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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 text Dec 17. 2020

내 다리를 긁자

Intro.

 할 일이 잔뜩 적힌 To-Do 리스트를 열어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년 사업계획 정하기, 이 사업계획에 맞는 신규 아이템 발굴, 내년의 목표 매출과 그 달성 방안, 올해 진행한 업무의 실적 및 개선점 정리... 온통 생각하고 기획하고 정리해야 하는 것들. 무엇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다.

 이걸 대체 언제 다 하나 생각하다 보니 문득 억울했다. 내 인생도 이렇게 열심히 고민해본 적이 없는데 회사 일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 백날 고민해서 제출해 봐야 어차피 윗분들 입맛에 맞게 수정된 뒤에 그냥 목표로 할당될 텐데 내가 고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해봐야 받는 월급은 똑같은데!

 어렸을 적 어머니는 내게 종종 "다른 사람 다리 긁어주지 말고 네 다리나 잘 긁으"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제 할 일은 안 챙기고 여기저기 오지랖을 부리고 다니는 모습이 답답해 보였던 모양이다. 이 갑갑한 To-Do 리스트를 보고 어머니의 그 말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얼마 전에 “회사를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해보고 익힐 수 있는 튼튼한 울타리’로 생각하라”는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개인 사업을 하기 전에 시장분석을 하는 기회로 삼으라던가 리더가 되기 전에 리더 연습을 하는 기회로 삼으라던가 기르고 싶은 역량이 있으면 회사의 교육 프로그램을 이용하라던가 하라는 말이었는데, 결국 요약하자면 단순히 내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에 대한 봉급을 받는다고 끝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회사를 더 이용해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통장에 찍히는 급여를 높일 수 없다면 이렇게 다른 방법으로 회사를 활용하는 것이 연봉을 높이는 효과가 되지 않겠냐는 글의 마지막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회사를 이용해서 스스로가 성장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거잖아!


 세상은 한해 한해 정말 빠른 속도로 변한다. 최근엔 코로나 때문에, 그 전에는 금융 위기 때문에, 그보다도 전에는 IMF 때문에. 그리고 그 전에는 이유가 뭐였든 세상은 계속 변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그리고 회사는 이런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정말 많은 것들을 한다. 지금 잘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신사업을 발굴해 미래를 준비하고, 바뀐 세상에 맞는 형태로 기존 사업이나 조직을 개편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 사회공헌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수익 창출도 놓칠 수 없다. 이 거대한 조직도 살아남기 위해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다. 그런데 나는?

 회사 돈을 쓸 는 투자 타당성 검토부터 비용 심의까지 온갖 검토를 하면서 정작 내 돈을 쓸 때는 큰 생각 없이 카드를 긁고, 회사가 내년, 3년, 5년 후 무엇을 해야 할지는 열심히 고민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이번 주말에 뭘 할지 조차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럴 수가!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내 다리가 아니라 회사 다리만 실컷 긁어주고 있던 셈이었다.

 그래서 앞으로는, 회사에서 하는 고민은 나를 위해서도 한번 해보기로 했다. 회사가 내년 계획을 짜면 나도 내 삶의 내년 계획을 짜 보고, 회사에서 새 아이템을 발굴하라고 하면 나도 회사 다니는 것 말고 따로 먹고살만한 새 아이템이 없을까 고민해보고. 회사에서 하는 일은 대부분 나보다도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 오랜 기간 동안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낸 것들이니 이것만 잘 따라 해도 내 삶에 꽤나 도움이 되지 않을까?

 더 이상 회사의 다리만 긁어주다 피곤해서 잠드는 밤은 사양이다. 긁어야 할 것은 남의 다리가 아니라 내 다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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