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이 공산주의 당원 출신이라고?
우리가 자주 쓰는 말 중에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가 있다. 눈에 거슬리는 행동만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 중립적인 상태로 지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마 이 말을 가장 많이 쓰는 곳은 군대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정치에서는 선명성이 중요하다. 따라서, 중도는 우유부단의 상징이고, '회색분자'라고 비판받는다. 오랫동안 중도 성향을 표방한 정치인은 표결을 위해 다수가 필요한 상황에서나 귀한 대접을 받고,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강경파 정치인과 지지자들에게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정치의 영역에서 중도는 매우 서러운 존재다.
지금에만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민주주의가 결합된 정치 방식이 출현한 해방 이후에도 중도는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좌우 대립이 극에 달한 1946년 초부터 중도 정치인을 향한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고, 어떤 정치인은 암살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서슬 퍼런 군사 정권 시절보다 더 무서운 분위기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 정치인들은 소신을 지키며 정치 활동을 지속했다. 중도 우파의 우사 김규식(1881~1950, 커버 사진 제일 왼쪽)이, 중도 좌파에는 몽양 여운형(1886~1947, 커버 사진 제일 오른쪽)이 대표적이다. 과연 이들은 어떤 식으로 중도의 입장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일까? 중도는 우유부단하기만 한 존재인가? 이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진정한 중도의 가치는 과연 무엇인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이번 글에서는 중도를 대표하는 김규식의 일생을 통해 진정한 중도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필자의 선입견일 수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김규식이라는 이름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파리강화회의 대표 자격으로 참석한 것 이외에는 대중에게 알려진 사실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김규식이 보여준 의외의 행적에 대해 긴 시간 동안 고민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김규식의 일생을 소개함과 동시에 필자의 깨달음을 문자로 표현하는 과정이자 헌정문이다.
김규식은 1881년에 부산 동래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강원도 홍천인데, 아버지 김지성이 동래부 관리로 있어 동래 출생으로 되어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 체결로 부산항이 개항되었다. 조약에 따라 일본 상인은 정해진 구역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구역을 벗어나 내륙까지 진출하며 경제적인 침투를 이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김규식의 아버지는 조정에 이를 막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조정은 오히려 귀양을 보냈다. 설상가상 어머니까지 돌아가시자 김규식은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딱한 사정의 어린 김규식을 거둬준 사람은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 밑에서 김규식은 빠르게 영어를 습득했고, 미국 문화를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후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에 가입하면서 독립신문사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 한 번도 조선 밖을 나가본 적 없었지만, 이미 미국에 적응할 준비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17세에 유학길에 올라 미국 버지니아주의 로녹 대학에 입학해서 영어와 역사를 전공했다. 또한, 언어 실력이 출중해서 무려 8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06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는 언더우드 목사를 도와 새문안교회에서 교육 사업을 맡았다. 이때부터 김규식은 교육 사업에 큰 열정을 보였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1910년 일제가 기독교계 인사를 중심으로 조직한 단체 신민회를 탈탈 털기 시작하면서 기독교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진 것이다.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과 안악 사건 등으로 발각된 것이 문제였다. 이로 인해 많은 기독교계 인사들이 해외로 망명했다. 김규식도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는 조소앙, 신규식, 신채호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동제사'가 조직되었다. 여기서 김규식은 독립운동가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인 1914년에는 독일계 기계 생산 업체인 앤더슨 마이어에 입사했고, 몽골로 발령이 났다. 몽골에서 김규식은 동북지방에 땅을 구입해 군사학교를 운영하려고 했다. 교육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엿보인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처리를 위해 승전국들이 파리에서 강화회담을 진행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선인 독립운동가들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국, 러시아, 미국과 소통이 원활했던 여운형은 곧바로 미국에 "우리도 대표를 파견할 수 있게 해 달라."라는 전보를 보냈다. 국제적인 인맥을 보유하고 있었던 김규식과 신규식 역시 파리에 갈 수 있도록 지인들과 접촉했고, 1919년 1월에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이러한 치밀한 준비의 결과, 2월에 김규식은 파리로 떠날 수 있었다. 파리에서 김규식은 동제사 그룹이 발전한 단체인 신한청년당 소속으로 활동하다, 같은 해 4월 13일,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면서 정부를 대표하게 되었다. 명실상부 '정부'의 일원이 되어, 이제는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외교독립노선을 견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1919년 6월 말, 파리강화회의가 마무리되었다. 치열한 외교 활동을 벌였으나 김규식과 임시정부는 큰 성과를 얻을 수 없었다. 일본이 지속적으로 한국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윌슨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역시 승전국 일본의 식민지인 조선에는 적용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외교가 아닌 무장투쟁으로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임시정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21년, 대통령 이승만이 미국이 한반도를 대신 통치해달라는 <위임통치청원서>를 썼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무장투쟁을 지지하는 임정 요인들은 자격이 없는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김규식은 분란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이승만이 분란의 책임을 지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임시정부에서의 모든 직책을 내려놓고 다시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김규식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다름 아닌 소련(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1922년에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극동노력자대회)였다. 