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조선 후기의 역사 중 가장 공감 가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체로 '실학'을 꼽을 것이다. 조선 전기보다 강한 성리학적 사회 질서에 답답함을 실학은 나름 갈증을 해소해준다. 물론 여기에도 여러 반론이 존재하지만, 탈유교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개혁적 성향의 실학이 매우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고교 교육과정에서 한국사를 접한 독자들이라면, 실학에는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라는 두 갈래가 있다고 알고 계실 것이다. 그중 중상주의 계열은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는 의미에서 북학파라고도 부르며, 대표적인 실학자로 홍대용과 박지원 그리고 박제가를 꼽는다. 특히 북학파가 이러한 기술과 실용성 등의 개혁 성향을 잘 드러낸다.
이번 글에서는 이중에서도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박지원은 우리에게는 나름 친숙한 인물이다. 국어 교과서나 수능·모의고사에서 그가 쓴 「양반전」, 「허생전」, 「호질」과 같은 한문 단편소설이 자주 출제된다. 무능한 양반과 상공업으로 큰돈을 벌어들이는 몰락 양반의 삶 등을 그려내며 조선 후기 사회를 박지원의 시각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체가 깔끔하고, 글에 위트가 철철 넘쳐서 박지원에 관한 연구는 국문학 쪽에서 더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처음에 이 글들이 개별적으로 접했기 때문에 각각 다른 책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 글은 하나의 책에 실려 있었는데, 바로 『열하일기』라는 책이다. 언젠가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이 책에 저 내용들이 다 들어있다니! 필자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꼭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해서 작년 가을에 실행에 옮겼다.
책을 읽은 후기를 먼저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박지원을 오해했나 싶을 정도로 필자의 선입견과 다른 면이 많았다. 역시 한 번도 원문 텍스트를 읽지 않고,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듣고 살아온 결과였다. 지금까지 봐온 것은 박지원의 일부분이었다. "청나라의 것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라는 유명한 문구만을 기억한 나머지 그가 반청(反淸) 사상을 가진 개혁적 인물이라고 알고 있었고, 시대의 속박을 벗어던진 자유인이라는 시각이 필자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서 이러한 기존의 시각에 계속 의문이 남았다. 그래서 이 글을 「우리가 오해한 역사 속 텍스트」 시리즈에 넣어볼까도 고민했지만, 그 내용만 다루기에는 너무 아까운 부분이 많아 단독으로 이 책을 소개해보기로 작정했다.
먼저 어떤 책인지 소개할 필요가 있다. '열하'는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에 위치한 청나라 황제의 피서산장이 위치한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박지원은 1780년(정조 4년) 청나라 황제의 생일 축하하기 위해 정조가 파견한 사신단에 참여해 열하까지 다녀오면서 겪은 여러 일화와 자신의 생각을 날짜 별로 틈틈이 기록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원래 청나라로 가는 사신단은 수도인 연경(베이징)에서 황제를 알현하는데, 마침 여름과 맞물려서 박지원은 열하까지 가보는 독특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조선 18세기 후반 조선을 뜨겁게 달군 여행 에세이가 되기도 했다.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필자가 책을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부분을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1. 첫머리 ‘후삼경자’에 관하여
박지원은 책의 제일 첫머리에서 사신단이 연경으로 떠나는 그 해를 "후삼경자(後三庚子)"라고 표현하였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사망한 시점으로부터 세 번째 경자년이라는 표현을 말한다. 그는 청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에 명 황제의 연호인 ‘숭정’을 쓸 수 없어 표현을 다르게 했다고 말한다.
