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많다는 것
내 나이 23에 운 좋게 취직하여 5년 차쯤 접어들 시기였다. 반복되는 일상은 나를 무기력함과 매너리즘에 빠트리기 충분했고,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가?', '나의 20대는 이렇게 보내야 하는 건가?' 등 답을 내리기 힘든 질문들에 하루에도 수백 번은 더 고민했다.
사실, 지금 돌이켜보면 위의 질문들은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심각했고 탈출구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혼자서 어디든 여행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목적지는 쉽게 스위스로 정할 수 있었다. 그냥 예전부터 스위스를 가고 싶어 했으니까.
11월 27일
새벽부터 대구에서 인천행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하루 종일 교통수단에 몸을 맡긴 첫날, 오후 6시 10분에 취리히 공항에 도착을 했을 때에는 적적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예약해둔 유심을 찾을 때부터 길을 헤매기 시작했고, 짐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우여곡절 끝에 인터라켄에 위치한 숙소에 도착을 하여 짐 정리를 마치고 내일 일정을 위해 잠을 청했다. 아침 6시. 스위스에 왔다는 걸 내 몸도 아는지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고, 눈뜨자마자 바로 날씨부터 체크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렸다. 아무래도 자연경관을 보는 관광은 무리라 판단해서 주변 도시를 관광하기로 했다.
조식을 먹고 이른 아침 베른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베른에 도착했지만 어딜 가야 할지 뭘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없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나 스스로 조차 낯설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냥 눈에 보이는 곳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이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다 보니 비가 잠깐 그쳤다. 장미정원에 가서 베른을 내려다보며 사진도 찍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오전보다 더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다시 인터라켄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비가 그쳐 바로 하더쿨룸행 티켓을 구매했고 그곳은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운 뷰를 가지고 있었다. 산 위라 조금은 쌀쌀한 날씨였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좋았다. 튠 호수와 브리엔츠 호수가 양 옆에 보였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숨 쉬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더쿨룸에서 내려온 후, 맥도널드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기분 좋게 첫날 하루를 마무리했다.
11월 29일
다음 날, 또 비가 온다. 시작부터 날씨가 발목 잡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스위스는 날씨가 80% 이상이라던데 앞으로의 남은 여행이 조금씩 걱정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이 날의 행선지였던 니옹성에 2시간 이상 기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비바람이 심하고 이브와행 페리 또한 운행하지 않는지 문이 닫혀있었다. 처음엔 허무하게 돌아서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짜증이 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았다. 지나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많다는 건 이 모든 짜증을 덜어주기에 충분했다. 이게 장기여행의 장점이 아닐까.
11월 30일
스위스 여행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많지만 특히 마테호른 글라시어로 향하는 고르너그라트행 열차에서의 설렘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 날은 마테호른을 마주한 날이었고 날씨마저 완벽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사실 마테호른의 봉우리를 완벽하게 볼 수 있는 날이 1년 중에 많지는 않다고 한다. 날씨가 맑아도 봉우리 부분에만 구름이 낀 경우도 있고, 날씨 자체가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우스갯소리로 '3대가 덕을 쌓아야 마테호른을 볼 수 있다.'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이다.
스위스 여행의 시작을 3일 내내 비와 함께 했던 나로선 마테호른의 완벽한 봉우리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우리 집안은 5대쯤은 덕을 쌓은 게 분명하다. 산이 이렇게 잘 생겼나 싶을 정도로 마테호른은 완벽 그 자체였다. 특히 마테호른 정상에서 먹었던 신라면의 고춧가루 맛은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경치 덕에 맛있었던 것도 있었지만 3일 내내 빵, 치즈 느끼한 음식만 먹다가 뜨거운 국물 맛을 보니 더욱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은 그린델발트로 이동하여 피르스트를 방문했다. 날씨가 좋을 때 가고 싶었지만 전 날 숙소에서 동행하게 된 동생이 그래도 가보자고 해서 케이블카에 몸을 실었다. 피르스트 정상에 도착했을 때 조금은 놀랐다. 아니, 이날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을 정도로 놀랐다. 아름다웠고 딱 봐도 겨울이구나 하는 풍경들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순간순간이 내 여행의 이유가 되었던 하루였고 그렇게 피르스트에서 내려와 동생과 함께 위스키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12월 4일
로잔, 브베, 몽트뢰를 돌아다니며 알게 된 건 스위스란 나라 자체가 세계 각지의 유명인사들이 마지막 여생을 보내는 휴식처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내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만한 편안하고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스위스에서 ‘쉼’을 찾았고 언젠가 다시 ‘쉼’을 찾으러 스위스에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면 그건 스위스의 상징이자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인 융프라우를 마주한 순간일 것이다. 융프라우행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포토스팟인 깃발을 찾으러 움직였는데 고산지대다 보니 숨이 생각보다 빨리 차오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유럽의 정상에서 바라보았던 뷰는 어떻게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패딩을 벗어도 따뜻했고 바람 한 점 없었기에 더욱 오랜 시간 동안 감상에 젖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시간이 멈춰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순간이다. 그 날 일정을 마치고 마셨던 맥주 한 캔이 아직도 생생하다.
