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신문 다시 읽기> 누가 '내각제' 소리를 내었어?
유령이 전 유럽에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고 하는 유령이.
- 칼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 머리말 中 -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를 생각하면 이 문장이 떠오른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그들이지만 문장 하나만큼은 최고다. 한글로 옮겼어도 글의 힘이 잘 느껴진다. 첫머리로 훌륭한 문장이다. 또한 '유럽'과 '공산주의'만 바꾸면 모든 상황에 쓸 수 있어서 더 훌륭하다.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는 저 멀리 사라지고, 이제는 다른 유령이 우리 주변을 배회하고 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704/114284553/1
개헌(改憲). 헌법을 개정한다는 말이다. 그중에서도 ‘내각제 개헌’이라는 유령, 아니 망령은 때만 되면 여의도를 떠돈다. 사라질만하면 다시 소환된다. 사실 각설이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죽지도 않고 2022년에도 어김없이 소환되었다. 여의도 일부 정치인 그룹은 이 망령을 불러낼 때마다 진짜 사람으로 착각한 나머지 야단법석 난리를 낸다.
그러나 명심해야 한다. 국회는 단독으로 헌법을 고칠 수 없다. 최종 결정권자인 시민의 찬반 투표를 거치지 않으면 무효다. 쿠데타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한다. 지금 정작 대다수 시민은 내각제에 '1도' 관심이 없다. 그저 여의도에서만 북 치고 장구 치고 태평소까지 불어대고 있다.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 1번지에서는 아직 <국풍 81>이 끝나지 않았나 보다.
이번 글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면서 시작해보려고 한다.
망령이 여의도에 떠돌고 있다.
'내각제 개헌'이라고 하는 망령이
내각제(혹은 의원내각제)는 대통령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국회의원끼리 총리와 장관을 선출해서 국무회의 멤버를 구성한다. 대통령도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 국방과 외교만 전담한다. 나머지 국내 문제는 국회에서 다 관리한다. 국회가 곧 행정부가 되는 셈이다. 가까운 나라 일본이 대표적인 내각제 국가다. 원내 제1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의 수반이 총리가 된다. 아베 신조, 스가 요시히데, 기시다 후미오는 이렇게 총리가 됐다.
멀게만 느껴지지만, 사실 대한민국도 의원내각제를 딱 한 번 경험해봤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헌법 개정으로 등장한 '장면 내각'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헌법 개정이다. 이전 헌법은 지금처럼 원래 대통령제를 담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는 의원내각제를 꿈꿔왔다는 말이 된다. 2천 년을 중앙집권체제로 살아온 한반도에서 도대체 누가 의원내각제를 꿈꿨단 말인가.
진상을 알려면 시간을 되돌려 초대 헌법을 만들던 1948년으로 돌아가야 한다. 헌법 제정 초기에 의원내각제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 국회법 제정을 맡았던 사람들은 심지어 의원내각제가 아니면 사퇴하겠다며 강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임시정부 시절 경험이 작용했다. 상해 임시정부가 의원내각제 형태를 채택해봤기 때문이다. 이런 판을 깬 사람은 이승만 박사였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박사 출신인 이 박사가 미국식 대통령제를 주장하자 모든 여론이 대통령제로 돌아섰다. 그래도 초대 헌법에는 내각제 요소가 조금 포함되었다. 대통령제 국가에는 없는 국무총리를 뒀다. 총리를 국회가 선출했다는 점도 새롭다.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위험한 동거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미련이 남은 내각제 옹호론자들은 정부가 미흡하거나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면 가차 없이 내각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각제 개헌이 정치적 무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가만히 지켜볼 이승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통령제를 지켜냈다. 결국 이는 12년의 장기 집권으로 이어졌다. 야당이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대통령제는 곧 이승만이요, 독재의 유산이었다. 이승만을 지우려면 좋든 싫든 의원내각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청난 명분을 얻었다.
그런데 막상 내각제를 해보니 세상을 바꿀 만큼 특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가 더 많았다.
<장관이 갈리면 사무차관도 물러나야 하나?>
대통령 책임제가 내각제로 바뀌고, 대통령 1인 정치가 국무원 다수 정치로 이행되었다. 정부의 책임이 연대제가 된 오늘에 있어서도 현 정부는 구태의연한 유물적인 사고를 버리고 있지 못하고 있다. (동아일보, 1961 사설)
지난 10월에 실시된 보궐선거 투표율은 작년 전국 선거에 비해 훨씬 저조한 현상을 보인다. 평소 나라의 일꾼을 뽑는 선거에서 무책임하게 표를 내던져놓고, 국회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자가 있다면, 이 땅의 민주정치는 골로 갈 것이 아니겠는가. (경향신문, 1961 사설)
행정의 중심인 내각이 자주 바뀌는 모습을 본 국민들은 실망했다. 그 심정이 투표율로 나타난 것이다. 정치인들이 밥그릇 싸움만 한다는 인식이 이때부터 생기지 않았을까? 실망에 휩싸인 국민들은 결국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 세력에 기대를 걸기에 이른다. 장준하 선생마저 쿠데타는 민주주의의 적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1년 동안 시험대에 올랐던 내각제는 정치가 주는 효용감을 박살내고 1963년 5차 개헌과 함께 사라졌다. 그렇게 내각제는 부끄러운 과거를 상징하는 망령으로 남았다.