이 표현은 박지원에 관한 필자의 선입견을 처음부터 완전히 파괴하고 말았다. 청나라의 것이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사람도 그 이전에는 사대부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는 소위 소중화를 거쳐 조선중화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한다. 조선은 명이 멸망한 이후, 자신이 유일한 중화의 계승자라고 자처하면서 명나라 숭정 연호를 사용하거나 대보단·만동묘처럼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따라서 후삼경자 표현의 사용은 박지원 역시 북벌에 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북학파를 탈중화주의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후, 박지원이 열하에 가서 만난 관료층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두드러진다. 조선만이 갖는 4가지 장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박지원은 “유교를 숭상하는 나라”라서 조선이 소중화로 불린 점과 열녀와 효자가 많다는 장점을 내세운다. 덧붙여, 이는 송나라의 문화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 역시 박지원도 양반층으로 마냥 탈중화만을 주장했다고는 보기 어려울 것 같다.
2. 박지원의 이용후생에 관하여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봉황성에 도착한 박지원은 잠시 주막에 들렀다. 그는 여기에서 사용하는 술잔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술잔에 들어가는 술의 양에 따라 10개의 잔으로 나누어 팔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박지원은 이를 보고 “술을 사는 이는 양을 따질 필요가 없다."라는 말로 그 효율성을 매우 칭찬한다. 이러한 칭찬에는 술집의 청결함도 한몫했다. 조선 사람들은 청나라 사람을 ‘되놈’이라고 불렀다. 이 영향으로 지금도 가끔 어르신들은 중국 사람을 '떼놈'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불결한 이미지를 떠올린다는 것인데, 술집이 너무 관리가 잘되는 탓에 박지원의 충격이 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는 뒤이어 우리가 박지원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유명한 말을 덧붙인다.
아, 이렇게 한 후라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 이를 수 있겠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연후에야 정덕(正德)이 될 것이다.
박지원의 이 한 마디는 조선의 기존 학설을 완전히 뒤집었다. 정덕과 이용후생의 관계는 『서경』에서 처음 제시한 것으로, 성리학적 질서에서는 언제나 정덕이 먼저 갖춰져야만 했다. 그런데 박지원은 백성들이 먹고사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비로소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실학자 특히 북학파만의 독특한 점을 증명한다.
여담으로, 박지원은 봉황성 주막에서 ‘백소로’라는 술을 마셨다. 그는 이 술이 “맛이 그리 좋지 못할 뿐 아니라 취하자마자 금방 깬다.”라고 말했다. 아마 중국의 백주(바이주)를 마신 것 같다. 결국 박지원이 이렇게 역사책에 나올 유명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술의 도움(?)이 큰 것은 아니었을까.
3. "원샷” 박지원 선생과 자존심
책 전체를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박지원은 엄청난 애주가였다.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에서 벌교 꼬막 이야기가 빠지면 이야기가 안 통하듯이, 『열하일기』에서는 술이 빠지면 매우 섭섭하다. 다음 이야기를 살펴보자. 박지원은 열하에 머무르면서 시장 거리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는 거리를 거닐다 한 술집에 들어갔는데, 한족보다 몽골·만주족 손님이 더 많은 내부를 매우 상스럽다고 느낀다. 박지원은 이 술집에서 중화의 유일한 계승자가 가진 술부심으로 이민족을 제압하려고 한다.
박지원: (시킨 술을 담뱃대로 넘겨 엎어버리며) "주인장! 더 큰 술잔에 담아오라고!"
주인장: ??? "예, 그렇게 합죠."
박지원: (큰 잔으로 석 잔을 연거푸 원샷하며) "크~ 좋다. 이렇게 해야 술맛이 살지!"
원래 중국에서는 술도 데워마시며, 박지원의 말에 따르면 중국의 술 문화는 매우 ‘얌전’하다고 한다. 그 역시 자신의 이 행동이 용기가 아닌 겁을 감추기 위해서 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 모습을 본 한 술집 손님이 박지원에게 세 잔을 더 권했고, 역시 원샷으로 마무리했다. 박지원이 나갈 채비를 할 때 다른 손님들은 모두 웃었다고 한다. 이는 그 지역 문화와는 맞지 않는 박지원의 행동을 신기해하는 웃음이지 않았을까. 도수가 높은 술을 한꺼번에 들이키는 바람에 갑자기 세상이 빙빙 돌기 시작하면서, 갈 지(之) 자 걸음을 하는 박지원을 비웃었을 수도 있겠다. 원래 자서전에는 자신을 미화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4.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알지?
