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 <황금 물고기>

- The goldfish

by 양경인

카카오톡 사진으로 이 그림을 쓸 때 함부르크에 사는 친구가 연락을 해 왔다.

"우리 동네 미술관에 이 그림이 있으니 함부르크 와라, 우리 집에서 게으르게 뒹굴며 박물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며 놀자."

바쁘다면 바쁜 일상이었는데 남편은 " 인생 길지 않아, 기회 있을 때 가는 거야" 독려했다. 친구 제안은 마음을 뜨뜻하게 했지만 나는 못 갔다. 안 갔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고흐의 <밀짚더미> 그림을 보면서 중년이 넘은 내 삶에서 수확할 그 무엇이 보이지 않아 가슴이 허전할 때였다. 그래도 내 속의 목마름을 그렇게 해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파울클레의 <황금 물고기>를 보지 않는다. 카톡 사진도 몇 년 전에 바꿨다. 이 글을 쓰려고 그림을 들여다보니 신산한 삶의 잔영들로 마음이 아려온다. 그리고 나를 격려한다. 나답게 살아왔다고. 지금 33살이 된 딸을 낳기 전에 한창 대두되었던 생명 환경문제 걱정하느라 결혼하고 한 동안 아이 낳는 것을 주저했더랬다. 견고한 관료사회 기성 시스템에 절망한 적도 있었다. 인생은 복병 투성이었고 내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더러는 받아들이며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으로 미약한 힘을 보태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그러나 아직 인생이 아름답다고는 선뜻 말을 못 하겠다. 다만 내 힘이 미치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보듬고 싶다.

나의 경험으로 아름다움은 개개인의 본능에 거스르지 않고 선한 의지를 동반할 때 나오는 일파만파로 번짐 성이 좋은 기운이다.

이 그림을 금붕어라 번역한 것도 보았는데 그 제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내에서 어항 속을 유영하는 금붕어가 아니라 심해에서 적응된 굵고 날카로운 지느러미 가시를 단 물고기로 보였으니까.

내 인생이 저 물고기처럼 스스로 발광체를 발하기를 바랐던 것일까. 물고기가 발광체를 한껏 내뿜었는데도 주위 바다는 해초를 겨우 분별할 수 있을 만큼 어둡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더 빛나는 물고기, 예민한 붉은 가시 때문에 다른 물고기들은 피해 달아날 수밖에 없고 물고기의 고독은 더 깊어진다.

<빨간 새와 함께 >, 한지에 혼합재료, 140.5*71, 1986


현대화랑에서 함부르크에 살던 재독화가 고은님 (1946-2022) 전시 (2025.10.15-11.23)가 열리고 있다.

12년 전쯤 전시에서 가슴에 저장된 그림이 ' 빨간 새'였는데 3주기 회고전 제목이 ”빨간 새와 함께 “였다. 반가웠다. 이 세상 어딘가에 아니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 비슷한 취향 내지는 성향의 사람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동시에 앙앙불락 하던 내면의 외톨이 감정도 보듬어줄 수 있었다.


저 빨간 새는 어둡고 외로운 사람을 껴안고 있다.. 처음에는 사람이 새를 끌어안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이제 보니 새에 의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람이 아닌 새, 그것도 붉은 새와 교감을 넘어 절절한 포옹은 서로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낼 수 없었을 당시 화가의 표상이고 또한 나의 모습이다. 그때 난 긴 항암치료를 막 끝낸 시기였다.

<큰 물고기 식구들>, 한지에 혼합재료, 275*279, 1991


노은님 화가도 물고기를 그렸다. 파울클레의 황금물고기와 같은 물고기를. 그러나 크레용으로 그린 것처럼 형태는 단순하고 색조는 환하다. 큰 물고기의 눈은 활짝 떠 분별 약한 물고기들을 살피고 있고 날개 같은 지느러미는 둥지가 되어 어린 물고기를 지키고 있다. 이 그림을 그릴 즈음 노은님 화가는 붉은 새의 음울과 외로움을 통과한 것 같다.

파울클레 <the gold fish> , 49.6* 69.2, 유화, 1925, 함부르크 미술관 소장


파울클레(1879-1940)는 나치스 정권을 살았고 그들이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1925년 그의 나이 47세에 그린 이 물고기는 요즘 말로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모양새다. 주위의 물고기들은 저 가시에 걸리면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달아나고 있다. 황금물고기는 홀로 고독하다. 예술가의 길이 그러한 것처럼.

<큰 물고기 식구들>, 한지에 혼합재료, 275*279, 1991


이력을 살펴보니 노은님의 정서 뿌리는 여유로웠던 유년시절과 부모님이었다. 1946년 전주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가 돌아가 소녀가정이 되었고 파독 간호보조원 모집으로 독일에 가서 혼자 그림을 그렸고 그게 병문안 온 독일 간호장 눈에 띄었다. 독일 간호장은 병원 내에 전시를 주선했고 그 전시가 예술대학 교수 눈에 들어와 뒤늦게 미술을 공부하고 1990년에 한국인 최초로 함부르크미술대학 정교수가 되었다. 역시 파독 간호보조원으로 건너가 병원 송년파티에서 부른 노래로 후원자를 만나 메조소프라노 독보적 성악가가 된 김청자가 있다. 하여 독일이란 나라의 예술 풍토를 생각해 본다. 재력도 배경도 없는 동양여성을 재능 하나만 보고 예술가들을 키워낼 수 있는 나라.


노은님 그림은 노자사상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내게는 불교의 무애사상 같은 느낌으로 왔다. 버릴 때 무언가 온다고 움켜쥐지 말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었다.

이 전시를 격조했던 친구와 같이 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생강을 다듬어 동치미를 만들며 전시 그림보다 친구와의 시간이 더 귀하게 느껴진 것도 늦가을의 축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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