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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진씨 Jan 09. 2022

대중가요로 읽는 한국사(2)

금지곡을 놓고 벌인 한판승부!

음악도 희생양이 되던 세상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나 있을까? 선율과 가사가 감정을 촉촉하게 적시는 그 느낌을 어찌 포기하란 말인가? 그러나 한때는 이 음악을 포기해야만 했던 시기가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은 한동안 그런 세월을 보내야 했다. 60년대 이전의 한국은 끝이 없는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주요 정치인의 암살, 최대 규모의 전쟁, 온갖 정치 파동을 겪으며 대통령이 시민의 요구에 의해 직을 내려놓는 상황이 발생했다. 정부가 수립된지 12년만에 이런 일들이 다 발생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엄청난 변화의 연속은 60년대에도 이어졌다. 대통령이 하야하고, 이제는 군인들이 세상을 바꿔보겠다며 정치 일선에 등장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과 소장파 영관급 장교들은 병력을 이끌고 서울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성했다. 시민들은 오히려 반겼다. 박정희와 상극 관계인 것으로 잘 알려진 장준하 역시 군사 쿠데타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입장을 표시했다. 정치에 관한 불신은 예나 지금이나 그 차이는 별반 없었던 것 같다. 새정치를 향한 희망을 지금은 군인에게 투영하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가 아닐까.


대중의 인기와 함께 출범한 군사정권은 유독 예능 부분을 통제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1964년에는 방송법이 시행에 따라 각 방송국마다 '방송윤리위원회'를 설치해서 10가지 기준에 맞춘 운영을 해야만 했다. 같은 법 제1장 3조에 보장된 방송의 자유를 '특별한 규정'으로 제약하면서까지 통제를 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인 1967년에는 '음반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었다. 방송이야 심의를 통해서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이제는 음악까지도 통제의 대상에 집어넣은 것이다. TV가 세대별로 보급되지도 않은 시대에 방송 검열은 사실 큰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유일한 낙인 음악을 건드리는 건 선 넘는 일이 아닐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똥 묻은 칼이 아닌 금지곡에도 분명 분노하셨을 것이다


금지곡의 시대

그렇게 해서 1960년대부터 '금지곡의 시대'가 열렸다. <음반의 관한 법률> 제10조에 따라 제시된 기준을 위반한 음반은 열린 공간에서 절대로 틀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 법률은 1991년 폐지되었다.


음반에 관한 법률(1967) 中

제10조  다음에 해당하는 음반은 제작ㆍ배포하거나 불특정다수인이 청취할 수 있는 장소에서 사용할 수 없다.

1. 국헌을 문란하게 하거나 직접ㆍ간접으로 대한민국의 국위를 손상하는 음반

2. 미풍양속을 심히 해할 염려가 있는 음반



두 항목을 읽어본 필자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너무 애매하다."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것이 핵심이었다. 가사, 선율 등 노래의 내적인 요소만이 아니라 검열 담당자가 보기에 수틀리는 부분이 생기면 언제든지 금지곡으로 지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해야 효율적인 통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말하면, 관리자는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편하고, 대상자는 기준이 없으니 덜덜 떨 수밖에 없다. 과연 서슬퍼런 군사정권답다.


대표적인 금지곡 두 곡을 살펴보자. 송창식이 1975년에 발표한 <왜 불러>는 노래는 장발 단속을 피해 도망가는 남자가 쫓아오는 경찰을 향해 "왜 불러!"라고 외치는 장면에 삽입되어서 금지곡이 되었다. 공권력을 무시했으니 1번 기준에 따라 국위를 손상한 것이다. 1973년 조영남이 발표한 <불 꺼진 창>은 2번 기준을 위반했다. 불 꺼진 그 시간대를 묘사한 것 자체가 미풍양속을 해한 것과 다름 없었다. 이보다 훨씬 많은 노래가 가사가 저속하다, 이적 단체(북한) 찬양, 선율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이 정도면 노래를 만들지 마라는 거 아닌지..


나 이런 게 좋아하네

희대의 히트곡이라면 정권이 탄압한 금지곡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탄압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 노래를 좋아했을 것이다. 대표적인 노래가 1964년 발표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헤일 수 없이 수 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트로트하면 떠오르는 대표곡으로, 1960년대에 앨범이 무려 100만장 이상이 팔렸다. 그 당시에도 전국민의 애창곡이었던 이 노래가 금지곡이 된 사연은 무엇일까.


박정희 정권은 출범 이후 이승만 정권이 보여왔던 반일(反日) 기조를 유지했었지만, 이를 뒤집고 한일기본협정을 체결하기로 한다. 대학생을 비롯한 시민층에서 굴욕적인 협상을 중단하라는 크게 반대하기 시작했다(6·3 항쟁). 이러한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화살은 엉뚱하게 이미자에게 날아갔다. "왜색이 너무 강해서" <동백아가씨>가 방송윤리위원회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된 것이다.** 애매한 기준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 노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금지곡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 물론 금지곡이 된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학계에서는 일본과의 관계 그리고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했다는 점을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그런데 이 노래. 박정희 대통령의 애창곡으로 매우 유명한 노래다. 공식 석상에서 들을 수 없었던 이 노래는 1979년 박정희와 일본 총리가 같이 참여한 청와대(!) 행사에서 다시 흘러나올 수 있었다. 금단의 공간에서 금단의 노래가 나온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노래하면 빠질 수 없는 그 역시 <동백아가씨>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이쯤되면, 불멸의 히트곡을 독차지 하기 위해 금지곡으로 지정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음반에 관한 법률>과 금지곡 속에서 사람이 관리하는 한 제대로 된 통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현재의 음악과 시대상

이 글은 음악적 소양이 그렇게 깊지 않은 필자의 한계로 인해 2부작으로 마무리지으려 한다. 음악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평론가 임진모 님께 질문하는 것이 더 양질의 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어쨌든 두 시대를 살펴본 것이 전부지만, 음악에서도 한국 역사를 생각해볼 수 있는 시사점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느낀 감정, 생활상을 알 수 있고, 어떤 배경에서 이 노래들이 발표되고 억압당했는지도 추론해볼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이 만드는 음악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기 저기에서 치이며 역사의 흐름을 같이 해왔다.


마지막으로 독자들께서 생각해보시면 좋을 것 같은 시사점을 던져보고 싶다. 이번 주제를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발표된 노래는 시대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필자는 DEAN의 <Instagrm>이 바로 떠오른다. 스마트폰 때문에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현대인, SNS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심리 등 현대의 시대상을 제대로 반영한 노래가 아닐까? 어쩌면 2200년대의 박물관에서는 DEAN의 음반 커버 사진을 볼 수 있지는 않을까? 독자들께서는 어떤 노래가 떠오르시는지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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