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약산 김원봉에게 자유를

서훈 논쟁에 갇힌 김원봉을 구출하라!

by 한교훈

저번 글에서 잠시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을 언급했었다. 생각난김에 이번 글의 주제를 김원봉으로 잡아봤다. 김원봉을 두고 벌어지는 최근의 논쟁이 매우 흥미롭기 때문에 연결해서 다뤄보기로 한다.


논란의 해, 2019년

김원봉이 최근에 재조명 받은 때는 2년 전인 2019년이었다.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하며 독립운동과 관련된 특별 연구가 한창이었다. 숨은 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특히, 국가보훈처에서는 이러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국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로 서훈을 계획하였는데, 보훈처 자문기관에서 약산 김원봉에게 포상을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논란의 서막이 열렸다.


이후, 국립 현충원에서 열린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더욱 논란을 키웠다. 문 대통령은 "광복군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습니다. … (한국광복군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라고 말했다. 보수진영에서는 "어떻게 김원봉을 서훈을 할 수 있느냐? 김원봉을 서훈하면 김일성, 김정은도 포상해야 하느냐?"라고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같은 해 8월, 국가보훈처는 공식적으로 김원봉을 서훈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하며 논란이 일단락을 지었다. 과연 김원봉은 어떤 사람이길래 논란의 인물이 되었을까?


의열단장 김원봉

이름 김원봉.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그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능력을 갈고닦기로 다짐했다. 1919년, 3.1 운동으로 만세 물결이 전국을 물들이자 감격에 겨웠으나, 막상 독립선언문을 읽고는 매우 실망했다. 그는 독립운동이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폭력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그는 서간도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은 이회영이 전 재산을 털어 세운 신흥강습소였으나, 이회영 일가가 중국으로 건너간 후 학교 운영과 멀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의 명성도 사라져 갔다. 학교가 만주 마적 떼 몇 명의 습격을 받았을 때, 학도들이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김원봉은 또 실망하고 말았다. (낯선 그에게서 익숙한 중대장의 향기가 난다.)


실망에 실망을 거듭한 20대 초반의 김원봉은 뜻이 같은 젊은 청년들을 모아 1919년 '의열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단체는 존재했지만, 단체의 목표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던 의열단에게 정신적 지주가 될 사람이 나타났다. 단재 신채호였다. 1923년, 신채호는 젊은이들이 모인 의열단을 위해 목표가 담긴 지침서 <조선혁명선언>을 전달했다. 이 글에서는 폭력 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일제에 동조하는 인물, 주요 기관 등을 암살하고 폭파하는 테러리즘 투쟁 방식을 천명했다. 이 지침에 따라 박재혁, 김익상, 김상옥, 나석주 등의 젊은이들이 지방 경찰서, 총독부를 향해 목숨을 걸고 폭탄을 던졌다. 이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는 의열단의 영향을 받아, 어감이 좋지 않은 '테러 활동'을 '의열 투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쓸데없는 사족을 하나 붙이면, 일제는 김원봉에게 현상금이 약 300억 원을 걸었지만 김원봉은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었다.


장교 양성을 꿈꾸다

의열 투쟁은 극적인 효과를 줄 수 있었지만, 말처럼 쉬운 활동은 아니었다. 암살과 폭파만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수 없었고, 일제에 의한 탄압의 강도가 더욱 강해지는 역효과도 낳았다. 김원봉이 1942년에 중국 국민당 고위 인사와 나눈 대담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1932년의 윤봉길 의거를 두고 "한두 명의 중요한 인물을 죽인다고 해서 일본의 국가 정책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의열단이 활발하게 활동한 시점과 비교해서 인식이 상당히 변한 점을 엿볼 수 있다.


