요. 완주했을 때의 그 성취감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라 아직도 생생해요.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생활에 무뎌질 때쯤 찾아온 감정이라 더욱 소중했어요. 올레길 가시는 분들은 물은 꼭 넉넉히 챙겨가시고 화장실은 걱정하지 마세요. 화장실이 가고 싶어 질 때쯤 주위를 둘러보니 꼬박꼬박 화장실이 잘 설치되어 었더라고요.
1100 고지도 꼭 한번 가보셨으면 좋겠어요. 한라산을 끼고도는 드라이브코스인데 운전은 조금 어려웠어요. 길이 꼬불꼬불하고 또 설경을 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많아서 차로 북적거렸거든요. 하지만 이 모든 걸 감수할 수 있을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어요. 스위스를 가보진 못했지만 스위스의 설경만큼 아름다웠던 곳이었어요. 고도가 높아서 엄청 춥고 바람도 많이 부니까 옷 따뜻하게 입고 가셔야 할 듯해요. 그리고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엔 차가 미끄러질 수 있으니 날씨가 좋은 날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저는 약 2주 동안 아침은 숙소에서 간단히 해결하고 점심 저녁을 밖에서 사 먹었어요. 정말 수많은 제주의 식당을 방문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식당은 은빌레 식당과 소금바치순이네라는 곳이었어요. 은빌레 식당은 서귀포에 위치한 한식 뷔페인데 현지인들이 많이 찾아오시는 식당이더라고요. 사실 별 기대 없이 갔었는데 엄청 깔끔했고 무엇보다 너무 맛있었어요. 수육, 고등어구이, 비빔밥, 호박죽까지 부족한 음식이 없었거든요. 다음으로 소금바치순이네는 제주 동쪽에 있는 식당이었는데 입구에서부터 크고 귀여운 강아지가 저희를 반겨줬어요. 밑반찬과 음식도 엄청 맛있었지만 무엇보다 사장님과 가족 분들이 너무 친절하셨어요. 귤을 좋아한다는 엄마의 말에 호다닥 창고로 가셔서 귤을 바구니채로 가져오시더니 제주에는 남아도는 게 귤이라며 비닐봉지에 마구마구 담아주시더라고요. 자신이 가진 것들을 거리낌 없이 내어주는 사장님 내외분의 마음이 너무나도 포근하게 느껴졌네요. 만약 다시 제주를 가게 된다면 이 두 식당은 무조건 다시 들릴 생각이에요.
어릴 때는 다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항상 두근거리고 흥미로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거나 여러 걱정거리들을 떠안게 되면서 인간관계에 지쳐가기 마련인 듯해요. 저 역시도 그랬었죠. 하지만 우연히 발견한 곳이나 발 닿는 곳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새로운 인연들을 만났고, 또 그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잠깐이나마 타인에 대한 경계가 없었던 순진무구한 어린 시절의 저로 돌아간 기분이었어요.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를 오른편에 두고 달리면서 고민거리를 훌훌 털어버리고, 초등학교 옆의 이름 모를 뒷동산에서 불안감을 한 움큼 덜어낼 수 있었던 저의 제주여행에는 아쉬움이 없었던 것 같아요. 분명 순간순간 느꼈던 아쉬움은 존재했었겠지만 제주로부터 얻어진 여유와 용기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아, 제주 또 가고 싶다.’라는 생각뿐이었네요.
아 하나 떠오른 건데 제가 2년 전 갔던 제주보다는 좀 더 상업적인 제주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조금은 아쉬웠어요. 하지만 관광객이 늘어남에 따라 나타나는 불가피한 변화라고 생각하고 그대로를 즐겼고 받아들였어요.
1년 전의 저였다면 이렇게 훌쩍 떠나지 못했을 거예요. 졸업부터 시작해서 취업까지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았거든요. 하지만 힘든 일을 겪으며 쉬어감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어요. 누구보다 소중한 나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고생한 나에게 한 달간의 휴식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불안해하지 말고 떠나세요. 제주에서 자신을 찾고 스스로를 보듬어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가져다주는 순수한 행복과 여유로움을 한번쯤 느껴보시길 바랄게요.
2020.01.02 ~ 2020.01.16
'조문주'님의 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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