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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Feb 14. 2021

선배학 개론

 다음 주부터 팀 후배 A와 새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서비스를 만드는 일인데 막상 업무지시를 받고 나니 걱정이 앞섰다.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나 하는 고민 반, 이제 본격적으로 선배노릇을 해야 하는구나 하는 부담감 반. 내가 누군가의 선배 노릇을 해본 적이 있던가. 학창 시절의 선후배 관계라고 해 봐야 같이 어울려 노는 동네 형 동생 같은 사이였고, 계급이 권위를 만들어 주는 군대에서는 선배보다는 선임에 가까웠으니 제대로 선배가 되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선배. 같은 분야에서 지위나 나이, 학예 따위가 자기보다 많거나 앞선 사람. (이상 네이버 어학사전)


 사전적 정의로만 보면 나는 분명 A의 선배다. 직급도 높고 나이도 많고 경력도 오래되었으니까. 이렇게 따지면 선배를 해 보는 것이 처음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를 처음 해보는 것 같고, 선배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부담스러운 이유는 선배라는 단어에 담긴 - 사전적 의미를 넘어서는 - 기대와 소망, 바람이나 사회적 시선 같은 것 때문일 것이다.

 이 기대와 소망 같은 불명확한 것들은 다움 이나 다운 같은 말과 만나 실체를 갖는다. 선배 다움, 선배다운 선배라는 말속의 '선배'는 더 이상 사전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후배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땐 친절하게 알려주고, 곤경에 처한 후배를 보면 문제를 잘 해결해 주고, 자기의 성장뿐 아니라 후배의 성장도 함께 신경 써줘야 하며, 때로는 리더로서의 덕목과 역할을 해내기도 하는 사람 같이 훌륭한 이를 칭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며 선배로서의 역할을 요구받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데 나는 이것이 무척이나 부담스럽다. 선배 행세를 하는 이가 있다면 후배 역할을 해주는 누군가도 있기 마련인데 그 후배가 나보다 나은 사람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 - 사전적 의미의 - 선배로 보고 있으니 "부족한 제가 선배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해봐야 듣지 않고, 그렇다고 나보다 뛰어난 후배를 위해 선배로서 무언가를 해 줄 수도 없는 곤란한 상황. 지금까지는 적당한 좋은 말로 어찌어찌 잘 회피해 왔지만 이번은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런 곤란한 상황은 앞으로 더 자주 찾아올 것이다.

 내가 A에게 좋은 선배가 될 수 있을까. A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선배라는 단어에 담긴 기대와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제 앞가림도 못하고 헤매는 꼴을 보면 단기간에 그런 사람이 되는 것도 요원해 보인다. 심지어 A는 나보다 더 뛰어난 친구다. 예전에 같은 팀이었을 때도 일을 참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2년 만에 만난 지금은 그때보다도 실력이 더 깊어져 있었다. 상대가 하는 말의 의도와 의미를 100% 이해하고, 아이디어가 넘쳐 좋은 의견을 쏟아내는 데다가 적극적이고 손까지 빠르다. 심지어 올해부터 이 부서에서 근무하게 된 나와는 달리 A는 작년부터 이 조직에 있어서 경험마저도 나보다 많은 상황. 딱히 적은 아니지만 지피지기(知彼知己) 하면 할수록 진지하게 걱정이 되었다. 괜히 어설픈 선배노릇 해서 꼰대 소리 듣거나 무시당하면서 기존에 좋았던 사이마저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하는 걱정. 


 그래서 A에게 어떠어떠한 선배가 되어야지, 같은 생각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지금처럼 일을 하다 보면 나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A도 뭔가를 느끼지 않을까. 좋은 모습이 있다면 보고 배울 테고 좋지 못한 모습이 있다면 반면교사로 삼겠지. 누군가 바라는 선배상을 파악해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해 주기에는 내 역량이 너무나도 부족해 어쩔 수 없다. 나는 그저 맡은 바를 잘 해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해내기에도 벅차다.

 자기 타협과 변명 일색인 결론을 내고 나니 괜히 미안해졌다. A뿐 아니라 그간 함께 일했던 선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선배가 된다는 건 어쩌면 선배들의 고마움을 알아가는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내일은 신입 사원이던 나를 챙겨주던 사수에게 연락드려 봐야겠다. 부족한 후배 이것저것 알려줘서 무척이나 고마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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