저번 글에서 언급했던 홍범도가 참여한 그 회의다. 여기서 그는 무려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 파)* 당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10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김규식은 대표 자격으로 『공산 평론』이라는 잡지에 글을 하나 투고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한국, 중국, 소련이 연합할 필요성을 강조했고,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는 믿을 수 없으니 좌·우파가 이념에 상관없이 대단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려공산당에는 크게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있다. 홍범도가 겪은 자유시 참변에도 이 내용이 나오는데, 이에 관한 해설은 「고려공산당을 알아보자」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지금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김규식의 1922년 공산당 활동에 대한 분석을 내놨다. 먼저, 민족자결주의 문제 때문에 미국에 대한 인식이 배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투고한 글에서 미국을 비판한 내용을 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다른 연구자들은 이승만과 틀어진 관계에 주목한다. 파리강화회의 종료 이후, 김규식은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 미국에서 잠시 활동했다. 이 시기 이승만은 하와이의 한인들, 상해 임시정부 본부와 관계가 틀어지면서까지 자신의 활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실망한 김규식이 상해에서 이승만의 탄핵을 주장하면서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시기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모스크바로 간 것은 이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필자는 여러 정황을 고려해 얻은 다음의 분석을 덧붙여 본다. 김규식의 모스크바 행(行)에는 오랜 동지인 여운형의 역할이 컸고, 모스크바 외교의 목표는 결국 좌우합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살펴보겠지만, 여운형과 김규식은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았고, 이로 인해 1920년대까지 겹치는 활동들이 많았다. 앞서 언급한 파리강화회의 파견을 여운형이 주도했다는 점도 그 예가 될 것이다. 김규식이 상해파가 아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당원이 된 점도 여운형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추정한다. 국제정세에 대한 눈이 밝았기 때문에 독립을 위해서는 이념에 상관없이 소련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유연한 태도는 파리강화회의 대표 시절 프랑스 사회주의 그룹과 베트남 출신 호찌민과 맺은 깊은 유대 관계에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여운형과의 관계만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은 심증이라는 한계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김규식의 활동은 이념이 아니라 오로지 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입증할 수는 있다.
공산당원으로서 김규식의 활동을 그리 길지 않았다. 레닌 사망 이후 민족주의와의 연대에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김규식은 소련을 나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 일 때문인지 김규식은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라고 말했다는 강원룡 목사의 증언이 있었다. 이 충격으로 상해로 돌아온 김규식은 다시 교편을 잡으며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동시에 좌우합작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1935년 김원봉이 주도한 민족혁명당에도 적극 참여했고, 이후 충칭 임시정부에도 참여해 부주석으로 취임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입장을 고수했다. 김원봉 이야기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에도 김규식은 중도파를 이끌었다. 결정문의 주요 요지는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므로 최대한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신탁통치는 없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좌파의 지지선언과 우파의 반탁을 절충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김규식은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났다. 사실 김규식의 경력 정도면 지도자로 추앙받을 수 있는 위치였지만, 권력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과 만난 김규식이 "형님은 대통령 하시오. 나는 '대통' 담배나 태울 터이니."라고 던진 농담에서 그러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있기에 김규식은 너무도 아까운 사람이었다. 학식이 뛰어나고, 국제 정세에 관한 예리한 판단과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지향점 등 당대에 찾아보기 힘든 융통성을 가진 정치인이었다. 이승만이 남한에라도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정읍 발언(1947)'이 나온 이후로, 미국은 자국이 이승만의 배후라는 오해에서 벗어나고 소련과의 협상 틀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 그 결과, 중도파의 상징인 김규식과 여운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이끌게 되었다. 이후로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김구와 함께 평양으로 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김규식의 인생은 한 마디로 역동적이었다. 정세에 관한 명확한 판단을 가지고 해방 이전에는 독립, 이후에는 통일 정부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필자도 이러한 김규식을 중도의 상징으로 표현하지만, 사실 여기에도 한계가 있다. 중간의 입장과 실용을 넘어선 그 이상의 집념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지는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중도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시간은 김규식이 활동한 1940년대를 지나 2022년이 되었다. 민주주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더 자유롭게 표현하고, 그것을 들어주기를 원한다. 이러한 다원화 사회에서 우리가 갖춰야 할 능력은 하나의 진영에 서서 다른 진영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을 중재하고 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진정한 발전으로는 이어지지 않을까? 김규식을 통해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