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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Aug 03. 2023

 어머니 간병일지 2

- 맛의 기억들

휴가온 기분으로 어머니와 생활하고 있다.

어머니 간병 당번 날 비행기로 친정에 도착하니 바통 넘길 셋째 동생 내외가 기다리고 있었다.

간병 생활 수칙과  냉장고에 음식 목록 등을 보여주는데 커피머신, 작은 노트북까지 갖춰 있었다. 친정집 파티 프래너로 명성이 난 넷째 솜씨다.

앞 당번인 둘째 제부가 요리학원에서 배운 솜씨로 다양한 음식을 해서 드렸다니 저으기 부담도 돼서

 “ 난 된장국에 밥만 해 드릴 거야”

 냉장고를 뒤져보니 식재료가 이미 풍부하여 일주일 동안 있는 것 하나씩 꺼내 조리하고 있다. 애월에서 해물식당 운영으로 바쁜 올케는 두둑한 밑반찬을 대는 것으로 임무를 대신하고 었었다. 난 간병한답시고 서울에서는 먹기 어려운 해산물을 매끼마다 먹는 복을 누리고 있다. 그것도 어머니와 둘이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말이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보람보다는 고통이 더 많았던 세월을 회상하며 어머니가 자주 쓰는 말은 " 간장이 물이 되어(애간장이 녹아 물이 되어 흐른다는 뜻)" " 살이 그차지게 아파도(살을 베어내는 것처럼 부끄럽다는 뜻)" 등이다. 어머니의 사설을 중모리 장단으로 들으며 냉장고 칸이 허전할 때까지 나는 음식을 먹고 또 먹었는데 전전 당번 막내 여동생이 새벽에 산지부둣가에서 사 왔다는 굵은 자리돔을 간장에 조려서 먹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신혼 시절 마농지(풋마늘대로 만든 장아찌)에 식초 조금 넣고 뼈까지 복삭(바삭하게) 조려지는 냄새 속에 뜬구름 같던 내 젊음이 정착해 갔다. 시인 백석은 음식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일찌거니 체득하였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백석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전문


 진간장에 지진 달재 생선은 양태를 말하고 제주에서는 장대라고 한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난 마농지 국물 넣고 뼈까지 먹을 수 있게 조린 자리돔을 떠올린다. 제주에서 장대는 주로 배추나물 넣고 국을 끓였으니까. 어느 때부터인가 단호박에 매운 풋고추 썰어 베지근한* 국물 맛을 내는 굵고 빳빳한 갈치는 고급생선이 되어 일상으로 먹을 수는 없는 음식이 되었다.

 

 특정한 냄새나 맛, 소리로 기억이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현상을 소설로 쓴 프루스트의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마들렌과 홍차의 향긋한 기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얘기가 나온다. 성인이 되어가는 주인공이 어느 날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는 순간 기쁨이 넘쳐 오르면서 예전 기억들이 떠오르는 장면은 글의 은유와는 상관없이 유년의 내가 도달할 수 없었던 문명의 맛이어서 부러웠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1910년부터 22년까지 13년 동안 이 책을 20여 권의 공책에 쓰고 가필하고 교정하고 또 교정하며 총 7부작으로 썼다고 한다. 푸루스트의 마들렌 향 유년은 점차 성모상을 장식한 산서나무 향으로 바뀐다.

  유년시절 딱 한 번 먹어 본 '사브레' 과자, 파란 은박지 포장지에는 내 또래 남자아이가 나비넥타이 정장을 입고 " 프랑스 어린이가 좋아하는 샤브레" 엄지 척 광고 글도 있었다. 깊은 밤에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오버코트를 벗기도 전에  안방에 잠든 6형제를 깨우며 그 과자 상자를 내밀었고 우린 벌떡 벌떡 일어나 손바닥에 두어 개씩 받아 처음엔 바삭 깨물다가 아까워 혀로 천천히 녹이며 음미했다. 출장비를 아껴 그 과자를 사기 위해 배로 온 아버지가 들어서면 방이 갑자기 그들먹해지고 아버지 부재로 설문대할망만큼이나 커다랗던 어머니 몸이 자그마해졌다.   


 어머니 환갑 즈음 시댁 형님이 운영하는 전복죽 집을 가기로 식구들이 총 출동했다. 20년 전에도 자연산 전복죽은 한 그릇에 2만 원이었다. 대식구가 맛나게 먹고 어머니께 음식 소감을 물었다.

"뭐 별거 이시냐(있니), 촘지름 맛이주게(참기름 맛이지), 나 일생 전복죽 한 그릇 제대로 먹으며 살아보지 못했져,  환갑이나 되난(되니까) 제라헌(제대로 된) 전복죽 한 번 먹어보는 거주"

 우리 집 아이들은 전복죽을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큰엄마집에 가자고 졸랐다.  전복죽은 큰댁에 가면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알았던 아이들의 시간은 오로지 어른의 몫이었다.


 유목민처럼 전국을 떠돌며 살다가 몸과 마음이 허기질 때 늘 먹었던 음식이 그리웠다. 무를 깔고 묵은 김치 넣고 지진 고등어조림이나 동태찌개 같은 것들. 제주시 동문시장에서 나무궤짝에 얼려있는 동태 한 마리를 사면 갈퀴로 떼어내 종이봉지에 담아 주었는데 남문통 집까지 걸어오면 얼음이 적당히 풀려 있었다. 그걸 무쇠 칼로 토막 내 내장까지 김장김치에 푹 지졌다. 그때는 동태 알이 생선 한 토막 양만큼 있어 알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5년 전인가, 4.3 행사로 제주 갔을 때 관덕정 뒷골목에서 지인과 먹은 여름 멜국은 거의 보약 수준이었다.


