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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청명상하도"

by 양경인


20년 전 그때가 아슴아슴 떠오른다. 초겨울 어둑한 강의실에서 중국회화사를 들을 때였다. 독일에서 중국회화를 공부하신 여교수님은 과묵했지만 수업에서는 친절했다. 슬라이드로 보여주시는 송대의 회화는 헉 소리가 나올 만큼 기량과 깊이가 대단했다.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 중화라고 뻐길만하다고 수긍하면서도 기가 죽었다. 그렇게 고답한 송나라 산수화 보느라 몸과 머리가 분리되어 기진해 있을 때 이 그림을 보여주셨다. 갑자기 저잣거리의 아우성이 들리며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우리나라 변방 제주시 중앙로 주변에 신작로가 생길 때 초등학교를 다닌 나는 종종 '신작로 키드‘라고 말하곤 했다. 내 정서의 뿌리를 이루었을 그 무질서의 공간이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보는 순간 반가움과 그리움으로 소환되는 것을 보면 살아가는 데는 특별히 좋은 환경도 나쁜 환경도 없는 것 같다.


장택단 < 청명상하도>는 청명절을 전후한 송나라 수도 변량(卞凉, 변하, 현재 카이펑 시, 한국어로는 개봉)의 풍광과 번화함을 묘사한 성시(城市) 풍속도다. 개봉을 수도로 삼은 이유는 사방과 통할 수 있는 편리한 교통, 즉 경제적 필요에 의한 것으로 조운은 가장 핵심적이었다. 당시 개봉은 인구가 100만 명의 도시였다. 중앙정부의 관리나 군인 그 가족들이 주로 거주하고 한편으로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상점가들이 늘어서 행상이나 노점상, 예인, 직공이나 서비스업 등 그날그날을 살아가는 요즘말로 일용직 노동자들이 살았다. 성안 깊숙히 들어가면 절과 기생집이 같은 곳에 있었다.

이 그림은 5미터의 긴 두루마리 형식으로 북송 말에서 남송 초, 정치적으로 불안하던 시기에 제작되었는데 청명절을 전후하여 도성을 들어가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도성으로 들어오는 장면

이른 새벽 짐을 진 나귀를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등에 매단 양쪽 광주리에 짐을 많이 진 뒤쪽 두 나귀의 목은 아래로 쳐져있다. 먹 선으로 툭툭 표현된 나귀의 다리며 방향을 트는 맨 앞 나귀의 표현이나 그 나귀를 다스리는 깡충 올라간 바지의 총각머리를 한 소년의 긴장된 포즈 등 동세가 절묘하다. 나귀 등의 짐은 석탄이다. 개봉은 목재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연료공급을 석탄에 의지하고 있었다. 나귀 행렬 뒤로는 소년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가 뒤 따르고 있다. 나귀와 인물의 표현도 뛰어나지만 갈필로 표현한 새벽길과 아침 공기, 묵의 농담으로 표현되는 원근법을 보면 수묵담채화로 손색이 없는 새벽길 묘사다.

도성 입구 마을의 버드나무와 백양나무


처음 시작되는 산수표현에 압도되는 이유는 먹의 능숙한 사용에 있다. 전체적으로 먹을 주된 색깔로 하고 부분적으로 엷은 자주색이나 연두색 청회색 등이 사용되었다. 버드나무는 엷은 채색을 하고 그 위에 선으로만 그리고 멀리 백양나무는 해조묘( 앙상한 나뭇가지를 게의 발가락처럼 그리는 것)로 표현했다. 그림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버드나무는 뿌리에 물을 정화시키는 성분으로 수나라 때부터 운하 제방용으로 역사가 깊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에 나오는 버드나무는 거의 둥치가 파이고 뒤틀린 고목으로 표현되어 있다.


운량선(식량을 실어 나르는 배)이 하역하는 장면


강 양안의 화물을 부리고 정박해 있는 빈 배들과 하역작업이 끝난 인부들이 식당에 들어가는 장면이다. 선주를 맞이할 식당은 차일 앞에 푸른 등과 주렴이 늘어진 기와지붕이고 일꾼들이 들어서 요기를 하고 있는 주막은 초가지붕이다. 선주는 식량 부대자루에 앉아 지시를 내리고 있고 일을 마친 인부들을 상대로 검은 내리닫이 옷을 입은 점쟁이 노인이 다가가 운세를 뵈주마고 상행위를 하고 있다. 이렇게 돌아다니며 점을 치는 사람들은 하급이고 좀 더 능력이 있는 자들은 점포를 차려 손님이 찾아오게 한다. 장택단은 변경의 주요 강인 변하에 강남의 곡식과 재물을 실은 조선(漕船: 조세로 받은 미곡을 운반하는 배)을 그려 중원과 북방지역의 경제교류를 반영하였다.

