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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Jan 01. 2021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른이...는 아닙니다

내 To-Do list는 왜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는걸까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플래너를 열었다. 올해를 함께한 플래너에는 언젠간 해야지. 해야 되는데?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적어뒀던 계획과 목표들이 가득했다.


 그것들은 이를테면 날것이었다. 구체화 같은건 전혀 되지 않은 단순 list-up. 손톱 자르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와 새 노트북 사기, 1페이지 이상 글쓰기가 같은 레벨로 나열되어 있는 할일들의 집합. 계획을 세워가며 살아보자고 쓰는 플래너이건만 메모장이나 포스트-잇 이상으로 활용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백하건데 내겐 병이 있다. 어지간한 일들은 다 기록해둬야 안심하는 병이다. 사소한 일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두고, 해야 할 일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적는다.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적고, 섬세하고 디테일한 아날로그맨이고 싶어 여러 생각들을 또 적는다. 이렇게 한 페이지에 가득 적힌 오늘의 할일들을 보며 무언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실제로 그날 밤에 보면 손톱 자르기나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처럼 상대적으로 쉽고 금방 끝나는 일들 앞에만 V표시가 되어 있겠지만, 이런 것들은 무시하고 한 일의 개수에서 만족을 찾는다. 와, 오늘 할 일 중에 5개나 했네? 이정도면 오늘도 열심히 살았다. 오늘은 이만 쉬어야지.


 단순한 것들만 늘어놓고 v표시 하는 행위에 만족을 느끼는, To-Do list를 잘못 사용하는 전형적인 예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해야 할 일들이 막 쌓여서 여러개가 되면 어떤 순서로 해야 하나요?"

 신입사원 연수에서 누군가 했던 질문. 당시 지도 선배는 아주 좋은 질문을 했다며 - 그가 소속되어 있던 조에 추가 점수를 주고 - 이렇게 답했다.

"일을 얼마나 중요한가, 얼마나 급한가의 2가지 기준으로 구분해 보면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어느정도 정리가 될겁니다.

- 중요하면서 급한 일

- 중요하지만 급하지는 않은 일

- 중요하진 않지만 급한 일

-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일

이렇게요."


 스승의 말에 깨닳음을 얻은 신입사원은 그 가르침을 몇번이나 되새겼다. 실제 현업에서는 상사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일인가 (그런데 그 상사의 휴가가 예정되어 있진 않는가), 유관부서와 사전 협의가 필요한 일인가 (그 부서에게는 나의 일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면? ), 보고가 갑자기 잡혔는가? 그래서 팀장님이 "이거 내일까지좀 부탁해."라고 얘기하고 먼저 퇴근했는가?! 등의 다양한 변수가 얼마든지 더 있지만, 어쨌든 그 날의 배움은 아직도 일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으로 유용하게 활용중이다.


 회사 일은 이렇게 체계적으로 고민하면서 하는데 내 개인적인 일들은 왜 저렇듯 단순하게 했던 걸까.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일단 귀찮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했던 것처럼 일정을 짜고 그 일정에 맞춰 일을 해내는 것은 무척이나 귀찮고 힘들다. 퇴근하면서 한껏 나태해진 마음으로 이런 귀찮고 힘든 일을 할 수 있을리 만무하다.

 게다가 해내지 못한다고 해도 아무런 페널티가 없다. 상사가 지적하길 하나 일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난받기를 하나. 그렇다고 급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나중의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거나 어쩌면 뭔가 좋지 못한 영향이 갈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므로 크게 관심도 없다. 그냥 스스로 드는 자괴감만 적당히 버텨내면 된다.

  그러다 보니 해야 할 일을 정리할 때도 마감 시간 같은 것은 정해두지 않는다. 일단 적어둔걸 보면 내가 찔려서라도 하겠지? 어림없는 소리. 미래의 나도 지금의 나처럼 호락호락한 녀석이 아니므로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마감이 정해지지도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의 노는 시간을 가져다 쓸리가 없지.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보일테니 가급적 금방 할 수 있는 일 위주로 몇개만 하고, 이정도면 열심히 살았다고 자기 합리화.


아, 내 플래너가 왜 그렇게 쓰였는지 이제야 명확해졌다.




 새해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니 스스로에게 보상과 벌칙을 주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내가 받으면 좋아할 보상이, 싫어할 벌칙이 있을까? 있다 해도 나는 분명 스스로와 타협해서 이정도면 훌륭하니 상을 주자거나 이정도면 할만큼 했으니 벌칙은 면제해 주자고 할 텐데. 대체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어떤 보상이나 벌칙을 어떻게 주는 걸까 궁금다. (댓글로 지혜를 나눠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무튼 보상이나 벌칙을 주는 방법을 바로 적용하긴 어려울 것 같고, 우선 해야 할 일들을 디테일하게 쪼개보기로 했다. 단순히 브런치에 올릴 글 쓰기 가 아니라 회사에서 느낀 점을 주제로 1페이지 이상 써보기, 브런치에 업로드 하기가 아니라 일주일에 한번 이상 업로드하기처럼 디테일하게 쪼개가다 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새로 한 결심을 얼마나 오래 유지할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 보기로 한다. 그런게 새해의 맛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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