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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Jul 18. 2023

내 나라 여행 #1 부산

내 친구 곰돌이 

*시드니이작가는 7월 11일부터 8월 2일까지 한국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밤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렌터카 타고 처갓집이 있는 산청, 그리고 본가가 있는 울산에 가서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이제 울산, 부산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합니다. 일 년 만에 만나는 인연들이라 떨어져 지낸 그 시간을 메꾸기라도 할 듯이 부지런히 입을 놀립니다. 


해운대에 살고 있는 친구를 만나려고 연락을 했지요. 작년에 가족들과 호주 한 달 살기를 하고 올해는 아예 반년을 시드니에서 살려고 계획하였는데 친구가 아파서 꼼짝도 못 하게 되었지요. 친구에게 연락을 하니 집에서 보자 해서 긴 장맛비 사이사이로 피해서 친구의 집으로 갔습니다. 


카페나 술집이 아니라 집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도 흔치 않지만 또 친구 집 앞에 놓여있던 휠체어와 목발들을 보고 "누구 거지, 손님이 왔나?" 의야했지요. 현관문을 열어주는 하얗게 머리를 드러내며 목발에 힘겹게 서있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두상이 이뻐서 삭발해도 잘 어울린다."며 웃었으며 놀란 마음을 감추었습니다. 


우리 나이 이제 40대 중반,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1994년 울산 H 고등학교이다. 30년 전이다. 그는 나 같은 범생이들이 다들 그렇듯이 안경 쓰고 여리하고 피부 하얗고 착하고 순한 친구였다. 밤 10시가 넘어 공부하다가 잠 오거나 집중이 안되면 100원짜리 자판기의 커피와 율무를 뽑아 썩어 마시거나 운동장 한 바퀴를 도는 게 나름의 땡땡이였다. 


사춘기도 일탈도 없이 고등학교 3년을 공부하고 서울의 유명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가서 남자 둘이서 연애도 안 하는지 서로의 대학을 탐방했다. 그 후 난 군대를 가고 제대 후 해외로 떠돌아서 한동안 소식이 뜸해졌다. 


다시 만난 것은 친구가 대학졸업 후 다시 의대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대학병원에서 인턴을 끝나 레지던트 할 때 즈음이었다. 결혼을 했고 아직 편의점 일하는 것만큼의 적은 월급에 바쁘게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 후 친구는 전문의가 되었고 나중에 개인병원을 열었다. 개원할 때는 연고 없는 부산에서 고가의 의료장비와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매년 만날 때마다 안정을 찾더니 5년쯤이 되니 페이 닥터를 두 명 고용하고 일주일에 하루만 쉴 만큼 바쁘게 잘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작년에는 내가 있는 호주 시드니로 왔다. 그게 처음 가족이 함께하는 해외여행이었고 나 역시 친구의 가족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올해는 6개월을 호주에서 살면서 아이들도 학교 다니고 주말에 여행하기로 계획하고 준비 중이었는데 불과 몇 달 사이에 정말 큰일이 생겼다. 


친구가 관절에 아주 희귀한 암이 발견되어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호주 오는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애기를 들었을 때는 본인이 의사인데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라고 생각하고 맘의 걱정은 떨쳐내었다. 항암치료 중이어서 밖보다는 집안이 편하다며 하얀 머리에 목발을 짚고 있는 친구를 보니 가슴이 막막해져 온다. 아프고 저리고 슬픔을 표한할 길이 글밖에 없다. 


친구는 의사답게 전문용어를 부쳐가며 그동안 일들을 들려주었다. 약간 무릎이 불편해서 정형외과 전문의 친구에게 진료를 갔는데 CT 촬영과 정밀검사를 하자고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수술 가능한 서울 큰 병원의 교수에게 소개하여 바로 입원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 환자수도 100여 명 정도밖에 없는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기적처럼 빨리 수술을 하게 되었고 회복도 좋아서 다행이라지만 친구는 오른쪽 다리 90프로의 운동능력을 상실하였고 평생 장애를 갖고 살아야 되고 예전처럼 일도 많이 못하게 되었다. 온갖 마약류의 진통제를 다 맞았고 중독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뼈를 깎는 고통을 참으며 하나씩 줄여나갔다고 한다. 


항암치료를 하면 열흘동안 의욕도 힘도 없다고 한다. 고관절을 제거하여 앉아있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한다. 혼자서 양말과 속옷도 입지 못한다고 한다. 멀리 사람 많은 곳을 가거나 함부로 먹을 수도 없다고 한다. 장애를 가지면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만 산보를 한다고 한다. 사람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고 한다. 


우리는 두 시간을 떠들었다. 친구의 병애기부터 시작해서 관심 있어하는 인구문제, 부동산 애기까지 예전처럼 재미있게 웃으며 얘기하였다. 친구가 아픈 것도 잊어버렸고 이내 하얀 머리도 익숙해졌다. 헤어지는 나를 배웅하러 목발을 잡는 순간 다시 친구가 아픈 것을 상기하였다. 


친구는 아직 세 번의 항암치료가 더 남았고 몇 년을 전이가 없는지 잘 관찰해야 되고 장애에 익숙해져야 된다. 그리고 자신은 의료인이라서 이렇게 빨리 잘 대처를 하고 있는데 일반인이었으면 더 힘들었을 거라 얘기한다. 그래서 몸이 회복되면 환자에게 장애인에게 도움이 되는 의사가 되려는 소명이 생겼다고 한다.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할 것 같고 내가 어떻게 부담스럽지 않게 친구를 도와줄 수 있을지 천천히 생각하고 있다. 나의 경험 속에서 정답을 찾으려 해도 처음 겪는 큰일이라서 이렇게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한다. 친구에게 내가 좋아하는 문학책 읽기, 글쓰기 같은 취미를 알려줘야겠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보여줘야겠다. 천천히 친구와 함께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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