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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진씨 Jan 18. 2022

고려공산당을 알아보자

남긴 것은 많지만 실패한 단체

* 이 글은 「중도의 가치」, 「홍범도가 논란이 된 EU」와 같이 읽으면 더 좋습니다.


고려공산당을 왜 알아야 할까

김두한: "공산당 할 거야, 안 할 거야!"
심영: "안 하겠소! 닷씨는 안 하겠소!"
이번 글의 주제와는 큰 관련은 없는 심영 (출처 SBS)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상하이 조의 총알을 맞고 신체의 일부를 훼손당한 연극배우 심영. 그는 공산주의자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백병원에서 김두한의 일격(!)에 전향서를 쓰게 된다. 물론 나중에 친일파로 밝혀졌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공산당'은 오랜 기간 금기어였다. 해방 후의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공산주의는 최대의 적이 되었다. 잘못된 마음만 먹었어도 잡아가는 시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최근에도 인식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술게임 중 하나인 '공산당'을 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잡혀가지는 않으니 그나마 나은 것 같다.


그런데 한국의 독립운동사 속에서는 공산주의를 조금은 다른 시각을 가지고 관심있게 볼 필요가 있다. 필자도 이전에는 굳이 공산당의 변천사를 알아야 하는지 의문이었는데, 2020년 『조선공산당 평전』을 읽어본 후에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특히 1920년대 초의 고려공산당 이야기를 빼면 국내외 독립운동사를 매끄럽게 이해하기가 힘들다. <논란과 논쟁 속의 한국사> 시리즈 속의 김원봉, 김규식, 홍범도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독자들께 익숙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필자에게도 그렇다), 필자의 이전 글을 이해하거나 독립운동사 전체를 이해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으므로 이번 기회에 독자들께 짧게만 소개해드리려고 한다.


여기서 잠깐! 필자는 1920년대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지금의 공산주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시기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대립은 없었다. 독립운동가들 역시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한 것임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공산주의 그룹의 출현

1917년 2월 혁명으로 러시아에서는 왕정을 뒤엎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정치 구조는 크게 왕정(짜르·보수) 세력, 임시정부(맨셰비키·온건), 소비에트(급진)로 구분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을 보인 임시정부는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것은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살고 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온건 성향은 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항일적인 성격은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에 반발한 이동휘, 김립, 박진순 등은 같은 해 10월 소비에트 혁명 이후 친(親) 볼셰비키 단체인 '한인사회당' 조직하였다. 최초의 조선인 공산·사회주의 계열 단체였다.


1919년 3·1 운동 이후에는 해외 각 지역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상해 임시정부, 조선의 한성정부, 러시아의 대한국민의회가 그것이다. 한인사회당은 세력의 단일화를 위해서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했으나, 이후 3개 임시정부 통합 과정에서 발생한 분란으로 국민의회가 통합을 거부하자, 국민의회를 이탈하고 상해 통합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지명된 이동휘는 상해로 이동하였고, 1920년에는 상해의 공산주의자 그룹을 이끌던 김만겸, 여운형 등이 참여한 이후 이름을 '한인공산당'으로 바꿨다.


갈등의 소용돌이

언제나 그렇듯이 모두가 한 뜻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러시아 바이칼 호수 근처의 도시 이르쿠츠크에서 또 다른 한인 공산주의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후원을 받고 성립되었는데, 상해에서 한인공산당 조직을 돕던 러시아 정치인 슈미야츠키가 이를 총괄했다. 슈미야츠키는 상해에 연락을 취해 "한인 공산주의 단체를 이르쿠츠크에서 하나로 통합하자."라고 전달했으나 이동휘를 비롯한 상해 공산주의자들은 반발하고, 고려공산당을 따로 창당하였다. 따라서, 한인 공산주의 단체는 두 개로 찢어지고 갈등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학계에서는 구분을 위해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으로 부르기로 약속했다.


사실 두 단체의 사이가 처음부터 안 좋은 것은 아니었다. 1919년 상해로 건너간 이동휘는 박진순을 모스크바로 파견하고 국제공산당 가입을 추진했다. 박진순이 꽤 괜찮은 성과를 내자 상해에 있는 여운형 등의 공산주의자가 상해파에 합류했고, 동시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도 통합을 추진하려고 했었다.