중국 정크배와 뱃사람들


기다란 노 하나를 8명의 사공이 젓고 있다. 왼쪽의 4명은 몸을 뒤로 젖히며 발끝이 들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고 오른쪽의 4명은 노가 뒤집히지 않게 내리누르고 있다. 정박하는 배 중간 칸에는 무심한 듯 밖을 내다보는 여성이 보이고 배 난간 위에는 남성이 손을 휘저으며 배의 운항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런 상황에 아랑곳 않고 작은 배에는 여성이 빨래를 하고 오수를 버리고 있는데 쏟아내는 물줄기가 실감 난다. 나뭇가지에 걸친 것은 치마이고 삼각형 선이 있는 것은 속옷 개당고, 긴 저고리 격인 배자가 널려있다.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 같지 않게 제각각의 모습이 변하 뱃사람들의 일상임을 보여준다.

여기 정박해 있는 배는 정크배다. 중국 정크배는 중세까지 세계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범선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달한 이 목선은 선체가 바둑판 모양의 격벽(隔壁)에 의해 나누어져 있어 외간이 찢어져도 일부만 침수돼 항해 중 배를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인들이 배를 격벽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은 대나무를 길이로 잘랐을 때의 모양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격벽이 있는 정크배는 물이 깊지 않아도 용골이 없어 바닥이 평평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홍교를 지나가는 배


두 번째 단락은 다리를 중심으로 그렸다. 무지개 모양을 한 목구조 다리를 홍교라 한다. 이 다리는 기초 기둥을 설치하지 않고 거목으로 뻗어나가면서 겹쳐서 쌓은 구조로 되어있는 교량 건축 양식으로 후대사람들은 이 그림을 통해서 그 형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다리 아래 한 척의 조운선이 돛대를 쓰러뜨린 채 다리 밑을 막 통과하고 있는데, 뒤의 배 항로를 막고 있어 자칫하면 부딪칠 위험에 있다. 강은 폭이 좁고 수심이 깊고 유속이 빨라 선원들은 배가 안전하게 다리 밑을 지나가게 하기 위해 삿대를 잡고, 방향타를 잡고, 돛대를 내리고 있고, 다리 위 사람들은 밧줄을 던지며 매우 긴장된 모습이다. 다리 위 행인들도 어쩔 줄 몰라하고, 양안에 정박한 뱃사공들은 손을 들어 향로를 가르쳐주며 뒤로 오는 배와 부딪치는 위험을 방지하고 있다. 다리 위와 아래, 부둣가 사람들이 배들이 홍교를 무사히 통과하도록 일제히 위기를 돕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다리 위에서 누군가 밧줄을 던져주는데, 화가는 이 장면을 마치 공중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장택단은 원근법을 활용하여 전체적으로는 조감법을 썼고, 홍교 주변을 그릴 때는 고원법(高遠法)을 사용하였다. 긴 두루마리 형식은 감상자의 시선을 상하로 움직여 연속적인 효과를 주며 이동식 원근법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것은 화폭의 사용과 감상을 실제 하나로 결합시킨 것으로 마치 이동카메라처럼 우리 시야 앞에 파노라마를 펼쳐 놓는다.


변하는 청명절 첫날에 배를 띄웠다. 변하의 하구가 열리면 황하의 강물이 들어와 변하를 채우고 기다렸던 배들은 곡물과 승객을 싣고 변경으로 향했다. 청명절은 수로가 분방해지고 저잣거리가 시끌벅적 해지는 때다. 변경 사람들은 이 첫날을 놓치지 않으려고 배들이 줄지어 변하로 들어오는 상하(上河)를 구경 갔다.

홍교 아래 풍경( 부분도)

다리 위에는 수레나 말들이 왕래하고 있다. 다리 밑의 긴박한 상황과는 관계없이 취객도 보이고 홍교 입구에서 일꾼들이 서서 음료(飮子)를 주문하고 있다. 노점상들은 일산(日傘, 파라솔)을 펴고 펼쳐놓고 장사를 하고 있다. 왼쪽 아래편에는 말을 타고 가마를 탄 관원이 마주 오다가 고함치며 길을 다투는 장면이 보이고 농기구를 펼쳐놓고 호객 행위를 하는 장사꾼, 아래쪽 맨 만물장수의 수레, 곡식 자루를 지고 가는 당나귀의 모습 등이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성하고 있다. 나귀를 앞에 끌게 하고 앞 뒤로 사람이 끄는 수레를 독륜거라 한다.


