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는 제주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by 양경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한도>를 보면서 유배문화가 제주사람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조선 500년 동안 300명 내외가 제주도로 유배 왔고, 기록에 남긴 사람은 100명 정도이다. 광해군이나 추사 같은 이는 중죄인으로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위리안치를 당했다.


가장 괴로운 것은 좁쌀 밥이고,

가장 두려운 것은 뱀이며,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다.

-이건(1614-1662)의 "제주 풍토기"에서

김정희 <세한도> 부분


유배인들에게 제주사람의 생활이나 전통, 토속문화는 우매한 지역의 하위문화였다. 추사 김정희(1776-1856) 또한 보리와 메밀이 무시로 자랐을 제주 산천은 고독에 절은 마음에 조금도 위안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가래가 끓는 것처럼 밤새 철석이는 음산한 파도소리, 이명처럼 들렸을 뼈를 에이는 삭풍, 조팝과 자리젓, 멜젓이 거의 전부였을 제주인의 먹거리. 추사는 수시로 아내에게 편지를 써 입에 맞는 음식을 공급받았다.

김정희가 유배 5년쯤 되었을 때 그린 <세한도>는 내면의 풍경에 집중한 그림이어서 제주의 자연이나 정서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유배길에 들른 해남 대흥사에서 이광사의 현판을 떼어 자신의 글로 바꿔 걸라고 했을 만큼 조선 천하 최고의 엘리트 김정희에게 제주는 감옥 이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의식주 너머 수선화나 귤에 반하며 세월을 녹여냈다. 벗에게 보낸 편지에는 지천에 피는 제주 수선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와 그 가치를 모르고 말먹이로 주는 농부의 무지함(?)을 한탄하였다.

제주도 겨울 수선화(한경희 사진)


수선화는 과연 천하에 큰 구경거리입니다. 강절(江浙) 이남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곳은 마을마다 동네마다 한 치, 한 자쯤의 땅에도 수선화가 없는 곳이 없습니다. 화품(花品)은 대단히 커서 한 줄기에 많게는 열몇 송이에 이르고, 예닐곱이나 대여섯 송이가 안 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꽃은 정월 그믐 이월 초에 피어서 삼월이 되면 산과 들, 밭두둑이 흰구름이 질펀하게 깔린 듯, 백설이 드넓게 쌓인 듯 해지는데, 제가 귀양살이하는 집의 동쪽이나 서쪽이 모두 그러합니다. 움막 속에서 초췌해가는 이 몸을 돌아보건대 어찌 언급할 처지이겠습니까만, 눈을 감으면 그만이거니와 눈을 뜨면 눈에 가득 밀려드니 어떻게 해야 눈을 차단하여 보이지 않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고장 사람들은 이것이 귀한 줄을 몰라서 소와 말에게 먹이고 발로 밟아버리기도 합니다. 또 보리밭에 많이 나는 까닭에 마을의 장정이나 아이들이 호미로 캐어버리고는 하는데, 캐내도 다시 나곤 하기 때문에 마치 원수 보듯 합니다. 사물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권인돈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세한도 그림 속에서 제주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문헌 속의 잣나무를 표현한 곰솔 정도다. 세한도의 사의(寫意)는 논어의 자야 편에 나오는 '겨울이 돼서야 송백(松柏)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는 내용인데 제주는 잣나무가 없는 지역이므로 곰솔을 대신 그렸다고 본다. 하지만 제주에서 나고 자란 내가 본 곰솔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세한도의 가옥도 제주의 초가는 물론 조선의 가옥도 아니고 중국화에서 익히 보는 가옥의 형태다. 집의 구조도 엉거주춤한 ㄱ 자 집에 창이 반대로 그려져 있다.


혹자는 "사실주의적인 것을 벗어남으로써 그 안에 내재된 생명성을 담고자 했던 것"이라 하지만 어쩐지 궁색하다. 도올 김용옥의 말에 의하면 추사는 "철저한 모화사상과 엘리티즘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의 심상 속에 최고는 중국에 있었을 테니 당시 마음속의 상황과 지향을 이해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18세기 조선 사대부들에게 완당 바람을 일으켰다는 김정희가 아닌가. 그림으로는 윤두서부터 태동되어 영 정조에 활짝 핀 조선 정체성 찾기가 일시 후퇴한 셈이 된다.

김홍도의 <추경부도> 부분도, 중국 가옥인 둥근 달창 안의 사람은 송나라 문인 구양수이다.


