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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 이작가 Oct 28. 2020

나는 아빠를 닮았다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며 

2020년 10월 25일 새벽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얀 모니터 앞의 공간을 한 글자 한 글자 아버지를 추억하면서 글로 채운다. 


나 어릴 때 우리 집은 쌀집과 떡방앗간을 함께 했다. 우리 다섯 식구가 사는 방은 다섯 명이 나란히 누우면 더 이상 빈자리가 없어서 손님이 오면 한 명은 발 밑으로 한 명은 머리 쪽으로 누워야 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방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갔던 기억이다. 우리 친척들이 왔을 때 다 판을 펴고 둘러앉아서 밥을 먹고 어른들은 흥에 겨우면 판을 젓가락으로 치면서 노래하고 담배도 피우고 하셨다. 그 와중에도 우리 삼 남매가 누울 자리가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가 지금 나보다 조금 더 어린 3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으로도 얼굴엔 젊음과 웃음이 많은 잘 생긴 미남형이셨다. 눈썹도 짙고 턱선도 분명하고 키 170에 체격도 좋으셨다. 항상 성실히 일하셨고 우리 집은 장사도 잘되어서 돈도 잘 버셨던 같다. 


한 번은 누나, 동생, 나, 엄마 그리고 아버지까지 5명이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방어진에 횟집에 갔었다. 지금 생각하면 10분 거리인데 밤에 오르막 내리막이 있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가족끼리 꼭 부둥켜 앉아서 작은 돌에도 튀어 오르는 그 길을 달렸던 생각이 난다. 그날은 처음으로 아버지가 이제 우리 집도 가족회의를 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내가 공책에 받아 적고 한 사람씩 손을 들어가며 이야기를 하자는 의도였다. 2살 어린 여동생이랑 티격태격하기도 했고 할 말 없는데 뭐라도 말하라고 했던 기억도 난다. 두서너번 가족회의가 뿌옇게 보이는듯하다. 아직도 방어진의 횟집이랑 오토바이는 오래된 가족사진 속에 살아 있다. 


횟집은 친척들이 오거나 정말 특별한 날에는 가던 아주 비싼 곳이었다. 비싸다는 것도 어린 나의 생각으로 특별한 날에만 가는 곳이니깐 그리 생각한 것이다. 하기야 우리 집은 짜장면도 잘 안 시켜 먹었다. 그래도 떡집이라 쌀과 떡은 항상 많았다. 소풍 갈 때도 담임선생님의 떡을 싸 갔고 담임선생님 생일날도 떡을 선물로 줬고 새로 만난 짝꿍한테도 떡을 주었다. 


여름에는 빨간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우리 삼 남매가 들어가서 물장난하며 놀기도 헸고, 아버지도 호수로 물을 뿌리고 같이 웃으며 놀았다. 우리 동네가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 전하동인데 그래도 열심히 일하신 부모님 덕분에 다른 집에선 자전거, 오토바이 타고 다닐 때 현대 엑셀 차를 제일 먼저 사셨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니는 무슨 색이 좋냐고도 물어보셨고 결국 쥐색으로 사셨다. 나중에 소나타를 사실 때도 물어보신 것 같은데 그땐 수박색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특별히 돈을 아낀다고 사신 것은 없는데 차를 아주 신기해하고 좋아하셨던 것 같다. 


내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무작위로 소위 뺑뺑이로 중학교를 진학하는데 당시 가장 선호하던 현대 중학교에 들어가서 좋아하셨다. 그리고 중학교 1학년 첫 모의고사에서 전교 20등, 2학년 첫 모의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니 아주 기뻐하셨다. 중학교 3학년 때는 반장도 하고 담임선생님이랑 아버지가 술도 같이 하시고 이제는 쌀과 떡 방앗간은 안 하시고 집 건축해서 매매하는 사업을 하면서 부동산 매매도 하셨다. 방앗간 할 때는 항상 금고에 떡가루가 묻은 엄마의 앞치마에 항상 현금이 넘쳐 났고 명절 전후에는 돈이 방에 굴러 다녀서 돈에 대해서는 부족하다거나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커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의 양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어릴 때 항상 술을 마시면 그날은 엄마를 때리고 물건을 부수고 했기에 우리 남매는 구석에서 무서워서 울면서 있었고 그나마 누나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만하라'라고 데들고 했었다. 항상 '내가 크기만 해봐라' 라며 맘속에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만큼 키도 크고 힘도 세지니 내 앞에서는 술에 취해 엄마를 떼리는 일이 줄어지는듯하였다.  