두 단체에 균열이 생긴 것은 다름 아닌  때문이었다. 박진순은 모스크바 외교를 통해 자금을 지원받고, 이 자금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잠시 이르쿠츠크에 들렀다. 문제는 여기서 생겼다. 동양비서부의 승인을 받은 이르쿠츠크파는 자신들만이 유일한 합법 단체라며 그 자금을 뺏아버린 것이다(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 사건). 이에 이동휘는 모스크바에 연락을 취해 상해파에 대한 지원을 다시금 인정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사이가 견원지간(犬猿之間)의 수준으로 멀어지게 되었다.


이 돈 문제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만 멀어진 것이 아니었다. 상해파 내부에서도 갈등이 깊어졌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상해파는 이동휘가 주축인 한인사회당 계열과 여운형 등의 공산주의자 그룹이 섞여있었다. 박진순이 상해로 보낸 자금 모두는 한인사회당 계열에서만 사용했다. 이 문제에서 완전히 소외된 상해 공산주의자 그룹은 결국 1921년에 열릴 극동민족대회를 앞두고 상해파와 결별하고 이르쿠츠크파로 합류하게 되었다. 따라서, 필자는 이전 글 「중도의 가치」에서 김규식이 이 회의 석상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원으로 이름을 올린 것은 이러한 갈등 구조와 여운형과의 관계가 깊이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홍범도가 논란이  EU」를 읽어보면, 이렇게 공산주의 그룹 내부가 역동적으로 돌아가는 1921년에 매우 암울한 사건이 터졌음을   있다. 자유시 참변이 그것이다.  문제 역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 속에서 빚어진 사건이다. 앞서 언급한 극동민족대회 기간에는 한인 공산주의 그룹에게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진정한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국제 대회 속에서 정통성을 인정받아야만 자금만 아니라 한인 공산주의 그룹의 실질적인 주도권을 잡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를 앞두고  그룹 사이의 갈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러시아 자유시(스보보드니)에서  증폭된 갈등이 폭발하고 말았다. 상해파  일리야가 이끄는 사할린부대와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최고려가 이끈 자유대대는 간도에서 넘어온 한인 무장단체를 포함한 군사  지휘권을 가지고 갈등을 빚었다. 모든 것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이르쿠츠크파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결국 자유대대가 사할린부대를 무장해제하면서 이르쿠츠크파의 완승으로 끝나고 주도권을 가져올  있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같은 조선 사람끼리 총부리를 겨눠 서로를 희생시킨 참혹함이었다.


이제 이동휘의 앞길이 매우 불투명해졌다. 이동휘도 상해파의 대표로서 극동민족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야 했는데, 상해에서 모스크바까지 직선으로 가장 빠른 길은 이르쿠츠크를 거치는 일이었다. 사실상 불가능한 경로였다. 이동휘는 중앙아시아를 경유하는,  길지만 안전한 경로를 선택해 거의 폐회 직전이 되어서 도착할  있었다. 그는 코민테른 지휘부를 상대로 짧지만 치밀하게 외교 작전을 구사했고, 가성비(?) 매우 뛰어난 결과를 얻을  있었다.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갈등이 동양비서부의 일방적인 지원으로 발생했다고 보고, 빠른 시일 내에 하나의 고려공산당으로 통합하기 위해 회의를 개최하라고 지시했다. 물밑 작업부터 치밀하게 준비해 독보적 위치를 확보하려고 한  이르쿠츠크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에 따라 1922년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통합 회의가 열렸다. 흐름상 이 회의는 상해파가 주도했고, 이르쿠츠크파는 회의 전부터 순순히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회의가 잘 굴러가기는 만무한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더니, 통합 후 대표자를 선정하는 기준을 놓고 이르쿠츠크파는 격렬하게 반발하며 아예 회의장을 나가버렸다. 이어서 국내에서 활동하는 정재달 등의 조선공산당과 중립 성향의 공산주의 그룹도 이탈하게 되었다. 통합은 없었고, 거대 두 그룹 사이는 이제 남남이 되어버렸다. 또한, 국내의 화요파, ML(레닌주의 청년동맹)파 등 새로운 계파가 등장하면서 공산주의 그룹의 완전한 통합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번져 이들의 꼬리표에는 '파벌 투쟁'만 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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