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월북화가 최재덕

북으로 간 화가 (3)

by 양경인

최재덕(1916-73) 화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2021. 2.4 ~ 5.30 )에서다. 그 전시에서 정물화 <포도>와 <금붕어>를 만났는데 단순한 형태, 독특한 색조와 질감이 뇌리에 깊이 와닿았다. 그 외에도 풍경화 몇 점이 더 있었는데 <한강의 포플러나무>가 특히 기억난다.

<한강의 포플러나무> 1940년대, 캔버스에 유체, 개인소장


그림 앞에 섰을 때 한강 모래벌판에 일렬로 서 있는 포플러 나무들이 은성한 잎을 일제히 흔들면서 보약 같은 바람을 선사했다. 한강 전체를 낙원으로 만드는 건 고흐의 아몬드나무에서 보았던 청록의 색조이고 그림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빛과 대기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잎의 생명감이었다. 예술이 시공간을 넘어 나에게까지 올 때는 보편성의 힘이 작동한다. 최재덕 그림이 내게 준 끌림의 정체를 무엇이었을까?


<금붕어>, 1940년대


어항 속의 금붕어를 찬찬히 들여다본 적도 없는 내가 왜 이 그림에 꽂혔을까. 20년 전 일본 광륭사에서 수많은 목조불상들과 영접하고 귀국하는 길에 < 반가사유상> 한 작품만 선명히 떠오른 것과 비슷한 체험이었다.

최재덕의 금붕어들은 용기에 비해 너무 커서 산소부족을 느낄 것만 같은데 커다란 네 마리 금붕어가 이런 반추상의 형태로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투명한 어항은 청회색의 어두운 실내를 담아내고 있는데 파란 선으로만 구획해 놓은 어항의 표현도 화가의 기량을 느끼게 했다. 이쯤 되면 최재덕의 금붕어는 내가 그동안 보았던 완상용 금붕어가 아니었다. 공간을 한없이 넓히며 자유로이 유영하는 최재덕의 <금붕어>는 본능에 충실한 한 생명으로의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포도>,1940년대


이 그림 제목을 ‘막사발’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릇의 정취가 화면을 채우고 있다. 황토의 거친 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뭉툭하고 투박한 굽이 당시 서민들의 생활용기다. 붉은 황톳빛 배경은 막사발의 짙은 미색과 어우러져 차분하고 편안하다. 화가는 조선의 민족적 색감을 오방색 같은 원색이 아닌 중간 톤의 흙빛, 막사발 빛으로 표현했고 이 깊고 조화로운 색감이 포도 한 송이를 웅숭깊은 과일로 만들었다. 농익어 꼭지가 말라가는 검자줏빛 포도가 막사발의 색감과 어우러져 푸근한 기운이 세포 속으로 스미는 감동을 주었다. 최재덕은 해방공간에서 표지화나 삽화에도 포도를 그렸는데 포도는 백색테러가 횡횡하는 시기에 깨어지기 쉬운 존재로 당시 진보적 청년의 영혼과 육체를 상징한다고도 했다. 이 <포도>의 제작 연대가 정확하지 않아 조심스럽지만 싱싱한 포도송이가 아니라 꼭지가 마른 포도를 그린 화가의 마음을 다시 헤아려 본다.


최재덕은 경상남도 산청 출생으로 본명은 최재득이다.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서울서 다녔고 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도쿄의 태평양 미술학교에 유학하였다. 1930년 대 일제의 회화 수준은 파리 중심부에 뒤지지 않을 만큼 발전되어 세계미술의 주요 사조들이 실험무대가 되고 있었다. 이 시기 작품들을 보면 최재덕은 서구 모더니즘 사조를 수용하면서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특성을 작품 안에 도입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였다. 최재덕은 재학 중에 조선미술전람회에 거듭 입선하였고, 졸업 후에는 ‘신미술가협회(1941-44년)’에서 활동하였다. 일본 유학한 화가 이중섭, 이쾌대, 진환 등이 활동했던 이 단체는 색감과 구상의 새로운 탐구를 시도하며 도쿄와 서울에서 동인작품전을 가졌다. 최재덕은 여기서 신선한 색채구사와 서정적 표현감각의 독특한 작품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미술가협회 회원들 (왼쪽부터 홍일표, 최재덕, 김종찬, 윤자선, 진환, 이쾌대)


