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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May 03. 2021

종이와 펜을 찾는 이유

에세이 |

 노트를 한 권 다 썼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1장이 남았지만 이 글을 쓰면서 그 한 장도 실시간으로 채워지고 있으므로 정말로 다 쓴 것이나 다름없다. 이 노트를 쓰기 시작한 것이 올해 초부터였으니 노트 한 권을 쓰는데 대략 넉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다. 한 페이지도 찢어내거나 남겨두지 않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가득 채운 것이 얼마만이었던가. 마치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무척 뿌듯했다.


 기념 삼아 뒤적여본 노트엔 참 많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적어둔 요약정리가 있는가 하면 전화 통화를 하면서 받아 적었을 업무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도 했다. 대부분은 줄을 맞춰 썼지만 어떤 페이지에서는 줄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로이 휘갈겨 쓰기도 했다. 이런 다양한 흔적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쓰다가 만 글들이었다.


 뭔가를 쓰고 싶어 질 때면 나는 보통 종이와 펜을 찾는다.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것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어째서인지 첫 시작은 보통 종이 위에서 하게 된다. 용케도 마무리까지 지어 초고의 형태로 살아남는 글들이 있기도 하지만 쓰다 지치거나 막혀서 중간에 포기하거나 컴퓨터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종이와 펜을 찾는 걸까.


 첫 번째는 워드프로세서의 커서 때문이다. 혹자는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한다지만 내겐 해당되지 않는 얘기다. 실행할 때부터 종료할 때까지 하염없이 깜빡이는 커서를 보고 있자면 어째서인지 나를 재촉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냐며 원샷을 재촉하던 술자리의 그 노래 같달까. 화면에 아무것도 적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조바심은 더 커진다. 언젠가 마감에 쫓겨 반드시 일정 안에 글을 써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그때는 커서의 깜빡임에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깜빡임 없는 종이가 주는 마음의 평화가 조금 더 좋다.

 두 번째는 단순한 자기만족 때문이다. 부족하지만 이 노트를 다 채울 정도로 쓰다 보면 내 글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쓰다가 만 것들 투성이지만 이만큼이나 쌓인 것을 보면 그래도 내가 열심히 쓰고 있구나 하는 만족. 무언가의 시작부터 끝을 보았다는, 마침내 끝내고 말았다는데서 오는 성취감과 즐거움, 뭐 그런 것들.

 그리고 마지막. 종이에 쓰면 생각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컴퓨터로 쓰다 보면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바로 화면 위로 옮겨지면서 간혹 정리되지 못한 생각들이 쓰이는 경우가 있다. 아직 이 문장을 쓰고 있는데 생각은 벌써 다음 문장에 가 있고, 그다음 문단에 가 있어서 정신을 차려보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게 되는 경우. 반면에 종이에 쓸 때는 쓰는 속도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한 문장을 쓰는 동안에는 그 문장에 대해 좀 더 생각하게 되므로 이런 일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그리고 결국에는 써둔 글을 보면서 PC로 옮겨 적어야 하므로,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퇴고를 한번 더 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나처럼 퇴고를 힘들어하는 이에게는 꽤나 유용한 방법이다. 


 굳이 이유를 생각해 보긴 했지만 사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컴퓨터를 켜기보다 종이와 펜을 먼저 꺼내는 것은 그냥 습관이나 다름없다. 1, 2, 3 중에 오늘은 특히 3번의 이유로 종이에 써야겠군! 하면서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는 것이 중요할까. 그냥 그 순간에 내키는 대로 하든, 손에 잡히는 대로 하든 쓴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집에 잔뜩 쌓여 있는 펜과 노트, 이면지를 그냥 버리기 아까워 미련스럽게 고집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짜로 진짜고 정말로 정말이다. 


진짜로... 정말이다... 


진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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