그러나 내가 음식을 만들어 가족들을 먹이기 전까지 맛에 대한 애틋한 추억은 거의 없다. 김밥과 떡국이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고 질보다는 양으로 먹는데 길들여져 있었다. 많은 식구에 가사를 덤으로 농사짓는 어머니 밑에서 제사 명절을 빼고 시간 걸리는 음식은 먹어본 기억이 없다. 그래도 꿩엿은 가족 모두의 보양식으로 경옥고 같은 역할을 했다.

 봄부터 마당에 놓아기르는 깃털 벗은 병아리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여엿한 중닭이 되었다. 어머니는 병아리를 꼭 토종닭에서 구했는데 그 당시 한창 인기 있던 몸집이 크고 털이 풍성한 외래종이나 개량종은 기르기는 쉽지만 알진 맛이 없다는 것이다.

뉴 햄프셔 종

" 유 암프샤(뉴 햄프셔 종)가 겉보기는 푸짐하지만 토종닭과는 유채기름과 참기름 차이지"

이 닭이 마당을 쏘다니며 동백꽃 꽃술 같은 노른자 알을 낳기 시작하면 황금빛 달걀은 아버지 아침 상에  오르게 된다. 하루 두 알씩을 양은그릇에 참기름 넉넉히 두르고 밥 뜸 들이는 솥에 넣어 반숙을 만들면 우리 네 자매는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그릇 바닥에 참기름과 흰자가 엉켜 눌려 있는 곳에 된장국을 부어 먹었다. 참기름에 눌은 계란 흰자가 동동 떠오르는 무 된장국은 고깃국 먹는 식감을 주었다.  가끔은 순서가 헷갈려 어머니가 중재에 나서곤 했다. 내가 우연찮게 남의 집에서 밥을 먹게 될 때 소찬을 부끄러워하는 안주인의 민망한 얼굴에도 계란 프라이만 한두 개 있으면 성찬으로 느껴지는 것도 이런 기억 덕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어머니가 보위를 했건만 50을 간신히 넘기고 돌아가셨다.

 

토종닭들


 부엌에서 제사나 명절이 아닌대도 밤낮없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날은 엿을 고는 날이다. 여름에 장만해 둔 보리를 물에 불려 부르트게 해서 따뜻한 곳에 보자기 덮어두면 보리에서 발과 싹이 나온다. 이 수염뿌리가 한 1센티쯤 나오면 건져서 초가을 볕에  고슬고슬 말리는 데 이것을 '골'(엿기름)이라 했고 맷돌에 갈면 ‘골가루’라 했다. 흐린 좁쌀은 제주에서 보리 다음으로 흔한 잡곡이라 제사에는 ’ 조침떡‘(좁쌀 시루떡)도 예사로 했다.

" 너희들이 더 크지도 말고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으켜(좋겠구나)"꿩엿의 첫 단계도 조밥이다. 흐린 좁쌀(차조)로 밥을 찐 다음 물을 섞어 된죽같이 만들고 뜨뜻할 정도가 되면 준비한 골가루를 넣었는데, 사르르 퍼지며 신기할 정도로 죽이 얇아진다. 이 상태에서 서너 시간 뜸을 들이면 죽이 끓어오르는데 이걸 체로 거르면 감주(단술)가 된다. 이때쯤 우리들은 수시로 부엌을 들락거렸다. 여섯 아이들이 올망졸망 아궁이에 붙어 앉아 양은그릇을 제각각 들고 엿물이라도 맛보려고 화덕을 맴돌면 어머니는  긴 나무국자로 엿물을 조금씩 떨어뜨려 주시고 한마디 하셨다.

" 너희들이 더 크지도 말고 이대로만 있었으면 좋으켜(좋겠구나)"


꿩엿(인터넷 사진)


 제주 4.3에 온 가족이 몰살되어 텅 빈 집에서 돼지와 말하며 12살의 공포를 겪은 어머니는 자식 많은 것을 큰 복으로 생각했다. 마흔아홉에 아버지를 보내고 " 저 집은 이제 어떻게 살젠 햄신가(살려고 하나)" 걱정할 때도 내심 자신이 없지는 않았다고.

" 남들은 여섯 자식 어떻게 키우느냐 걱정하지만 난 자식 많은 그 힘으로 살았져(살았다)"

감주를 골고루 맛보게 한 어머니는 토막 친 닭을 넣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집안에 놓아 키우던 그 닭이었다. 감주가 어느 정도 끓으면 바로 닭을 넣어야 굳지 않고 쫄깃거려 어른 아이 골고루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어머니 지론이었다. 며칠간 고아서 엿이 된 후에는 검정 통깨를 듬뿍 뿌려 단지 여러 개에 담아 겨울 내내 한 숟가락 씩 먹었다. 그때 먹성 좋은 친구가 놀러 와 엿 고은 솥에 달려들어 숟가락으로 양껏 퍼 먹고 간 이야기를 어머니는 끝내 모른 채 하신다.

“경 해시냐? 난 모르켜( 그런 일이 있었니? 난 모르겠다) ”

 이제 그 여섯 아이가 결혼하여 25명 대식구가 되었다. 어머니는 사위들이 모여드는 여름휴가만 되면 박달나무 도마소리가 요란하였다. 그러나 이젠 냉장고 음식 꺼내기도 힘에 부치다. 하여 여름휴가 때면 자리회를 얻어먹던 그 사위들이 이제 어머니께 음식을 해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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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 따위를 끓인 국물 같은 것이 맛이 돌아 구미가 당긴다는 제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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