해방 후에는 조선미술동맹(이하 미술동맹) 서울지부 집행위원장으로 일했다. 미술동맹에서는 <이동미술전람회>를 주관하여 전국 순회활동으로 미술계몽운동을 펼쳤다. 해방공간에서 최재덕의 조직 이력을 보면 대중예술에 대한 고민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단체의 상부가 조선공산당 영향 하에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이하 민전)’이었다. 분단이 고착되고 대한민국정부는 사상개조와 반공선전을 위해 국민보도연맹(이하 보도연맹)을 창설하고 화가들의 전향을 강요했다. 최재덕은 좌익으로 분류되어 전향각서를 쓰고 정부주관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그림을 출품했다. 국전은 1949년 , 9월 문교부 교시 1호로 설립 ‘대한’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데 미술이 타 장르보다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화가들 참여를 독려하였다. 최재덕은 국전 1회에 추천 작가로 <산>을 출품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법도에 맞게 아름다운 분위기를 아담하게 담아냈다 “ “전통적 고전주의로 회귀했다”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그림” 등의 평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북한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최재덕은 동원(혹은 자발적)되어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를 그렸다. 전시치하에서 화가들은 이 선전사업에 참여해야 반동분자가 아니라는 증명서와 양식을 배급받았으니 생존 차원의 선택일 수도 있겠으나 그가 월북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짐작되는 지점이다. 아내는 북에서 여성동맹 간부를 했다고 한다. 그 말은 남한에서 적극적 사회주의 활동이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방공간의 좌익이란 민중(당시 용어로는 인민)이 억압된 구조를 해체시키고 경제적 신분적으로 평등한 삶을 지향하는 가치를 우선시했던 사람들이다. 당시 대다수 조선인이 원했던 정치체계는 사회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나라였다. 미군정이 발표한 동아일보 조사(1946.8.13일 자)에 의하면 조선인의 70%가 사회주의(자본주의 14% 공산주의 모름 5%)를 선택했다. 해방 당시 A급 미술가 중 100여 명이 월북했고 전체 화가 수는 170여 명에 이른다. 문교부는 좌익으로 분류된 작가의 저작물은 중등교과서에서 삭제해서 우리 세대는 1988년 해금조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근 40년 동안을 반쪽 역사로 우리나라 문화예술사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남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잘 나갈 수 있던 화가들은 친일 경력이 있거나 당시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던 가치나 사상에 비껴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경상도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을 다녀온 그가 사회주의 미술운동을 하고 월북을 감행한 결정적 이유는 뭘까? 태평양미술학교 동기생인 박득순은 “그의 집은 다섯 대문 정도 되는 으리으리한 전통 한옥이었다. 그의 그림은 우수하였고 전람회 때마다 그의 명성이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데생력은 좋지 않았으나 깊이가 있었다. 사실적인 그림은 못되고 장식적인 그림이라고나 할까.(중략) 최는 좌익을 할 만한 위인은 못되었다.”라고 회상했다. 박득순이 말하는 좌익은 무엇일까.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많은 화가 중에는 유복한 배경을 가진 화가가 많았고 그들 중 북을 택한 화가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평양 부호집안 출신의 화가 김병기(1916-2022)의 회고에서 최재덕은 혈기왕성한 낭만적 사회주의자 청년으로 묘사되어 있다. 북한에서 북조선미술동맹 서기장을 하다가 회의를 느껴 1947년 남으로 내려온 자신을 향해 당신은 변절자라며 “그래 북에서 미술동맹서기장까지 한 사람이 거기 일은 어찌 팽개치고 남으로 내려올 수 있느냐?”라고 꾸짖듯이 말하여, 그와는 말을 섞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전시회장에서 본 김광균의 글로 최재덕의 면모를 짐작해 본다.


천사같이 순수하고 최고의 기량을 가진 화가 두 명이 이중섭과 최재덕인데, 이북출신 이중섭은 남으로 내려왔고, 이남출신 최재덕이 북으로 올라갔으니 결국 쌤쌤이다.”


최재덕과 이중섭은 공통점이 많았다. 나이는 동갑이고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본 제국미술학교를 다니다 문화학원으로 옮겨 졸업 후에는 신미술가협회에서 활동하였다.


북에서의 작품 활동

해방 직후 북한 예술계는 일제 강점기의 잔재를 청산하려고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적극 수용했다. 1950년 대 전후 북한 화단은 “미술은 인민의 것으로”라는 구호 속에 현장근로인민들의 투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주로 제작되었다. 최재덕의 월북시기는 한국전쟁 중일 때라고 추정한다. 북으로 간 최재덕이 가장 먼저 발표한 작품도 공장 현장에 파견되어 그린 인민의 노동 모습이다.

