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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Jan 06. 2021

회사가 나의 전문성을 바라긴 할까

커리어와는 아무 관련 없는 일을 해야 할 때


 새해 업무 분장을 위해 팀원들이 모두 모인 첫 회의. 올해 우리 팀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 것이며 각 업무의 담당자는 누구인지 팀장님이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대체 내게는 어떤 일을 주시려는 걸까. 당연히 내가 속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던 A파트에 내 이름은 없었다. 팀장님은 내게, 해본 적도 없고 그간 했던 업무와 연관성도 없는 B파트의 일을 주었다.


 그간 쌓아온 나의 커리어는 A파트의 업무를 수행하는데 적합한 것이었다. 그건 팀장님도 알고 팀원들도 알았다. 그런데 내게 왜 B파트의 일을 맡기려는 걸까. 그 두 일은 마치 철도를 놓는 일과 바닷속에 들어가 조개를 캐 오는 일처럼 100% 다른 영역의 일이었다. 그간 철도를 놓으며 쌓아온 경험과 경력이 모두 리셋된 채 바다 위 조각배에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 팀장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새해 첫 출근부터 면담을 요청하는 팀원'이라는 타이틀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보다 팀의 틀을 잡고 있는 초반에 말씀드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팀장님. 업무 경험이나 커리어를 생각해 봤을 때 저는 말씀하신 B파트의 일보다는 A파트의 일을 해야 우리 팀의 성과에 더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성과도 내고 싶고 그간 해왔던 업무의 끈을 놓고 싶지도 않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서도 혹시나 불쾌하실까 무척이나 눈치가 보였다. 회사에서 내 커리어를 지키기 위한 용기를 내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이었나.




커리어 : 어떤 분야에서 겪어 온 일이나 쌓아 온 경험
(네이버 국어사전)


 단어의 의미는 과거형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미래 시제와 함께 더 많이 사용되는 말. "커리어를 어떻게 쌓아갈 것인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봤을 주제다. 그동안에는 어떤 분야의 일을 오래 하면, 그래서 커리어가 쌓이면 전문가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회사에서도 그런 것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 몇 년을 지나면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너무도 철저히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도록 만들어진 회사는, 어쩌면 더 이상 개인으로써의 전문가는 필요로 하지 않는 것만 같다. 축구에서 개인의 역량보다 조직력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점차 사라진 판타지 스타 같은 느낌이랄까. 전문가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시스템에 빈 곳만 없게 메워도 일은 된다. '나 아니면 안 돼'는 사라지고 '나 하나쯤이야'가 되어버린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고집하는 것은 그만큼 더 어려워졌다.


 나라는 직원의 무게감이 '너 하나쯤'으로 취급받는 상황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시스템 상 그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 사람을 빼서 나로 채워달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기존 인력을 그대로 둔 채 나까지 투입되는 경우는 정말 흔치 않다.) 회사 입장에서는 나를 그 자리에 투입함으로써 기존의 시스템보다 더 나은 성과가 예상되어야 이 요구를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을 다른 자리에 배치해야 하므로 그에 대한 케어도 병행해야 하니 이 수고를 감수할 만큼의 성과가 나와야 한다. 즉, 어떤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면 열심히가 아니라 잘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지간히 잘해선 회사의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다. 평가도 지속적으로 좋았고, 한 분야에서 꾸준히 일해오신 한 선배님이 큰 프로젝트를 맡게 된 적이 있었다. 워낙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기획만으로도 3달 가까이가 걸렸지만, 그 선배님은 중요한 일을 맡게 되었다는 생각 해 퇴근도 제때 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매진했다.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올라간 기획 보고. CEO는 그 선배가 준비한 보고를 흡족하게 듣고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고 한다.

"좋네, 고생했어. 그런데 프로젝트 PM은 외부에서 전문가를 영입해 와서 시키지."

 자신이 십몇 년간 일해왔던 분야에 대한 프로젝트였지만 그 선배는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선배는 회사에 계속 다녀봐야 자기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외부 전문가의 보조 역할만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회사가 시키는 다른 엄한 분야의 일이나 하다가 끝날 것 같다며 퇴사했다. 퇴사한 선배는 회사에서 하던 일과는 다른 분야의 일을 하게 되었고, 외부에서 전문가를 영입해 와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이런 일들을 몇 차례 보고 나니 회사에서의 커리어가 어떤 의미가 있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문가가 되기도 어렵지만 어차피 회사는 전문가가 필요하면 외부에서 사 오면 된다고 생각하는 조직이다. 그렇다면 이 회사에 계속 다니려는 직원의 마인드로는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다'가 아니라 '주어진 일을 다 잘 해내겠다'가 더 바람직한 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B 파트가 아니라 A파트의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전문성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고용 환경이 바뀌고 일하는 방식이 변하면서 평생직장이란 말은 이미 옛날에 사라진 마당에 조금의 전문성도 없다면 자의든 타의든 회사에서 나가게 되었을 때 먹고살 일이 막막해질 테니, 해왔던 일을 기반으로 전문성을 쌓아두고 싶은 것이다. 인디펜던트 워커라는 말도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지 않나. 회사는 당장 떨어진 일을 잘 해내는 직원을 원하겠지만 나는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껏 용기를 냈지만 팀장님과의 면담은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팀장님은 여러 이야기를 하며 내게 그 일을 맡긴 이유를 납득시키려 했지만 아쉽게도 내겐 그 말이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다. 그러니 네가 좀 해줘야겠다."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결국 마무리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로 끝나버렸고, 그때까진 별수 없이 B 파트의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간의 나였다면 애초에 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거나 (까라면 까야지...) 한번 말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거기에서 만족하고 (난 할 만큼 했어...) 그만이었을 것이다. 용기를 낸 것만으로 만족했겠지만 이번엔 그것만으론 만족스럽지 않다. 받아들여질지는 알 수 없지만 A 파트의 일을 하고 싶다고 계속 이야기해야 할 것이고, 그러면서도 맡겨진 B 파트의 일은 또 어찌어찌 해 내야겠지. B 파트의 일만으로 하루가 다 간다면, A 파트와 연관된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것은 퇴근 후에 온전히 개인의 노력으로 해내야 하는 걸까.


 회사를 다니다 보니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어렵지만 '하고 싶은 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올해는 좀 평화롭길 바랐는데. 올해도 만만치 않은 한 해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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