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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진씨 Jan 12. 2022

우리가 오해한 역사 속 텍스트(1)

신채호와 끝까지 간다

오해야 오해

독자들께서 한국사 공부를 전문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단재 신채호에 관해서는 잘 아실 것이다. 김원봉을 다루는 필자의 글에서도 잠시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20세기 독립운동가로서 신채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교육과정 속 한국 역사의 흐름에서 신채호를 생각보다 일찍 찾을 수 있다. 바로 1135년, 고려 인종 때 발생한 묘청의 난 혹은 서경 천도 운동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한 그의 논평이 그것이다. 제목은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다. 한 번쯤은 들어보셨으리라 생각된다.


혹시나 친숙하지 않으신 독자들을 위해 설명드리자면, 이 사건은 당시 여진이 세운 금나라의 왕성한 횔동이 고려 내부 정치에 영향을 주면서 시작되었다. 금나라에 사대를 할 것인지, 서경으로 천도할 것인지를 두고 여러 의견으로 나뉘었다. 승려 묘청제자 백수한, 관료 정지상은 서경으로 천도해서 황제국을 자처하면(칭제건원) 금나라도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김부식을 비롯한 다른 관료들은 금과의 사대를 주장하며 천도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 사이에 위치한 윤언이는 금과의 사대, 서경 천도를 모두 반대했다. 이에 답답함을 느낀(?) 묘청은 곧바로 군사를 일으켜 서경을 수도로 하는 '대위국'을 세우는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김부식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토벌대를 조직했고, 1년 동안 묘청과 연관 있는 모든 세력을 정리하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많은 독자들께서는 신채호가 쓴 이 글의 주요 요지를 이렇게 알고 계실 것이다(예전에 필자도 그랬다).


㉠ 묘청이 일으킨 이 사건이 실패로 돌아가 조선이 사대의 노예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 신채호는 묘청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진압한 김부식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제대로 다시 읽어보기

신채호는 역사학자로서 1924년부터 25년까지 동아일보에 「조선사연구초」라는 제목의 논평을 연재했다. 이 논평은 총 6개의 주제로 되어있는데, 그중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을 제일 마지막에 실었다. 신채호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유를 '사대주의'에서 찾았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사대주의가 자리 잡았기 때문에 일본을 만나서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립을 하려면 기대는 행위를 일절 금지하는 대신 민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방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의열단에게 써준 <조선혁명선언>에서 죽이고, 파괴하라는 조언은 그런 신채호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신채호의 생각을 고려하면서(이것도 정말 중요한 포인트다) 본격적으로 이 논평을 통해 신채호의 진의를 샅샅이 파헤쳐보자.


1. 서론(요약)

"조선 근세에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됨이 무슨 사건에 원인함인가. 나는 일언으로 회답하여 가로되, 고려 인종 13년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 한다. (이 사건의) 실상은 낭과 불, 양가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과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와 보수의 싸움이다.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사대주의가 묘청의 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묘청을 사대주의에 대항한 독립당으로 묘사하는 반면 이를 진압한 김부식을 사대당의 대표로 평가하고 있다. 조선이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원인은 결국 김부식과 같은 사대당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서론만 보고 신채호는 묘청을 칭찬, 김부식을 비판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뒤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2. 묘청의 광망(狂妄)한 거동(요약)

예부터 평양 천도는 계속 추진되었으나, 평양으로 천도하면 북쪽에서 적이 침범해왔을 때 도성이 먼저 병화의 요충이 되므로 전국이 난리가 날 것이다. 따라서 당시 평양 천도가 마땅치 않았는데도 칭제북벌론자가 평양 천도를 전제로 함은 비상한 실책이니, 윤언이가 칭제북벌에는 동의하고 평양 천도를 부동의한 것이 과연 탁견이다. … 그러면 어찌하여 묘청을 광망타 하는가. 묘청이 이 같은 행동을 할 것이면 반드시 그 내부가 공고하고 실력을 갖춘 후에야 발표할 것이 아닌가. 묘청의 거병에 정지상과 윤언이가 참여하지 못할뿐더러, 묘청의 제자인 백수한도 내막을 알지 못했다. … 묘청이 비록 그 행동이 광망하였으나, 그 가치는 김부식에 비할 자는 아니다.

독자들께서는 텍스트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궁금하다. 필자는 처음 이 글을 대학에 처음 입학한 후 수강한 전공수업에서 처음 읽고는 머리가 멍해졌던 기억이 난다. 신채호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묘청을 광망 즉, 미쳤다고 묘사한다. 묘청이 금나라에 대한 사대를 반대하는 정지상, 윤언이와 같은 관료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제일 마지막 문장처럼 묘청의 잘못이 김부식의 그것보다는 크지 않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말이다.

이 텍스트를 처음 읽은 필자의 심정은 신봉선 님 못지 않았다 (출처: 중앙일보)


오히려 신채호가 거병이 일어나기 전의 시점에서 칭찬한 사람은 묘청이 아닌 윤언이였다. 윤언이는 별무반을 창설한 윤관의 아들로, 금에 대한 사대는 반대했고, 평양 천도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윤언이가 제대로 된 정세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토벌대가 꾸려진 이후에 윤언이는 토벌대에 반강제로 참여하게 되는데, 신채호는 이 책임 역시 윤언이의 잘못이 아닌 묘청의 실책으로 분석한다.


왜 오해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신채호의 진의를 잘못 알고 있었을까? 묘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서론 부분만을 제시해서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고 싶은 생각에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 한편으로는 서론만 보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적으려고 책을 덮어 버리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가 신채호의 글을 끝까지 읽어볼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닐까. 글쓴이의 진의를 알기 위해서는 원문을 찾아서 읽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텍스트를 잘못 읽어서 발생하는 오류는 이번 사례 말고도  많이 있다. 그중 독자들께서도  아실만한 주제를 한 편 더 연재할 생각이다. 다음 <2> 주제는 이것보다  유명한 텍스트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기대하셔도 좋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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