홍교를 내려오면 보이는 술집 <각점>과 <천지미륵>


홍교 아래 있는 간판 <脚店>은 소매술집이다. 봉건사회 송나라에서 일반 평민들은 각점(걸어서 가는 주점)밖에 갈 수가 없었다. 북송 조정은 일부 술집에게 술누룩은 반드시 관에서 구매한다는 조건으로 술을 주조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술을 주조할 수 있는 술집은 소수였기에, 송 조정은 술을 주조할 권리가 없는 술집들에게 국영 양조장에서 술을 사도록 하거나, 술을 주조할 수 있는 정점에서 술을 사도록 했다. 정점에서 술을 사서 파는 가게가 바로 脚店(각점)이었다. 도시의 주점은 모두 바깥문에 색깔 비단으로 치장한 아치를 꾸미고 있다. 문의 양쪽에 천지미록(天之美祿)의 글자가 보이는데 향기로운 술이라는 뜻으로 각점으로부터 나온 주점의 하나이다. <天之美祿> 상점 앞에서 묵직하게 들고 있는 것은 당시 화폐로 통용되던 송전이다. 동전 몇십 줄을 수레에 싣자 수레 주인이 세어보고 있다. 당나라보다 10배 넘는 동전을 주조하였지만 함량이 제각각이어서 철전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철전은 소금 500그램을 사기 위해 철전 700그램이 필요할 정도여서 이후 세계최초의 지폐가 나왔고 이를 교자(交子)라고 한다.

송대의 철 생산량은 당나라 때에 비해 6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철의 대부분은 개봉으로 보내져 수천 명의 장인들이 대규모의 작업장에서 철로 칼, 무기, 갑옷 기타 무기 등을 생산하였다. 이로 인해 제련을 위해 연료를 공급하던 주변 지역의 숲이 1100년 정도에는 거의 발가벗게 되었다. 더 이상 공급할 땔감이 없게 되자 제련소에서는 송풍장치가 달린 용광로에 석탄을 때야만 했다. 그림의 첫 장면에 나오는 나귀 등의 짐은 도성 사람들의 땔감인 석탄이었다. 그래서 이 그림의 추정 연도도 북송 말인 1110년대 이후로 본다.

<수레바퀴 정비소>


부두에서 멀어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아침에 보았던 나귀 행렬이 들어오고 있다. 빈광주리를 이고 들어오는데 노독에 지친 모양새다. 그 앞쪽에는 수레 정비소가 있어 바퀴 수선 작업이 한창이다. 식당 옆 해조묘로 표현된 나무는 목단으로 추정한다. 식당에는 네 사람이 앉아 있는데 세 사람은 차를 마시며 한담을 하는 모양새이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 앞에는 찻잔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행이 아닌 듯하다. 세 명의 대화에는 관심 없고 턱을 괴고 밖을 보며 생각하는 모습이다. 이렇게 장택단의 인물들은 어떤 관계에 놓이면서 무언의 설명을 담고 있다. 왼쪽 강기슭에는 누운 사다리를 지나 배를 타려는 세 사람이 보이고 멜대를 맨 사람이 먼저 오르고 있다.

후단에 묘사한 것은 시내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림의 중심부에 있는 높고 큰 성루는 대송문(大宋門)이다. 단독 처마에 우진각 지붕이고 두 종류의 계단을 올라가면 판문 안에는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하는 큰 북이 놓여있다. 용마루 끝 백양나무 가지가 움트는 곳에 무너진 토성이 보인다. 개봉의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 있어 토성은 내성의 성벽이다. 하지만 희미하게 처리한 점이 방어태세가 허술하다는 인상을 준다. 성문을 지나는 낙타 대오는 전체적 화면 구성에서 무질서 속의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복잡한 사람 무리와 건물 속에서 낙타와 수레의 등장은 화폭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성루에 기대어 잡답하는 사람들, 무언가 놀이에 열중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태평성대를 느낀다.

성문을 빠져나가는 낙타 등에는 서적이 실려 있다. 송나라는 인쇄술의 발달로 역사상 처음으로 대량의 중간계급 수요를 겨냥한 서적들을 출판했다. 중국은 유럽보다 5백 년이나 앞서서 책을 인쇄하였고, 문자는 이제 식자층의 특권이 아니었다. 관학(官學)과 사학(私學)이 늘어났고 모든 농민과 상인과 장인이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새로운 도시 부자들은 부를 이용해 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갈수록 새로운 관료 집단에서 상인 출신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졌다. 고려가 송나라에서 수입하는 주요 품목도 서적이었다.