최재덕 <집단농장> 캔버스에 오일, 32*39, 1950


섬유공장에서 옷을 생산하는 장면을 직접 관찰하며 그린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원근감을 강조하여 넓은 시야로 공장 내부를 표현했다. 밝고 화사한 색조는 우리가 알고 겪은 당시 남한사회 공장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생동감이 넘친다. 구체적 인물보다는 배경이나 풍경에 주안점을 두고 전체적 분위기를 연출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월북한 작가들과 다른 점이다. 이 시기 남쪽 화가들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의 모습이나 피난 상황을 그린 화가는 꽤 있지만 노동 현장의 모습을 그린 화가를 나는 보지 못했다.


최재덕 <삼판의 트럭> 캔버스에 오일 , 1951 (이예은 논문집에서 가져옴)


1940년대 후반부처 1950년 대 초반까지 북에서는 풍경화를 일제와 브르주아 형식주의로 간주하여 ‘오염된 장르’로 여겼다, 산비탈에 흙먼지가 날리고 가늘고 앙상한 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있는 황량한 모습의 이 그림은 당시 북한이 지향과는 일정 정도 거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흑백으로 남은 <군대를 옹호하는 인민들>(1952년)이나 <조선의 아이들과 차코시 마차시 동지>(1953년)에는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거나 사회주의 국가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인민들의 모습이 중심이 된다. 차코시 마차시는 당시 헝가리 수상으로 북한에 병원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후 ‘주체사상’이 통치이념이 되자 북한미술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서 ‘주체적 사실주의’로 전환하여 농민이나 어민 등을 표현하는데도 밝고 선명한 미감의 ‘주체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룬다. 내용은 사회주의적이되 형식은 민족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김일성의 교시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재덕의 그림은 북한당국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최재덕만의 표현 기법과 인물 표정의 깊이를 담아내었다. 이후 최재덕은 배경이 강조되던 화법에서 나아가 인물화 표현을 중점적으로 묘사한다.


<남자광부> 캔버스에 유채, 1956, 121*65


제철소에서 쇠장대를 한 손으로 잡고 앞을 가리키며 무언가를 응시하는 오른쪽 인물은 경험 많은 선임의 모습이고 왼쪽의 신입 조수를 가르치는 이미지다. 인물 앞에 놓인 용탕은 화면 전체에 강렬한 명암 대비를 만들어 노동자는 밝은 영역에 배치되어 조명을 받는다. 선임의 얼굴은 일에 대한 집중과 노련함이 배어있고 자긍심 높은 노동자의 인상을 강조하고 있다. 뒷 배경보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명암대조가 극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은 화가의 관심이 배경 또는 풍경에서 인물로 넘어온 것으로 이해된다.


<용해공> 115*88, 캔버스에 유화, 1958


작업복을 입고 단조(鍛造)하는 여성 용해공의 모습이다. 사회주의 건설에서 사회와 가정을 동시에 지탱하는 역군으로서 여성의 이중적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그림도 <남자광부>처럼 인물의 관계가 작은 서사를 만들고 있다. 작업장 입구 쪽으로 교복 입은 여자 어린이가 도시락을 감고 오는데 아이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여성노동자의 또렷한 눈망울은 사회적 역군으로 일의 집중도를 말해준다. 여기서도 원형의 명암 구성 속에서 섬세하고 부드러운 필치와 사실적 묘사력이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최재덕은 자신만의 표현 기법으로 북한당국이 요구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기법을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부>,1961


해부는 어부의 북한식 어휘다. 푸르른 석양빛 속의 바다를 뒤로 하고 해부들은 하루의 일상을 마감하고 있다. 조각배를 정박시키고 그물을 정리하고 있는 가운데 주인공의 얼굴은 해풍에 그을린 검은빛이고 두툼한 살집의 얼굴과 넉넉한 풍채는 화가의 모습과 닮아 있다. 하늘빛에 그물의 벼리 자루 부분이 눈부시게 하얗게 빛나고 있다. 빛에 반사되는 그물 벼리 자루 부분과 어깨와 팔의 모서리 선 부분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그물을 하얀 여백으로 처리한 데서 유화의 다양한 표현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대가임을 드러내고 있다. 물속에 반쯤 몸을 잠근 채 무언가를 건지러 가는 멜빵바지 차림 해부의 초록빛 차림새가 푸른 노을빛에 물들어 바다와 대지가 온통 청록빛에 젖어 있다. 바닷 기슭에서 떨어진 나룻배에는 한 사람을 앉히고 다른 한 사람은 노를 저어 함께 육지로 돌아오고 있다. 갓 잡은 고기를 물통에 담아서 바닥에 닿을 듯 힘겹게 들고 가는 두 사나이, 해부에 등장하는 6명의 해부들 모습에는 바닷가와 바다, 하늘과 해부가 서로의 색깔을 뒤섞으며 혼연일체의 색채감을 이루고 있다. 이들에게 그날의 일기는 바다와 함께 호흡하며 부대낀 하루의 일상이 삶을 지탱해 준 보람의 날로 기억될 것이다. 바다의 초록 이끼가 오랜 세월 동안 육지에게 다가가 풍화작용을 시도하면서 자기의 색깔과 체취로 바다와 땅의 경계를 몽롱하게 지우고 있다.