보통사람에게 약이 되는 칭찬도 이미 잘난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 24세에 병조참판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 간 김정희는 청나라 최고의 서예가요 금석학자인 옹방강(1733-1662)에게 ' 학문과 문장이 조선 제일'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니 그는 애써 겸손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추사가 55세에 원악도라 부르는 제주로 귀양 와서 보낸 8년 3개월은 어마 무시한 시간이다. 해남에서 출항해도 사흘이 걸렸다는 9백 리 물길을 건너 찾아온 벗들을 만나는 기쁨, 더구나 제자 이상적은 당시 중국 서책 120권이나 직접, 또는 인편으로 날랐다. 당시 책 한 권 값이 웬만한 집 한 채일 때였다. 그 절절한 고마움이 세한도를 탄생시켰다. <세한도>는 문인화의 정수로 평가된다.

세한도 부분도( 맨 오른쪽 시작 부분)


추사는 역시 글씨였다. 나는 20여 년 전 추사 유물전시관(제주추사관의 전신)에서 김정희의 글씨를 처음 접했을 때, 글씨에 문외한인데도 그림 못지않은 감동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도 그의 글씨는 여전히 고답한 정신세계로 나를 이끄는 힘이 있었다. 제목 옆으로 편지 서두처럼 쓴 ‘우선(이상적의 호) 시상’과 완당이라는 글씨체, 오른쪽 여백이 주는 적요는 쓸쓸한 마음의 정황을 표현하기에 손색이 없다. 세한도라는 글씨체도 그림으로 보인다. 붓의 속도와 누르기 강도로만 표현하는 초묵 법으로 쓰윽 뻗어나간 소나무 가지의 절묘함. 가지 끝에 매달린 솔잎이 푸르게 느껴진다.

<세한도> 1884, 종이에 수묵화,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80호


추사는 종이 세 장를 이어서 황량한 내면세계를 치밀하게 그렸다. < 세한도>는 "상적, 보시게나’로 시작되어 왼쪽의 발문까지 합쳐 한 작품을 이룬다. 가족인 듯 한 두 그루의 곧은 나무를 중앙으로 나누어 그림과 글씨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구도의 세련됨이나 적당한 여백, 메마른 갈필로 표현된 대지의 황량함 등이 현대 회화로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발문은 그림을 그린 거친 종이와는 달리 고급 지를 써서 이어 붙였다. 이 그림 뒤로 당대 17명의 청나라 문인과 20세기 인물인 오세창, 정인보, 이시영의 감상문이 이어져 두루마리 그림이 되었다.

<세한도> 발문 해설


지난해(1843, 헌종 9)에『만학집』과 『대운산방집』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이 지은 『황청경세문편』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니,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쫓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갖다 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쫓듯이 안겨주었다.

사마천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 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쫓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사마천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셨다. 소나무 ·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 존재이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소나무 · 잣나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 · 잣나무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유달리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굳은 절조만을 위함이 아니다. 역시 엄동을 겪은 때와 같은 인간의 어떤 역경을 보시고 느끼신 바가 있어서이다.

아! 전한(前漢)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 과정 당시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에 따라 붙쫓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 땅의 적공이 대문에 방을 써 붙여 염량세태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 완당이 쓰다. (한국 고전번역원 김동석 풀이)


같은 필체가 없다는 김정희 글씨, 추사체를 잉태한 곳이 제주도 유배지라면 척박한 제주의 환경은 추사에게 어둠의 자양을 제공한 셈이다.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길에 해남 대흥사에 다시 들른 김정희는 자신이 잘 못 보았노라고, 원교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걸게 했다고 한다. 이광사도 15년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사람이다.

1/3이 관노비로 살았던 제주 백성의 삶, 유배인은 또 다른 착취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귤 진상이 버거워 귤나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는 일화, 당시 제주인들은 절대적인 식량 부족으로 조팝이나마 배불리 먹으면 부유한 축에 속했다. 유배인들이 제주의 자연과 삶에 동화되어야 할 의무는 없다. 유배문화가 제주의 문화로 정착되지 못한 데에는 지역주민에 군림했던 유배인들의 선민의식도 있지만 간격을 이어 줄 중간 지식층이 빈약이나 당시 신분제 계급사회가 더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다만 제주 대정의 초가집에 살며 '귤중옥(감귤 집)'이라 이름 지은 추사가 중국화에서 보는 토담집을 그려야 했던 정황이 서운한 것이다. 푸른 청춘의 나이 16세에 박제가의 문하로 들어가 사사한 추사이기에 더욱.

<판전> , 한국학 중앙연구원, 김지용 사진


71세의 병든 노구가 세상 떠나기 3일 전에 썼다는 봉은사 <판전>에는 글씨에 바친 추사의 열정과 두 차례의 유배를 통해 더욱 깊어진 세상에 대한 외경과 겸손함, 웅혼하면서도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간 결이 스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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