김원봉은 조선 독립을 위한 체계적이고 치밀한 방법이 필요했다. 그 결과,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한 조선인 장교를 양성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1925년 중국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정치, 군사 기술을 배웠다. 황포군관학교는 쑨원이 세운 학교다. 교장은 장제스였고, 저우언라이와 린뱌오 등 중국 내 유명인사들이 동문으로 있는 학교였다. 황금 인맥을 마련할 수 있었던 황포군관학교의 경험은 이후 김원봉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국민당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원봉은 제1차 국공내전이 끝난 이후, 국민당 내 반공 조직인 남의사의 지원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 장교 양성에 힘썼다.


평생의 꿈, 좌우합작

김원봉은 청년 장교들을 양성하면서 기존의 의열단 조직과 함께 하나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때부터 김원봉은 사회주의(좌파)와 민족주의(우파) 계열의 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적극적인 행보로 1935년 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다. 민족혁명당에는 김원봉의 의열단, 조소앙과 이청천 등의 민족주의 세력, 김규식 등이 참여한 중국 내 최대의 좌우합작 단체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던 백범 김구는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아 완전한 의미의 통합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민족혁명당 내 민족주의 계열 역시 김구를 따라 이탈하면서 통합은 무산되었다.


다시 김원봉 주변에는 의열단과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들만 남았다. 이때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난징이 점령당한 후 국민당과 김원봉이 우한으로 대피했지만, 일본군은 기세를 이어 우한이 점령 위기를 맞았다. 이 시기에 김원봉은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1938년 중국 내에서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를 결성하였다. 1편에서 언급한 적 있었던 '조선의용대'가 그것이다. 조선의용대는 우한 점령 직전 두 부대로 편대를 나눴다. 김원봉의 절친인 윤세주가 이끄는 편대는 북쪽으로, 김원봉은 나머지 대원을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북쪽으로 이동한 대원들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결성하고, 공산당 팔로군와 함께 싸우며 실전 전투에 투입되었다. 반면, 김원봉에게는 민족혁명당 때 이루지 못한 통합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결국, 김원봉은 부대를 이끌고 김구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했다. 그가 이끌고 온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충칭 임시정부 산하 군 조직인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되었다.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으로서 제1지대 대원들을 이끌었다. 또한, 중국 국민당이 한국광복군의 활동에 제약을 걸었던 '행동준승 9개 항'을 폐지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그렇게 김원봉은 독립운동의 목표였던 좌우합작을 이뤄냈고, 행복하게 광복을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다

그토록 고대하던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한반도 남쪽에는 미군이 진주하면서 미군정이 들어섰다. 미군정은 모든 정치·사회단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충칭 임시정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이에 따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은 모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다. 김원봉도 마찬가지였다.


김원봉이 돌아온 한반도는 정부 수립을 두고 좌파와 우파가 격렬하게 투쟁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교부 장관의 회의 결과였다. 이 회의에서 3국은 한반도 임시정부 수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 눈에 거슬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신탁통치'였다. 일제 치하에서 간신히 벗어 나온 조선 사람의 눈에는 신탁통치가 식민지 지배의 연장선일 수밖에 없었다.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는 반탁운동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었다. 여기에 동아일보는 "미국은 즉각 독립을, 소련은 신탁통치를 주장했다."라는 잘못된 보도를 퍼뜨리며 논란을 더욱 키웠다. 사실 신탁통치를 강력하게 주장한 쪽은 미국이었다. 소련은 곧장 담화를 발표하여 이를 정정하였고, 한반도의 사회주의 세력은 곧바로 소련의 입장에 발맞춰 움직였다. 민족주의 세력이 신탁통치 반대를 외칠 때, 사회주의 세력은 결정문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김원봉 역시 지지 선언을 발표했다.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자와의 연대가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몸 담고 있었던 임시정부에서는 탈퇴하였다.