가운데 앉아있는 사람은 세금을 걷는 관리로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고 옆에서 거들고 있는 사람 뒤로 큰 저울이 놓여있다. 짐꾸러미는 부드러운 것이 단단히 묶여있어 옷감으로 보이는데 상인 한 명이 과중하게 매긴 세금에 놀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나무 표현이 다소 도식적인데 비해 낙타나 말 노새, 그림 전반에 등장하는 소 등의 표현은 매우 사실적이다.

서예작품을 수레덮개로 사용한 독륜차


홍교부터 다양한 수레들이 등장한다. 한나라 때 수레가 등장했지만 일반 백성들은 타기 어려운 신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송대부터는 황제나 귀족, 사대부들이 주로 가마를 이용함에 따라 수레는 거의 짐을 싣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바퀴가 하나인 독륜차 수레 덮개는 대형 병풍에 주로 쓰이는 초서(草書) 서예작품이다. 이런 예술품이 가치가 없을 정도로 위상이 떨어진 원인은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고 난 후 이전 왕조와 정치적 연관이 있는 문인들을 배척하는 과정에서 필묵에 화가 미쳤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초서 글씨 포장지를 보며 일본 동대사 정창원의 <신라장적> 이 떠올랐다. 통일신라 4개 부락의 살림살이를 기록한 이 문서는 신라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불상을 감쌌던 포장지였다. 종이가 귀한 때이니 시효가 끝난 공문서를 포장지로 활용했을 것이다. 독륜거 안의 물건도 꽤나 귀한 것으로 짐작된다.

술집 <정점>과 꽃 파는 남자, 그리고 瓦子句欄( 이야기꾼, 말쟁이) 풍경


우선 가장 눈에 띄는 상점은 술집 정점(正店)이다. 정점은 술 도매집과 동시에 고급술집이기도 했다. 2층 술집 문 앞에는 비단천으로 장식한 구조물인 환문(歡門, 손님을 환영하는 문)이 있다. 술집 앞의 화려한 장식을 채루환문(綵樓歡門)이라고 하는데 고급 손님을 끄는 점포 앞의 장식이다. 정점 앞으로 지나가는 2채의 가마 중 뒤의 가마에 창문을 열고 바깥을 구경하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거리에서 걸어 다니는 여성의 모습이 거의 안 보이는 것은 이 그림을 그리던 12세기에는 전족이 막 유행하던 시기와 연관이 깊다.

정점 앞에 바구니를 놓고 꽃 파는 상인의 모습이 보인다. 송대 도시사람들은 남녀 구별 없이 꽃을 사는 일이 일상이었다. 말머리바구니에 꽃가지를 꽂아 놓고 부부인 듯 한 사람에게 팔고 있는데 여성이 시선이 다른 데 가 있고 꽃장수는 남성과 흥정을 하고 있다. 화물 운반용으로 가장 큰 수레인 태평 거 2대가 그림 왼쪽 끝에 보이고 그림 중앙에 수염 난 사내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이 이야기꾼의 재담을 듣고 있고 있다. 스님도 여성도 관리들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는 사람은 부채로 얼굴을 슬쩍 가리고 듣기에 열중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말쟁이’라고 하였고 장소를 ‘와자 구란(瓦子勾欄)’이라 불렀다. 몰려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먹거리를 파는 상인은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청명절만 되어도 벌서 부채가 등장하고 거리에는 냉음료 장수가 득시글거리고 있다.

正店이 위치한 사거리의 서북쪽에는 “劉家上色沉檀楝香”이라는 간판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은 향료점이다.

당시 송 왕조는 국가에서 전매제도에 향료도 포함시켜 교역을 장악했다. 향로점 앞을 지나는 손으로 미는 수레는 죽이나 미음을 파는 상인이 주로 사용하였다. <羅錦匹帛鋪>라는 포목집도 보이고 아래에 <王員外家>라는 커다란 여관 간판도 보인다. 여관 앞을 지나는 수레는 전방에 길게 늘인 막대기를 우마 등에 연결하여 끌게 하는데, 술집 정점에서는 이런 수레로 술을 나른다. 도시 안으로 들어올수록 관리나 귀족(?)들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여기서 필자가 귀족이라 함은 긴 겉옷에 모자를 쓰고 부채를 든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편의상 부르는 호칭이다. 이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는 상국사(相國寺) 절 바로 옆에는 기방이 자리 잡고 있었고 첩과 기생은 교역품목에 들어갔다.


