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팔도유람 5 - 속초
강릉에 가면 단열이가 있다. 단열이는 20년 전 유학을 준비하려고 서울 IELTS 학원을 다니며 영어 공부할 때 만난 동갑친구이다. 나는 호주로 왔고 친구는 뉴질랜드로 갔다. 유학하면서도 나는 친구가 있는 크라이처치에 가고 친구는 골드코스트에서 만나기도 했다. 그 후에도 시드니에서 강릉에서 한두번 만난적도 있다. 20년 일을 두세줄 글로 정리하는 동안 우리 머리에는 하얗게 세월이 앉았다.
마침 단열이는 10년을 다니던 강릉대학교 교직원 자리를 정리하고 베트남에 출장 겸 휴가를 다녀왔다. 40대 1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모두가 탐내던 철밥통같은 일자리를 두고 나온 친구의 고민과 생각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성격도 나랑은 반대이다. 하지만 40대 중반의 우리는 아직 젊고 늙음을 준비할 수 있는 중간 나이다. 아마 단열이는 지금하지 않으면 안될 더 큰 꿈을 꾸고 있을 테다.
우리 여행의 쉼표 같은 커피를 한잔한다. 강릉 카페 <곳>에서 혜진 씨의 진행 아래 단열이의 베트남 출장 이야기, 나의 사업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과 호주에서 평행선처럼 나란히 달려가고 있지만 언제가 교차점에서 만나 서로의 인생을 나누게 되길 기대해본다. 나는 그러자고 약속했다.
강릉에서 7번 국도를 따라서 양양의 서프 비치에서 잠시 쉬었다. 젊은 20대들이 비키니 입고 맥주병을 들고 노을에 깔 맞추고 음악에 몸을 흔들어대니 내 정신이 흔들린다. 아저씨는 불룩해진 배에 바짝 힘을 주며 뻣뻣해진 몸을 어쩔 줄 몰라한다. 누구도 나를 보고 있지 않는데 나만 보는 것 같다. 술 안 먹고 맨 정신에 서프 비치를 돌아다니기에 여름 햇빛이 너무 쨍하다. "어라, 바다는 맘의 준비가 안됐다. 다시 산으로 가자." 그리고 속초 델피노로 간다.
어둑어둑해진 눈앞으로 울산바위가 누워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크로테스크한 거인처럼 바위들은 제 형태를 가지면서도 서로가 함께 큰 바위산을 이루고 있다. 여기가 나의 최애 장소 중에 하나인 속초 델피노이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울산바위, 특별한 날은 여기 오자고 와이프와 2016년에 약속하고 두 번째로 온다. 밤에 속초 대변항에서 해산물을 떠다가 속초 막걸리 한잔하며 잔다. 아! 처음 만나 6년동안 한국, 호주를 오가며 만든 사연들을 울산바위 하나하나에 세겨둔다.
아침에 5시에 눈이 떠진다. 해가 먼저 떠서 울산바위를 비추고 있었다. 와이프는 아직 한밤중이고 조용히 혼자 설악동을 간다. 흔들바위를 힘껏 밀어 보기도 했다. 여기까지는 완만하고 길도 넓어서 가볍게 뛸정도로 올라왔다. 지나가는 아줌마들이 산악부원이냐고 물어보며 사진 찍어달라고 한다. "왕년에"라며 너스레를 떨고 싶지만 내 배를 보면 믿지 않을 것 같아서 참았다.
흔들바위부터 울산바위 정상까지가 1km 거리인데 좁고 가파른 구간에 철계단이다. 허걱 허걱 땀이 눈꺼풀에 올라앉아서 눈앞을 가린다. 이미 티셔츠는 흥건히 젖어서 색깔이 진해졌다. 산악부라고 애기 안 하길 잘했다 싶다. 허걱 허걱 거리며 철계단에 서있는 내 모습을 대청봉과 공룡능선만 알고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 내려가는 아저씨가 이제 다 왔다고 힘내라고 한다. 묻지도 않았는데 아침부터 거짓말하고 지나간다. 그래도 거짓말에 힘은 나고 나도 내려갈 때 거짓말을 많이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와 우와 우와 드디어 울산바위 정상이다.
저 멀리 아내가 자고 있을 델피노 리조트도 보이고 속초항도 보인다. 밤이면 오징어배가 별처럼 빛나고 찰옥수수가 익고 있는 속초시내이다. 나의 첫사랑 추억도 울산바위에서 비박하며 소주 마셨다는 산악부형들의 무용담도 바람에 들린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여기는 울산바위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