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과 출신이 18.6km를 돌아본 소감
지금보다 날이 추워지기 전인 작년 12월 초였다. 어느 한적 날 저녁에 갑자기 친구한테 카톡이 왔다.
친구: "내일 아침에 한양도성 가볍게 돌아볼까?"
필자: “저번에 갔을 때 힘들었다고 안 그랬냐???"
친구: "그건 오버한 거고. 내일 08:40까지 나와"
필자: "일단 오케이. 내일 봐"
언젠가는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갑자기 가보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문화재학을 공부하면서 한양도성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서울시에서는 한양도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고 노력했던 기억도 있었다. 그런데 실제 답사는 일부 구간밖에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친구의 제안은 매우 솔깃했고, 무작정 나가겠다고 했다.
혹시나 이 이야기를 보고 덜컥 "내일 나도 한 번 가봐야지!"라고 생각하시는 독자가 계시다면,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말리고 싶다. 지도를 보시면 알겠지만 진짜 너어무 길다. 주말 아침 9시에 동대문 한양도성 박물관에서 출발해, 점심 거르고 15시 넘어서 광희문 앞에 도착했다. 나름 걷는 걸 좋아하는 필자도 다 걷고 나서는 도가니(?)가 나가는 줄 알았다. 행군의 추억이 떠오르며, 내가 마치 빨치산이 된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볍게” 걷자던 친구를 한 대 쥐어 패주고 싶기도 했다. 가기 전에 걷기, 등산 연습을 하시거나 구간 별로 다른 일정으로 가보시기를 추천드린다.
서울에 거주하시는 독자 중에서 인왕·북악산을 등산해본 적이 있다면, 사진과 같은 돌무더기를 보신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돌무더기는 보통 돌무더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싼 성벽의 잔해다. 고려 왕조의 문을 닫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개경(개성)을 떠나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한양은 4 방면에 전문용어로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르는 북악산(북), 인왕산(서), 목멱산(남), 낙산(동)이 있어서 풍수지리적으로도, 방어에서도 매우 뛰어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수도는 수도로서의 위용이 있어야 한다. 도시를 방어할 수 있고, 외곽 지역과의 경계선을 설정할 수 있는 상징적인 구조물이 필요했다. 그렇게 내사산을 이어 성벽을 쌓아서 한양도성 18.6km 구간이 탄생했다. 태조 대 처음으로 작업할 때는 평지는 흙으로, 산지에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세종 대 개축 공사를 하면서 전면 석성으로 교체했다. 이후 숙종 대 한 번의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거쳐 지금의 모습이 탄생했다. 오랜 시간 보수를 해왔기 때문에 일부 구간에서는 쌓인 돌을 보고 시간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초기 축성 때는 조그마한 돌로 쌓고, 숙종 대의 보수 작업에는 큰 정방형 돌로 쌓았다. 아래 사진에서도 그 차이를 확실히 구분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일제 식민지 시기 성벽처리위원회가 도로를 뚫기 위해 일부 훼철하기로 결정했다. 도심에서의 원활한 통행에 성벽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로에서 청량리로 넘어가는 흥인지문 구간, 안국동에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신작로를 내면서 없어진 혜화문 구간 등이 대표적이다. 2010년대 이후 서울시에서는 없어진 한양도성 일부 구간을 복원하려고 시도했었다. 거무튀튀한 돌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백옥 같은 돌을 집어넣으면서 엄청난 괴리감을 선사했다(이로 인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실패했다고 하는 모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한양도성 한 바퀴를 다 걷는 것을 '순성(巡城)'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오래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도성 한 바퀴를 돌고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일직선으로 걸은 후 가운데 중(中)을 그려 마무리했다. 과거 합격을 염원하며 고행길에 오른 것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 사람들의 관광코스로 유명했다고도 한다. 이외에도 순성길에는 여러 구경거리가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순성길을 걸으며 본 것들과 필자의 경험 썰을 본격적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1) 각자성석
필자는 흥인지문에서 출발하여 낙산 구간을 먼저 지났다. 이 구간을 지나면서 처음 마주한 것은 사진과 같이 성벽에 새긴 한자였다. 이를 각자성석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공사 실명제를 기록한 것이다. 해당 구간을 공사한 책임자의 이름과 출신지, 공사 구간의 길이 등을 표시하였다. 혹여나 나중에 성벽이 무너졌을 때 책임을 묻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출신지를 적은 점이 흥미롭다. 이는 한양도성 축성 당시 노동력 징발에 관한 이야기와 깊이 관련 있다. 한양도성을 쌓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정에서는 한양도성 각 방면의 공사를 같은 방면의 지역 사람들에게 맡겼다. 예를 들면, 인왕산에서 남산까지 이어지는 서남쪽 구간은 전라도, 남산에서 흥인지문까지 이어지는 동남쪽 구간은 경상도에 맡긴 것이다. 모든 지역민이 다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의 국경 지역 주민은 안보 문제로 제외되었다. 또한, 황해도와 경기도 주민들도 제외되었다. 이들은 한양의 궁궐을 조영할 때 이미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무심코 지나치는 돌무더기에도 이런 사연이 있다.
(2) 엄마, 여기 소나무가 이상해!
혜화문까지 이어진 낙산 구간을 지나면, 와룡공원을 지나 북악산으로 향하는 구간에 돌입한다. 북악산은 쉽게 들어갈 수는 없다. 꼭 위의 왼쪽 사진처럼 통행증을 소지해서 혐의 없음을 인정받아야 한다. 예전에는 검문 과정을 거쳤다고 하는데, 요즘은 신분증 없어도 바로 통행증 명찰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꼼꼼한 과정을 거쳐 북악산 구간을 오르다 보면, 성벽 길을 따라 방범용 카메라도 많고, 뜬금 없는 군용 초소가 보인다. 그리고 주변에는 검은색 모자를 쓴 2인 1조로 근무하는 군인들을 볼 수 있다. 위의 지도를 참고하면 아시겠지만,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에는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어 보안이 매우 철저하다.