나 대학을 서울로 가서 내 추억 속에 아버지의 자리를 거의 찾기 힘들어질 때쯤 다시 군대를 출퇴근하는 공익근무를 하였기에 다시 울산 집에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때는 농촌에서 농사 지으시던 할머니, 할아버지도 연로하셔서 같이 살게 되었다. 할머니께서 거동이 불편하셔서 어머니가 똥오줌을 받아 내셔야 했었다. 그래서 방에 오면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계셨는데 노인 냄새와 대변냄새가 나서 인도의 향을 피워서 나쁜 냄새를 묻고 싶었다. 할머니께서 '채룡아 향은 사람 죽을 때 피는 거다'라고 얘기하셨다. 임종도 못 지킨 어린 장손이 향을 피우고 있으니 무슨 생각이 드셨을까? 너무 이뻐하던 장손이었는데 땅에 계신 할머니에게 몰라서 그랬노라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때도 아버지는 항상 술을 먹고 오면 이제 어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언성을 높여서 싸우기 일쑤였다. 거동 못하시며 누워계신 할머니께는 '그러지 말라'라고 하시며 변해버린 착한 아들이 얼마나 맘에 아팠을까? 왜 그랬을까? 아버지는 본인이 장남이면서 왜 항상 부모에게 술만 먹으면 망나니처럼 목에 핏대를 세워 데들고 고함을 질렀을까? 술 귀신이 들렸다고 굿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또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나도 똑같이 해주겠다고. 내가 똑같이 해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슬펐는지 알게 해 주겠다고, 내가 어디서 배웠겠냐고 바로 당신한테 배웠다고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는 난 2003년 호주로 유학을 떠나고 10년을 호주에 살았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생겼는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믿었던 누나와 조카들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주고 사업이 부도가 나자 돈을 잃었다. 세금 문제로 누나 명의로 해놓았던 건물마저 경매로 날아가게 되었다. 술로 해결될게 아니지만 몇 날 며칠을 술로만 보내고 평생 고생해서 모은 돈을 다 잃었다는 생각에 울며 쓰러지고 술 마시고 토하고 나중에는 토할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우리 집에 나쁜 일이 계속 생기기 시작했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할아버지와 계속 으르렁대며 싸워서 할아버지는 삼촌댁에서 임종을 맞으셨고 술은 알코올 중독 수준으로 매일 몰래 몰래 안주도 없이 드셨다. 그리고 하나 있는 여동생도 조울증과 정신분열로 이상 행동들을 하며 병원에 입원하고 퇴원하기를 10년동안 반복하였다. 그 사이에 나는 호주에 살아서 많아야 일 년에 한 번 볼뿐이었고 통화를 해도 엄마랑 하고 아버지는 끊기 전에 잠시 안부만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2012년쯤에 LG전자 퇴사하고 산업 잠수일을 하러 한국에 오게 되었고 잠수일을 하다가 몸이 아파서 몇 개월을 누워 있게 되고 아버지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왜 그랬을까? 따뜻한 말도 없었고 술에 취하면 다시 호주 가라면서 밀어내고 내가 몸이 좀 회복이 되고 시골집으로 혼자 나와서 살면서 사무실을 차리니 굳이 부딪힐 일도 없이 또 몇 년을 그렇게 보냈다. 


한국에서 5년의 시간을 보내고 호주로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아버지는 이제 아무 낙도 없는 사람처럼 집에만 누워 계셨다.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어디가 특별히 아픈 곳은 없었지만 10년 전 조카에게 돈을 날린 상실감 때문인지 항상 술만 마시고 친구도 없이 5년을 매일 똑같이 술을 2~3병 마시고 담배 피우고 침대에 누워 씻지도 않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셨다. 바로 코 앞에 태화강이라 산책하기도 좋고 집 있고 월세 조금씩 받고 마음만 먹으면 어머니랑 산에 다니면서 건강하게 사실 수도 있는 처지였다. 