박지원은 압록강을 건너온 이후 계속해서 벽돌에 관심을 갖는다. 벽돌의 규격화 생산, 집과 성벽 등 벽돌로 쌓은 건물을 보며 감탄하는 장면이 틈만 나면 등장한다. 여기에 친구 박제가의 “돌보다는 벽돌로 쌓은 성이 훨씬 튼튼해서 낫다.”라는 이야기를 곁들여 나중의 일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박지원은 벽돌로 만든 구들을 보면서 조선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구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굴뚝인데, 조선에서는 돌로 굴뚝을 쌓아 틈이 생겨 바람이 들쳐 따뜻하지 않고, 나아가 불이 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 비해 벽돌은 균질하고 쌓아도 틈이 없으므로 박지원은 벽돌 구들에 감탄하고 또 감탄한다.
박지원의 칭찬은 벽돌에서 끝나지 않는다. 말을 사육하는 방법에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뿐 아니라 조선의 말 사육 방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우리나라가 이토록 가난한 것은 대체로 목축이 제대로 되지 못한 까닭이다. 탐라(제주)의 말들은 모두 원나라 세조(쿠빌라이)가 방목한 종자인데, 5백 년을 두고 내려오면서 종자를 한 번도 갈지 않으니 … 마침내는 꼬마 말이 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 또한, 말을 다루는 솜씨도 틀려 먹었다. …
아마 박지원은 이 대목을 쓰면서 화가 치밀어 오른 것으로 보인다. 약 긴 3~4 문단을 할애하여 조선에서는 말을 잘 다루지 못해 지금의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그에게 당시 조선의 현실은 선진 문물은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고집대로만 하면서 잃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박지원의 인식은 이 말로 표현된다.
성인이 『춘추』를 지으실 때 물론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쳤으나, 이적이 중화를 어지럽혀 분하다고 해도 중화의 진실을 숭배하지 않겠다고 하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진실로 이적을 물리치려면 중화의 끼친 법을 모조리 배워서 우리나라의 문화를 열고 공업과 상업 등에 이르기까지도 배우지 않음이 없으며, 남이 열을 한다면 우리는 백을 하여 먼저 우리 백성들에게 이롭게 한 다음에, 그들로 하여금 회초리를 마련해 두었다가 저들을 매질할 수 있도록 한 뒤에야 중국에는 아무런 장관이 없더라고 이를 수 있겠다.
결국 박지원이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말은 중화도, 탈중화도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43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의 실학자 박지원을 움직일 수 있게 한 원동력은 호기심이고 실용성이었다. 그가 생각한 '실용' 앞에는 중화나 이적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오랑캐가 발을 담가서라도 중화에 발전이 일어났다면, 그것 역시 배워야 할 중화의 모습이라고 말하면서 유연한 사고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쉽게 말해 지금 조선은 편식할 처지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박지원이 「양반전」, 「허생전」, 「호질」을 내용 중간에 삽입한 것은 잊어버릴 때 즈음 채찍질을 하면서 정신을 차리라는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또한, 1920년대 김규식이 보여준 중도와 실용의 가치를 연암 박지원에게서도 찾을 수 있지는 않을까.
이외에도 박지원의 인간적인 면모나 재치있는 입담 등도 이 책에서 살펴볼 수 있다. 최근에는 열하일기에서 읽어볼만한 내용만을 선별해서 번역본으로 출간한 책들도 많이 있으니, 관심있는 독자들께서는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코드만 맞으면 웃음이 절로 나와 소설책 읽는 것처럼 술술 읽힐 것이다. 현대인에게 그 코드가 잘 맞지 않아서 문제긴 하지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