그러던 1948년 4월, 5·10 총선거로 남한의 단독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김구와 김규식이 김일성과 만나 분단을 막아보겠다며 평양으로 출발했다. 김원봉도 함께 평양으로 떠났다. 김일성,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 남북의 여러 지도자가 만나 회의를 거듭했으나, 유명무실한 이 회의에서 남는 것은 없었다. 5·10 총선거는 차질 없이 진행되었고, 김일성 역시 북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남한의 동태를 살피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협상단이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북한 초대 내각에 참여하여 국가검열상 자리에 올랐다. 국가검열상의 자격으로 한국전쟁에 참여했고, 1952년에는 노동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김일성의 1인 독재 체제를 위해 시작된 대대적인 숙청에서도 살아남았으나, 1958년 최종적으로 숙청되면서 김원봉의 이름은 잊혀 갔다.


그의 손에는 쥐어질 수 없는 서훈 목걸이

다시 본론인 서훈 문제로 돌아가보자. 이 문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서훈은 법적 근거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훈은 어떤 기준이 적용될까? 아래 사진은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국가유공자 포상 심사 기준안이다. 상세 기준은 비공개고, 일반 기준만 공개되었다.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국가유공자 포상 기준안(출처 국가보훈처)


국가보훈처가 제시한 기준을 김원봉의 행적에 적용해보면, 먼저 김원봉이 심사 대상자 자격에는 해당된다. 그의 독립운동 활동이 해방 전까지 꾸준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상 대상자에서는 제외된다. 세 번째 항목 "사망 시까지의 행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북한에서 활동한 경력으로 인해 포상 대상자가 될 수 없다. 보수진영의 "김일성에게도 포상해야 하느냐" 라고 하는 반대가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김일성 역시 동북인민혁명군 소속으로 조국광복회를 이끌어 1930년대 후반에 보천보 전투 등 국내 게릴라 작전을 지휘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사망 이전까지의 경력을 알아보면... 말할 필요가 없으니 그만 알아보도록 하자. 어쨌든, 지금의 기준으로는 김원봉은 훈장을 받을 수도, 독립유공자가 될 수도 없다.


서훈 논쟁을 넘어

지금까지 살펴본 김원봉의 행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해방 이전 좌우합작과 독립을 위해 노력한 김원봉. 그리고 해방 이후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대로 북한 초대 내각에 합류한 김원봉.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독립운동가로서 공로를 세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이고, 앞선 독립운동의 행적을 참고해보면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김원봉 서훈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충분히 공감한다.


반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의 활동은 한국 사회에서 용인될 수 없는 문제다. 김원봉이 내각의 수반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수많은 피해자들이 지금도 존재하는만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대로 서훈은 법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이므로, 기준에 맞지 않으면 서훈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나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다. 바로 서훈 논쟁에 갇히면 김원봉의 존재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의용대를 창설할 때 국민당 장제스의 후원을 받은 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창설할 때 국민당 내 반공 조직인 남의사의 지원을 받은 점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단순히 김원봉을 북한으로 넘어간 공산주의자라고 평가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다. 김원봉이 이념에만 매몰된 사람이었다면,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조직한 후에도 화북으로 넘어가 중국 공산당과의 연대에 모든 힘을 쏟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평생의 꿈인 좌우합작을 위해 자기 조직이 흡수 되는 형식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러한 김원봉의 행동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김원봉을 서훈 문제에 가둬놓지 않고, 그가 활동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고 넓게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김원봉은 한국 정부에서 서훈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서훈을 피하기 위해 북한으로 건너간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을 그는 모른다. 우리는 결과 이상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평가할 수 있지만 말이다. 역사 속에는 김원봉과 같은 처지에 있는 인물이 매우 많다. 특히 현재의 관점에도 영향을 미치는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다음에는 김원봉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논란에 갇힌 한 남자의 이야기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참고문헌과 출처

1. 커버 사진 출처(KBS)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171630

2. 현충일 대통령 추념사 출처(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896875.html

3. 염인호(2010), 「김원봉」, 『한국사 시민강좌』 47.

keyword
작가의 이전글그럼에도 철책선은 계속 뚫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