철권 통치로 영원히 보기 힘들듯 했으나 내각제 개헌은 박정희 대통령 사망과 함께 부활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개헌을 약속하면서 정치제도 개편 방향을 두고 여러 주장이 쏟아졌다. 특히 정치인 유진오 씨는 1979년 12월 <동아일보>와의 대담에서 자신이 줄곧 주장해온 내각제를 다시 화두로 던졌다. 이에 서울대학교 김철수(법학) 교수와 이홍구(정치학) 교수도 신민당이 주관한 정치 개혁 토론회에서 내각제 개헌을 주장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은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실세로 떠오른 신군부 전두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두환 정권도 개헌을 이뤄냈다. 무려 임기 7년짜리 대통령제로.
이후 내각제는 어둠의 시대가 저물어가던 1986년에 다시 정치권에 등장했다. 그해 전두환은 1989년에 헌법을 개정하도록 정치권에서 논의해보라는 메시지를 던졌다. 논의는 당연 야당 그룹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주화의 거물 김영삼과 김대중은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했다. 반면 같은 71년 '40대 기수론' 그룹 출신이었던 이철승은 의원내각제를 주장했다.
여기에 여당 민주정의당(이하 민정당)이 갑자기 이 카드를 받아 내각제 개헌이 급물살을 탔다. 물론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냈지만, 민정당은 계속해서 내각제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여소야대로 불리한 정국을 돌파할 유일한 카드였다. 88년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민정당은 다시 김영삼과 김대중에게 내각제 이야기를 던졌다. 제발 올림픽 때만이라도 조용히 해달라는 것이었다. 양 金 씨는 무슨 꼼수냐며 제안을 일축했다. 그런데 또 한 명의 김 씨, 김종필이 연정(연립정부) 구성에 필수라며 내각제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3金 씨는 자신이 불리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서슴지 않고 내각제 개헌 카드를 꺼내보였다. 19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이끄는 세 정당이 연합하는 이른바 '3당 합당'이 완성됐다. 대표 최고위원이 된 김영삼은 곧바로 내각제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못 박았다. 이듬해 김대중과 만난 자리에서도 국민이 원하면 검토 정도는 해보겠지만 자신들은 학실한(!) 대통령제 옹호론자라며 선언했다.
그러나 김영삼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학실한 다짐을 저버렸다. 김대중과 김종필이 이른바 'DJP 연합'을 구축하면서 여당 후보 이회창을 크게 따돌렸기 때문이다. 내각제가 꿈이었던 김종필을 흔들어 연합전선을 깨 보려는 시도였다. 한 마디로 전략이었다.
김영삼의 전략은 바로 먹히지 않았지만, 서서히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의 총리 김종필은 곧바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자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말했지만, 내각제는 전혀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신이 난 쪽은 야당인 한나라당이었다. 한나라당은 내각제 개헌을 정권 압박용 무기로 삼았다. 임기 말에 개헌을 하자는 여당의 주장에는 계속 집권하고 싶어서 안달난 정권이라며 비난을 가했다. 소위 ‘가불기(가드가 불가능한 필살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내각제 개헌은 정쟁 수단이 되어 노무현 정부까지도 활용되었다.
종합해보면 내각제 개헌 논의는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 존재해왔다. 대체로 정권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단 던지고 보는 무기였다. 받아도 혹은 안 받아도 다치게 한다. 그래서 내각제는 이념을 초월한다. 실제로 최근까지 내각제를 이야기한 정치인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정계 개편으로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사람들 뿐이다. 혹은 대통령 감은 안 되니 총리로 한탕 해보려는 흑심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정치인들이 서로 내각제를 왈가왈부해도 국민들은 전혀 관심 없었다. 오히려 내각제 시기에는 정치 효용이 떨어지는 현상까지 겪었다. 안 그래도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진 국회에 모든 권한을 넘겨줄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대통령 임기와 선거 방식을 바꾸는 논의가 훨씬 유익하지 않을까. 뭘 이야기해도 정치인의 밥줄 이야기로 귀결되겠지만 말이다.
정치권은 내각제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60년 전에 사라진 내각제가 왜 아직까지 정치인이 매번 소환하는 망령으로만 남아있을까?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얼른 여의도는 <국풍 81> 축제를 끝내고 공부 좀 하시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국회만 생각하면 다 날릴까봐 걱정돼 육두문자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