북악산의 보안이 이렇게 철저한 이유를 찾으려면 약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8년 1월 18일, 북한의 남파 특수부대가 철책선을 넘어 은밀히 잠입을 시도했다. 그들의 목표는 바로 대통령 박정희를 암살(그들의 표현대로는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하겠다는 매우 살벌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1930년대 후반 김일성이 만주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그 모습을 재현하는 특수부대 소속이었다. 고강도 훈련으로 무장한 그들은 험준한 산길을 타고 단 3일 만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청와대를 들어가기 바로 직전인 자하문 검문소에서 걸린 그들은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며 도망치다 결국 잡혔다. 이중 살아남은 사람이 그 유명한 김신조. 지금은 서울의 한 교회의 목사라고 한다. 이렇게 1·21 사태로 벌어진 총격전으로 소나무도 희생되었다. 위의 사진처럼 지금도 총탄 자국이 남아 그 당시의 급박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3) 아유 힘들어
북악산부터 인왕산을 내려가는 구간까지는 두 번의 등산과 트래킹으로 이루어진다. 거리는 짧지만 경사가 얼마나 심하던지 여기서부터 왼쪽 무릎이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조금 쉬면서 가면 좋았겠지만, 성격이 워낙 급해서 그러지 않고 무정차 고속버스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런 필자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인왕산 정상이 선사하는 서울 시내 전경이었다.
순성길을 나선 날은 약간의 미세먼지가 있어서 뿌옇게 나왔는데, 이후에 야경을 보러 갔을 때는 아주 맑아서 사진도 매우 잘 나왔다. 이런 광경을 두고 사진을 찍지 않는다면 범죄다. 낮의 풍경은 뻥 뚫리는 느낌을, 밤의 전경은 화려한 서울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밤에도 등산로에 조명 시설이 잘 되어있기는 하지만 없는 구간도 있으므로 휴대폰 조명으로 비추면서 가면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다. 경복궁역에서 나와 배화여고 뒤편의 단군정 길을 따라 올라가면 순식간에 다녀올 수 있으니 날 좋은 밤에 한 번 도전해보셔도 좋을 것 같다.
인왕산을 내려와 숭례문으로 향한다. 이미 산을 두 개나 타서 지칠 법도 하다. 인왕산을 찍고 내려왔을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친구는 국수에 파전을 먹자고 제안했다. 막걸리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가 아닌가! 그래서 두 등산객은 강북삼성병원 근처 벤치에 앉아 국숫집을 찾기 시작했다. 쉽지 않았다. 일요일에 문을 연 곳을 찾기도 힘들었고, 무엇보다 멸치국수를 파는 집이 많지 않았다. 우리는 남산에 있는 국숫집을 찾았고, 남산으로의 순성이 이어졌다. 이때는 힘들고 배가 고파서 사진 찍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숭례문을 찍고 남대문시장을 거쳐 백범광장으로 올라갔다. 오르는 길에 빨간 간판의 점집이 있었다. 그곳은 "OO년생 XX띠, 올해 삼재!"라는 대형 현수막을 붙여놓고 있었다. 복선이었을까. 안 그래도 힘든데 삼재에 해당된다는 현수막을 보고 욕설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하얏트 호텔을 지나 찾아간 국숫집. 문을 닫았다. 젠장!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네(친구)가 이기면 남대문시장 다시 내려가고, 내가 이기면 점심 패스하고 계속 간다!" 친구가 이겼다. 남대문 시장에는 국수를 파는 집이 몇 곳 있었다. 드디어! 먹는 줄 알았으나 찾은 집이 모두 문을 닫거나 가게를 이전했다. 결국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다시 백범광장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남산은 너무 힘들었다. 남산 팔각정으로 올라가는 길이 나름 경사가 있다. 가족 단위로 산책하러 온 사람들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땀과 굶주림에 절은 우리 일행은 너무도 초라했다. 비싸기로 유명한 남산 케이블카가 그렇게 그리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팔각정에 도착했다.
아이폰에 애플워치 조합으로 무장한 우리 일행은 국립극장을 거쳐 남산을 내려가면서 피트니스 앱을 조심스럽게 켜봤다. 총 23km를 걸었다. 하프 행군을 한 셈이다. 점심도 굶었기 때문에 맛있는 음식이 너무 그리웠다. 그렇게 동국대학교를 거쳐 오후 세 시 반, 장충동의 한 단골 족발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또 있었던가. 순식간에 음식과 술을 비우고 집으로 향했다. 걷는 김에 더 걷자는 마음으로 집까지 또 걸어서 이동했다. 좋게 지하철, 버스 타고 갈 걸 그랬다. 다음 날, 양(兩) 다리 노동조합은 서있기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노사 협상이 통하지 않는 완전한 파업 상태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제대로 회복할 수 있었다.
한양도성 순성길을 전부 걸으면서 사대문을 지날 때마다 스탬프를 찍을 수 있다. 흥인지문, 숙정문, 돈의문을 거쳐 숭례문에서 스탬프를 찍고 선물을 하나 받을 수 있다. 그 상품은 바로 이 서울 한양도성 스탬프 투어 배지! 참으로 대단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순성길은 형체가 있는 것보다는 없는 선물을 더 많이 준 것이라고 생각하며, 긍정적인 사고라는 또 하나의 선물을 주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