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억보다 선명하다

2-1 History 그의 이야기, 그리고 역사

by 시드니 이작가

경상도 촌놈이 서울로 한창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고 있던 1997년 여름이다. 순진한 사범대 학생이 수업을 땡땡이치고 낮에 잔디밭에 모여 앉아 막걸리 마시고 밤엔 학생증 맡겨가며 소주 마시는 게 대학생의 특권인가 아님 사회에 대한 저항인가도 모르고 술 먹자니 따라나 선다. 운동권이 사라지기 시작한 97학번이지만 난 1년에 200일 이상이 산에서 지냈으니 완전한 운동권이었다. 주말엔 북한산에서 암벽등반을 하며 자일에 매달려 하늘을 보고 야영을 하며 소주 한 코펠에 산 노래 일발 장전하면 우렁찬 산노래가 백운대까지 울려 퍼지던 시절이었고 한창 뜨거웠던 그 해 여름 백두대간을 종주하였다.


한국 남자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군 복무를 끝내고 나니 2001년 여름이 되었다. 좁은 대학 강의실보다는 넓은 세상에서 호연지기를 펼쳐 맘 컷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복학은 미뤄두고 필리핀으로 갔다. 혼자 배낭 하나 메고 도착한 마닐라의 독특한 향과 물기와 매연을 머금은 뜨거운 공기는 첫 해외였기에 아주 강렬히 폐를 통해 머리로 각인이 되었다. 마닐라, 바기오, 바나웨 같은 시골로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미터 바닥이 보이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알록달록한 산호들과 열대 물고기를 매일 만나는 보라카이에서의 스쿠버다이빙은 산만큼 나를 매료시켰다.


그리고 2002년 여름은 한국에서 개최된 월드컵의 열기로 더욱 뜨거웠다. 복학은 했지만 도서관에 가면 흰색과 검은색밖에 없는 교육학 전공 서적보다는 칼라풀하고 화려한 리조트와 바다 사진이 들어가 있는 여행 매거진들만 보며 맘은 이미 학교 담장을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유학을 결심했고 주위의 걱정보다는 내가 그린 장밋빛 미래에 판단력은 이성적이지 못했고 많은 정보가 없으니 겁 없이 도전을 했다. 호주의 관광업을 배우기 위해서 골드코스트 TAFE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영어는 한국에서 이미 IELTS 입학조건을 충족해서 호주 도착 후 1주일 뒤에 바로 요리수업부터 시작했으니 아주 순조로워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프인 선생님이 뭘 시켜도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 서퍼스 파라다이스에 꽂혀있는 깃발처럼 가만히 쳐다만 봐야 했었다. 항상 책으로만 영어를 공부하다 보니 실제로 사람과 대화하는 스피킹은 사지선다 문제처럼 고를 수 있는 번호나 빈칸이란 게 없었다.


그래도 졸업할 때쯤 되니 호주식 영어와 문화에 익숙해져 영어 스킬뿐만 아니라 눈치가 늘면서 영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골드코스트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일자리가 더 많은 시드니로 내려왔을 때가 2006년 여름 내 나이 29가 되던 해이다. 루이뷔통 모엣 헤네시 그룹(LVMH)의 면세점 DFS Galleria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 업무가 관광객 유치를 위한 마케팅이어서 그때 하나투어 호주지사의 가이드분들도 알게 되었고 관광업에 대한 환상에 벗어나 실무를 배우게 되었다. 또 다양한 국적의 동료들과 퇴근 후 오페라 하우스 멋진 바에도 파티도 하고 한창 꿈을 키워가게 되었다.


하지만 2008년 미국 리먼 브라더스에서 시작한 금융위기는 시드니까지 밀려와 관광업을 떠나게 만들었고 짧은 구직활동 후 운 좋게도 LG전자 호주법인에서 두 번째 직장생활을 시작하였다. 해외에 있는 한국의 대기업의 현지법인은 작은 한국 같은 느낌이다. 한국인 중심으로 호주 로컬들이랑 일한다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고 호주 직장처럼 야근 없고 한국 직장처럼 회식을 하던 정말 Life is Good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이제 뭐든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것일까? 아님 나의 철없는 방랑벽일까? 이상하게 직장이든 취미든 오랫동안 하지 못한다. 직장도 3년마다 바꾸고, 취미도 산에서 바다로 바꾸었다. 아직 열정이 많아서 그런가? 정말 철이 없는 것인가?


2011년 그때가 34살이었는데 남들이 잘하지 않고 나만 잘할 수 있는 직업을 해서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러콘과 히터가 항상 적정온도를 유지해주는 LG 에어컨이 풀가동 중인 사무실을 나와 타즈마니아의 차디찬 바다로 가서 펭귄, 물개랑 다이빙하면서 호주의 ADAS 산업잠수(Commercial diving) 자격을 취득하였다.


초보 산업잠수사는 연어, 참치 가두리 양식장에서부터 그물 관리 등의 일을 시작하여 경력이 쌓이면 교곽관리, 수중공사, 선박 관련 수리, 최종적으로는 심해잠수사로서 원유, 천연가스 수중 파이프라인 관리를 하는 것이 산업잠수사의 일이다. 보통 저승에서 돈 벌어서 이승에서 쓴다고 할 정도로 극한직업 중 하나이다.