그림의 마지막 장면이다. <趙太承家>라는 약국의 앞에는 아이를 안은 두 부인이 상담을 하고 있다. 깔끔한 차림의 약사, 당시 귀하게 치던 목조의자 위에는 털 양탄자가 깔려있다. 입구 양쪽에는 이동이 가능한 큰 입간판이 있는데 이러한 간판은 구체적인 진료 범위를 소개하고 약방을 광고하는 것으로 북송 말 의학이 이미 세세히 나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입간판 옆으로는 살림집으로 보이는 대문이 열려있다. ‘趙太丞家’ 옆에는 우물이 있는데 물을 길어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이 시기 개봉의 물은 그 수질이 좋지 못하였고, 우물은 수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리 곳곳에서 얼굴을 씻을 물이나 음용수를 팔러 다니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림 오른쪽에 장난감 류를 잔뜩 지고 가는 사람을 화랑(장사꾼)이라고 한다. 저 모습은 송대에 출현하여 우리나라 1980년대까지 시골 운동회에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던 풍경이다. 갓을 쓰고 의젓하게 지나가는 사람은 고려인으로 보인다. 하얀 말에 시종을 4명 거느린 매우 위엄 있는 모습이다.


우리 왕조가 번성하니 머나먼 외국에서 와서 황제를 뵈려는 사람이 길에 계속 이어졌는데 그중에서 오직 고려국만 풍치가 있고 고상한 것을 깊이 숭상하여 중화풍에 점차 감화를 받았다. (고려의) 교묘한 기술이나 솜씨의 정교함은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고 본래 회화에도 뛰어났다. 정충인 집에 (고려 그림인) <착색산수> 네 권이 있고...(후략)

( "중국대세시기 1권"중 고려국 부문 588쪽 , 이창희역, 국립민속박물관)


성루를 지나가는 낙타 상인들을 통해 국제 도시였던 개봉의 면모를 보여주듯 고려 관리의 모습은 조공무역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고려 조공무역은 사신단(使臣團)에 의한 교역과 상인단에 의한 교역무역으로 이루어졌는데 조공 제도는 강압적이라기보다는 자발적이었다. 조공이라는 명목상의 수량을 제공함으로써 중국시장에 접근하는 것이 속국이 취할 수 있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속국들은 조공을 바치기 위해 서로 경쟁하였는데 그들의 목적은 돈벌이가 되는 중국시장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이 시기 송나라는 귀족사회였다. 상업의 도시 개봉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모에서 알 수 있듯. 귀족 관료와 부유한 상인들은 크게 번성한 반면 대다수 농민들은 생활고에 허덕였을 것이다.


지금부터 800여 년 전에 북송의 화가는 < 청명상하도>를 그렸다. 중국회화 사실주의적 전통의 내용과 형식에서 이 그림만큼 집대성된 예는 그 후에도 없었다. 이 그림은 남송 때 매우 인기가 있어 잡화점에서 모사본을 매권 1금(每卷 1金)씩 판매하여 모사본이 매우 성행하였으며 이 그림의 모사는 청나라 초기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에 이런 류의 풍속도가 나온 것은 500년 정도 후인 영정조 시대일 것이다. 그런 우리나라가 지금 한류 문화를 중국에 파급시키고 있다. 시대 별로 여러 본의 청명상하도가 있지만 중국이 국보 1호로 지정한 것은 장택단이 그린 북송시대 풍속화 < 청명상하도>였다.


북경고궁박물관에서 구입한 이 그림을 집에서 감상하려고 두루마리를 펼치면 거실 끝에서 시작하여 주방 끝에 가 닿았다. 세어보니 700명이 넘었고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3분의 2가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관리나 귀족의 위습 표현이 딱딱하게 정형화되는 반면 일하는 사람들의 위습 선은 움직임이 많은 만큼 활달하고 리드미컬했다. 전체 등장인물 중에 여성은 겨우 30명이 나오고 어린아이 수도 거의 같은 숫자였다. 인물들의 비례미도 가로 24.8센티 화폭에서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서 있는 경우는 3센티를 거의 넘어서지 않는다. 허리를 약간 구부리면 2.5센티미터, 많이 구부리면 2센티미터의 길이를 유지하는데,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중국인이면서 아시아 인의 보편적 인체 비례미를 느끼게 했다. 그래서 그림 속의 인물들이 유년에 만난 나의 친근한 이웃들로 느껴진 것이다. 인물들의 동작도 같은 포즈가 없을 만큼 다양하게 묘사되어 생활전선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역사의 주인이요 동력이라는 사실을 해학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그림은 장택단 화가의 눈에 포착된 세계관의 반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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