최재덕 <수확의 기쁨> 70*49, 1961


노란 색감과 갈색이 어우러져 붉게 물든 조밭에서 부부가 낱알이 빼곡히 들어찬 조를 만지며 웃고 있다. 하얀 이를 반쯤 드러내며 흐뭇하게 웃고 있지만 절제되어 있는 표정에서 묻어나는 깊이감 때문에 경건해 보인다. 품이 넓은 아내의 저고리와 질끈 동여맨 고름, 잠방이를 입었을 것 같은 길지 않은 소매의 후줄근한 남편의 일복도 수확의 기쁨에 포근하다. 그동안의 노고와 헌신에 대해 토지의 온기와 잘 익은 곡식이 이글거리듯 화답하고 있다. 황갈빛 조밭은 더 짙은 농부의 피부색과 색감이 닿아 있고 뒤쪽의 윤곽으로 보이는 세 사람의 모습은 조밭의 색상에 흡수되어 융합되는 느낌을 준다. 그의 인물화를 보면 참 그윽하고 깊은 체취가 배어난다. 온다. 사회주의가 주제화 기조의 그림들을 통해서 생산을 독려하고 근무의욕을 고취하고 있는 점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그런 점을 충족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교감과 합일에 이르는 겸허한 메시지를 준다.


최재덕은 1916년생으로 1973년 작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역대미술가편람(1994)에는 사망연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말년 생활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아쉽게도 1962년 이후의 최재덕 작품 활동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다. 이후 10년의 그림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58세의 길지 않은 생을 마감한 최재덕은 북한에서 대부분의 1세대 월북화가의 약력에 들어 있는 조선미술가동맹 위원이나 평양미술대학 교원의 이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는 그가 북한에서 비교적 야인으로 활동한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핵심적인 화가군에서 상당히 소외되었음을 시사한다.

많은 월북화가 중에 최재덕에 주목하게 된 것은 그의 그림이 좋아서였다. 그림이 먼저였다. 그래서 그의 월북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월북 이후의 최재덕 그림을 보면서 그는 시대와 상황에 적응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존엄을 지켜나간 화가였다고 믿게 되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그림이 김인승의 <봄의 가락> (1942년 작) 2점이다.

( 화폐박물관 2층 갤러리 , 2025.10. 8 촬영 )


최근 화폐박물관에 전시된 친일작가들의 그림이 논란이 되고 있다. 특히 입구에서 보면 맞은편 중앙에 걸린 김인승(1910-2001)의 작품은 최근 언론의 지적과 구설수 속에도 의연히 자리 잡고 있었다. 복잡한 심정이 되어 그림 앞에서 서성거릴 때 젊은 여성 둘이 “ 저 여성들 코는 서양여성 코 아냐? 모두 코가 똑같네. 그 시대도 저런 고급 실내화를 신었을까?” 말하며 지나갔다. <화폐박물관>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10여 작가의 그림 중에 친일 반민족행위자 705인에 포함된 화가가 5명이나 된다는 것은 기성세대 문화 의식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친일화가들의 작품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자산임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추석 연휴에 문화나들이를 하는 어린이를 둔 부모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그림 설명에 부쳐 화가 이력을 사실대로 쓰고 관객의 판단에 맡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제쯤 우리는 국가는 물론 한 개인의 역사에도 당연히 혼재하는 빛과 그림자를 솔직하게 내보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참고)

박예은 <최재덕의 작품세계 연구>, 이화여대 석사논문, 2024

신수경 <해방기(1945-48) 월북미술가 연구>, 명지대 박사논문, 2015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개와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