12월 6일
액티비티도 좋아하기에 패러글라이딩도 신청했다. 피르스트에서 같이 뛰기로 한 강사분을 만났고, 같이 피르스트 정상에 올랐다. 패러글라이딩 가격은 사진과 영상을 포함해 27만 원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평생 가는 추억이기에 흔쾌히 돈을 지불했다. 2년 전 호주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해봐서 그런지 솔직히 패러글라이딩의 짜릿함은 생각보다 덜했다. 그래도 패러글라이딩 또한 나름의 매력이 있었고 충분히 즐길만한 액티비티였다.
패러글라이딩을 마치고는 블라우제 호수로 이동하여 송어 너겟으로 점심을 먹었다. 블라우제 호수는 맑고 깨끗했으며 시원한 공기가 나를 반겨주었다. 스위스를 간다면 꼭 일정에 넣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만큼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있을 만큼 아름답기 때문이다.
패러글라이딩을 끝으로 기존에 계획하고 있었던 곳은 모두 다녀왔기에 이젠 정해진 일정 없이 가고 싶은 곳과 갈 수 있는 루트를 찾아 여행을 이어갔다. 사실, 스위스 같은 경우는 유럽을 한 달 여행하는 여행자들의 경우 오랜 시간 동안 머무르지 않는다. 경비나 다른 일정 등의 이유로 빠르게 유명한 곳만 보다 보니 쉴트호른을 여행 일정에 넣는 여행자들이 많지는 않을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쉴트호른은 꼭 가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융프라우, 아이거, 먼치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볼 수 있으며 정상에는 360도 회전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007 촬영지로도 유명한데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풍경들이 내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온통 눈으로 덮인 세상에 많은 감정들이 벅차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슬슬 여행이 끝나감을 느끼고 있었다.
12월 8일
마지막 여행 일정이 있는 날에도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다. 내가 처음 스위스 여행에서 목표했었던 건 최대한 많은 산을 가보며 특히 알프스 산맥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었기에 루체른 필라투스 산을 올랐다. 하지만 필라투스 가는 길을 헤매는 바람에 생각보다 도착하는 데 오래 걸렸고, 시간은 어느덧 점심을 넘기고 있었다. 필라투스는 지금까지 다녀왔던 산들 중에서 높이는 낮으나, 용의 산이란 별명답게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 닥쳤다. 산 정상에서는 오랫동안 있질 못하였고 두 시간 정도 있다가 하산하게 되었는데 마지막 날인 만큼 아쉬운 마음이 많았다. 며칠 전에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한 카펠교 야경을 구경하고 또 구경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에도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스위스란 나라에 대해서 말을 하자면 굉장히 시민의식 수준이 높은 나라이다. 다른 유럽의 많은 나라와는 다르게 소매치기, 인종차별을 겪은 적이 없으며 횡단보도를 건너려는 시늉만 하더라도 반대편 차선의 자동차까지 정지하는 그런 나라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을 때에도 먼저 앉아있는 사람에게 '앉아도 되나요?'라고 물어보고 앉는 사람들이었다.
스위스는 물가가 비싸다는 것 빼고는 자연경관이며 시민의식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나라이다 보니 여행지로 추천을 안 할 수가 없다. 혹시나 스위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추천을 하고 싶다.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떠날 수 있을 때 떠나길 바란다. 끝으로, 나는 혼자 여행을 간 것은 처음이었지만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동행을 구할 생각도 안 해봤고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해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해 낼 수 있다, 해 내겠다는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냥 하고자 하는 의지, 가고자 하는 의지였다.
외로운 것도 느끼질 못했고 오히려 혼자서 아무 제약 없이 다닐 수 있었던 그 자체가 너무 좋았다. 물론 좋은 것은 나눌수록 배가 되기 때문에 동행이 있으면 더 재밌을 순 있겠다 싶다. 하지만 혼자로도 충분하다. 세상에 보고 느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여행을 떠나서 겨우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누가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든지 혼자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는 당신은 언제나 멋있다는 걸 꼭 알았으면 좋겠다.
2019.11.27 ~ 2019.12.09
'이제현'님의 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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