계획대로 산업잠수사가 되어 다리 교각의 물에 잠긴 하부구조에 생긴 해초, 조개류 등을 고압 물총으로 쏘아가며 청소를 하였다. 지상에서도 고압 총은 버티기가 만만치 않은데 수중에서 두 손으로 고압 총을 교각 정면으로 쏘면 점점 멀어지고 밑으로 쏘면 내 몸이 위로 올라가고 위로 쏘면 내 몸이 바닥으로 꺼진다. 아무리 오리발(fin)을 힘 컷 차고 해도 물속에서 땀이 날 정도이고 잦은 수심의 변화로 고막이 손상이 되고 중이염을 달고 살았다.


또 방파제 공사현장에서 수중 바닥에 아주 넓은 천을 깔거나 크레인에 고리를 연결하는 작업도 하고, 부두에 정박 중인 컨테이너 배 밑으로 잠수해서 수중카메라로 선체 하부를 인스펙션도 하고 프로펠러 청소하는 작업도 하였다. 한낮에도 수심 30미터의 선체 밑으로 들어가면 아주 깜깜하니 저 시커먼 바다 밑에서 뭐가 나올 것만 같았고 게다나 보통 밤에 선박의 프로펠러를 돌지 않을 때 작업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이 나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흔들리는 배에서 밤새 작업하고, 몇 시간의 물속 작업을 마치고 나오면 10킬로가 넘는 헬멧부터 무거운 수중장비들 때문에 혼자 걷기 힘들 정도로 산업잠수는 고된 작업이다. 따뜻한 바다에서 예쁜 것만 보던 스쿠버다이빙과는 차원이 다르고 어느 순간 바다가 무서워지고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산업 잠수일은 항상 프로젝트 별로 일을 찾아다녀야 되어서 플랜 B를 준비해뒀지만, 워낙 건강한 나였기에 내가 몸이 아플 것이란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2013년 또다시 여름은 오고 내 나이 36 한창 일 할 때인데 호주로 떠난 지 10년 만에 허리가 아파 꼼짝 못 하고 울산 고향집에 누워 있으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혼자서 영화 보고, 책 읽고, 기타 치고, 시련의 시간이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지리산 둘레길이었다. 지리산의 둘레로 하동, 구례, 남원, 함양, 산청을 거쳐 274Km를 걸으면서 가장 먼저 허리가 아주 튼튼해졌다. 모내기를 끝낸 들녘과 구비 구비 오르락내리락하는 시골길이 나의 삶 같기도 하고 정겨웠다. 아마 처음으로 진지하게 지난 삶들을 되돌아보고 다른 사람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은 또 뒤처질 것 같은 자전거 위에서 잠시 내려와서 자연이 주는 시원한 바람과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바다에서 받은 상처를 다시 산에서 위로받은 시간였다.


2014년 여름에는 경남 양산 주남마을의 할아버지, 아버지가 살았고 내가 태어난 시골집을 사무실로 단장하고 내 이름을 따서 '미스터채 주식회사'를 창업하고 영어교육과 해외캠프 사업을 시작하였다. Stop Vicious Cycle (악순환을 끊자)라는 슬로건 아래 말하는 영어를 잘 익혀서 호주같이 노동자가 성공할 수 있는 해외로 간다면 자신의 삶을 얽매이는 스펙, 빈곤 같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봄에는 동네분들과 모내기 후 막걸리도 마시고, 여름엔 울산 등산학교 입교해서 다시 암벽등반도 하고, 가을엔 외국인 노동자들이랑 한글 공부도 하고 겨울엔 지역의 예술가들과 갤러리도 다니면서 그리웠던 한국에 대한 정을 많이 느끼게 되었고 지극히 나 중심이었던 관점이 많이 넓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꼭 해외에 나가야만 견문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2017년 여름에는 불혹 40이 되어서 지금의 아내에게 유혹되어 다시 호주로 돌아왔다. 하나투어에서 관광 가이드를 하면서 <미스터채의 인생학교>라는 유튜브 채널로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브런치에 글도 쓴다. 또 우버(Uber), 에어비앤비(AirBnb)를 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국적과 문화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책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느끼고 배운다. 그래서 인생학교이다.


이렇게 지난 20년의 일을 글로 정리를 하니, 과거에는 크게 걱정하고 또 자랑했던 일도 별 일이 아니기도 하고 내가 주체적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한 일들도 지금 보니 시대상과 사회의 큰 물줄기 속에 나도 흘러갔다는 생각도 든다. 또 내가 잘나서 한 줄 알았었는데 나의 가족, 친구 그리고 사회가 나를 이렇게 길러 주었다는 것을 조금 알 것 같다. 그래서 나 혼자가 아니라 같이 잘 살아야 된다는 '같이'의 가치를 알게 된 것 같다.


최근에서야 나처럼 산만한 관심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다능인(Multi potentialities)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상 천직과 운명이라 굴레안에 속해 있지 않은 나를 계획성이 없는, 인내 없는 사람이라며 스스로에게 던졌던 의문과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이 My Story이다. 누구나 스토리가 있다. 그래서 His Story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글을 쓰는 과정은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고, 글로 남김으로써 기억을 재편집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기록은 기억보다 선명하기에 나의 스토리를 글로 기록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지 않는다. 나도 이런 과정이 처음이었지만 이제 30대들도 나의 삶을 글로 혹은 영상을 남기기를 바라면서 시드니의 여름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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