본인의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를 했는지 모든 것을 엄마 탓으로 돌리고 마지막까지 항상 술을 마시고 욕설을 하며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보내셨다. 내가 일 년에 한국에 한 번씩 가도 맛있는 것도 먹고 기분 좋게 막걸리라도 하면 좋으련만 밖을 나가지 않고 워낙 거동을 안 하니 술을 사러 나갈 근육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걸음도 힘들어졌다. 밥은 안 먹어도 술은 항상 마셨기에 올여름에는 당뇨로 발이 썩어가게 되었지만 병원 가는 것도 욕을 먹어가며 엄마가 잔소리를 해야 한두 번 가고 치료 중에도 술은 계속 먹으니 곪은 게 몇 달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1951년도에 태어나서 2020년 돌아가실 때까지 70년 아버지의 인생을 돌이켜보니 지난 5년은 집에서 술 마시며 신세를 한탄했고 그 전 10년은 알코 의존성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오히려 더욱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사회에 단절을 심해졌던 것 같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이었을까? 그래도 어머니가 굳건히 방패막이되어 가정을 지키고 계셨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은 평범한 가정으로 위장이 되었지만 가장이 중심을 못 잡으니 관계가 엉망이었다. 나야 외국에 살고 있으니 별 연관이 없었고 어머니께서 몸과 마음이 다 상하셨다. 


아버지의 꽃피는 시절은 언제일까? 고모의 말로는 학창 시절에는 아주 착하고 공부도 잘해서 상고를 들어갔고 군에서도 조개껍질을 모아 탑을 만들고 얼마 안 되는 돈을 모아서 부모를 갖다 줄 정도로 착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혼해서 현대 중공업 배 만드는 데 잠깐 일하다가 고소공포로 다리가 떨려서 돌아다닐 수가 없더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마련한 돈으로 농협 쌀 직판장을 시작해서 다른 고향 친구들에 비해서 빨리 돈을 벌고 집을 장만하고 차도 사셨다. 쌀 배달 끝나고 밤이 되면 혼자 어렵게 사는 누나의 포장마차를 끌고 가고 끝마치길 기다려 끌고 오는 착한 동생이기도 했고 조카들을 챙기는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종종 술을 먹고 엄마랑 싸우고 떼리는 것을 보며 어린 우리 삼 남매들은 우는 것 밖에 할 게 없었지만 사랑싸움인가 나중에는 괜찮겠지 했었다. 우리 삼 남매들도 학창 시절 다들 반에서 1,2등 하며 공부도 잘했고 동네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찬했었다. 주말이면 종종 경주 보문단지로 온천을 가기도 하고 정자에 회를 먹으러 가기도 하고 돈도 잘 벌렸고 남 부러울 게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때가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녔을까 싶다. 




2020년 10월 25일 일요일 새벽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호주에서 한밤중에 누나의 두 번째 걸려온 전화를 받고 직감했다. 첫 번째는 병원 근무하다가 잘못 누렸나 보다 했는데 다시 오니 맘의 준비를 하게 되었고 전화를 받으니 역시 돌아가셨다는 말이다. 몇 년간 술만 먹고 누워 계시긴 했지만 워낙 건강한 체질이라 이제 70인데 맘만 굳건히 하고 술을 자제하고 식사 잘하시고 운동하시면 언제든지 우리 가족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를 때릴 때, 할아버지에게 으르렁 거리며 싸울 때,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지 않을 때, 우리 아버지는 왜 이럴까? 나중에 내가 크면 복수할 거라는 생각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어릴 때 우리 삼 남매에게 장난도 잘 치고 산수도 가르쳐주고 재미있는 아버지이셨다. 그리고 종종 아버지 친구분들이 우리 집에 오신다고 내가 배달 나가신 아버지 대신 버스 터미널 나가면 그냥 나를 다 알아보신다. 너 누구 아들이구나. 완전히 판박이라고 뭘 물어볼 필요도 없었고 나 역시 으레 얼굴만 빳빳이 들고 있으면 누구 집 아들이란 걸 알아볼 거란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의 꽃피는 시절의 나이가 되어서 보니 착하고 맘이 여린 사람이 힘든 세상사에서 상처를 받고 반항하는 사춘기처럼 이 좋은 세상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신 것 같아 맘이 아프다. 봄에는 주남 뒷산에 철쭉이 활짝 피고 여름에는 계곡에 발 담그고 수박 먹으면 아주 시원하고 가을에는 단풍 보며 막걸리 한잔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서 우리 다섯 식구 오손 도손 라면이라도 끓여먹으면 좋으련만 


항상 방패가 되어 가정을 지켜주던 엄마도 이제는 너무 지쳐서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고 여동생은 병원에서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신지도 모르고 나는 호주에서 코로나로 마지막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며 잘난 아들은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 내가 잘나서 잘난 줄 알았는데 나는 아버지를 제일 닮아 있었다. 아버지가 주신 것인데 이젠 자신을 제일 닮은 아들도 못 보고 흙이 되셨다. 거름이 되었고 나는 이제 꽃을 피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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