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 하자는 건데(1932년 생, 양농옥 씨. 그림 마곡중 미술반)
양농옥 씨와 70주년 제주 4.3 추모제에 가서 3박 4일을 같이 보냈다. 친가 쪽 고모뻘이기도 했던 그분은 자신이 겪은 4.3을 70년 만에 증언하고 2년 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숙소에서 노래를 흥얼거리시던 그 시간들이 아련하다.
통일 하자는 걸 왜 빨갱이라 해?
1946년에 돌아온 고향
내 고향은 도노미 마을, 통시(노천화장실)에 앉아 쳐다보면 민오름이 바로 보이는 곳이야. 아홉 살에 일본 가서 소학교를 했지만 공부는 제대로 못했어. 매일 고철 주우러 다니고 일본군 먹을 음식 캐러 다니느라.
아버지는 일본 이쿠노쿠에서 직원 10 명쯤 데리고 수도꼭지 부속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더라고.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되니까 풀려나서 내 나라 내 고향 간다고 무조건 들어왔어. 하룻밤 생각하더니 바로 결정하고는 자궁물혹 수술하고 회복 안 된 어머니와 귀향했어. 어머니는 후유증으로 그해 돌아가셨어. 일본 친척들이 모여 당제를 지내는데 흰 리본 호창 달고 “아이고아이고” 해도 난 실감이 안 나더라고. 왜 저러나? 고향 가면 어머니 있는 데 뭐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오빠가족하고 남아있다가 와 보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13살 동생이 대바지(*작은 물허벅)에 물을 길어오며 살림하고 있었어.
아버지는 세 딸을 어떻게 키울까 고민이 많았어. 나를 야학에 보내고 밤에 꼭 와서 봐요. ‘우리 일본쟁이 잘하는가’ 하고 물으면 야학선생님은 "녜, 잘합니다"하시더라고. 비 온 날은 연기불 피워서 고모가 바느질 가르쳐주러 멀리서 오는 거야. 우리 고모는 당신 자식은 고생하며 사는데 우리는 호강하며 키운다고 투덜투덜했어. 그때 배운 것으로 한복을 지을 줄 알게 됐지.
나는 조선말을 몰라 오빠네 식구들과만 얘기하며 지냈어. 오빠는 일본에서 전문학교를 나왔는데, 제주 들어와 보니 일자리도 없고 어수선하고 마음 붙을 곳이 없으니까 그해 가을 식구들을 데리고 제주를 떠났어요.
서울 올라간 오빠는 행방불명
서울로 간 오빠네 가족은 종로 근처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전매청에 출근한 오빠가 돌아오지 않았어. 올케가 생전에 찾을 만큼 찾았어. 오빠는 아마 돌아가셨겠지. 그 난리 속에 어떻게 살 수가 있겠어.
남편 잃은 올케는 1954년에 두 아이 걸리고 봇짐 지고 내가 세 들어 사는 집 올레로 들어왔어. 우리 살던 집을 올케식구에게 내주고 우리 세 자매는 이웃집 바깥채(*바깥채)로 빌려 이사했지. 그 올케가 7년 전 세상을 떠났는데 요양원에서 돌아갈 때쯤 딸보고 그랬대요.
" 야, 너네 아방 서노도미에 있젠 해라(너의 아빠 서도노미마을에 있다고 한다). 전화해 보라."
" 서도노미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안?"(딸)
그러면 빙새기(빙그레) 웃기만 한대요. 그러다가 다음날 또 말한대요.
" 야, 전화해 봔(봤니)?"
" 어디를?(딸)"
" 서노도미"
죽을 때가 되니 남편 안부만 궁금한 거예요. 올케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60년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거야. 참 순하고 좋은 사람이었어.
연락병으로 다니다
나도 4.3 당시는 활동을 했지. 키가 조그마하고 단발머리여서 활동하기가 좋았지. 누구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는 3-4살 위의 사람들과 다녔어. 나는 선전부에 속해 있었던 것 같아. 전단을 돌돌 말아서 풀잎에 묶어서 전달했어. 입당한 기억은 없지만 암호를 그날그날 받아야 하니 당원이어야 되는 것 아닌가? 길에서 경찰을 만나면 길 옆 수풀에 휙 던져두고 저만큼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주워 전달했지. 난 아버지 하고 일이 다르니까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통 몰라. 그저 사람들이 농위원장 농위원장 하는 소리를 들었지. 나는 말도 서툴고 키도 또래보다 작은 아이였는데 아버지가 그런 사상을 가지니 내가 더 쉽게 활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지. 아버지는 같은 사상이니까 내게 하지 말란 말도 못 하고.
제주에서 먼저 일어나 될 일이 아니다
아버지가 젊은 사람들에게 하는 소리는 안된다고만 했어. 집에서 회의할 때면 문 앞에 딱 풍채(*차양)를 세워. 나는 창문 앞의 풍채를 만지는 척하며 엿듣지. 아버지에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어요. 그때 얻어들은 얘기가 김일성이가 진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인데, 공산주의, 자본주의 차이가 있어서 북은 소련을 쫓았대요. 남의 이승만은 부잣집 아들로 죽도 밥도 아닌 사람으로 정치할 사람이 못된 사람이래. 북쪽은 소련이 점령했지만 그쪽은 소련을 떼어냈잖아. 여기는 그냥 미국을 끌어안고 잇으니 박정희가 16년이나 해 먹게 된 거잖아. 아직까지 난 이런 말을 못 하고 살았어. 박정희라면 치가 떨려.
5.10 선거 때는 우리 마을사람이 전부 열안지오름 앞까지 갔어. 한 일주일 살다가 온 것 같은데? 아버지는 그 사이에 수시로 집에 갔다 왔다 했어. 돼지밥도 줘야 하고 닭모이 주고 바구니로 닭을 덮어놓고 왔어. 그때 분단 선거 반대한다고 마을사람들이 다 올라갔지만 우리 마을에서 활동으로 연결된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 도노미에는 사상에 신경 쓴 사람이 없었어.
한 번은 경찰에서 우리를 다 불러모았어요. 한 사람이 잡혀온 거야. 그 사람은 다랑굿마을 사람인데 어디 역할 다니다가 잡혔겠지. 맞아서 얼굴은 사람의 형체가 아니야. 내복이 훌렁훌렁하고 얼굴색깔이 변해서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어. 이 사람 부모가 누구냐고 해도 아무도 안다는 사람이 없어. ‘무사 나 모르쿠과(왜 나를 모르겠습니까)?" 해도 죽어질까 봐 안다고 못하지. 경찰이 끌고 민오름으로 데려가더니 바로 총소리가 나더라고. 그 후론 갈 가다 신발이 발견되면 난 시체본 것처럼 무서웠지.
음력 10. 18일에 도노미가 불탔어요. 경찰들이 와서 초가집 이엉을 박박 빼서 탁탁 라이터로 귀퉁이마다 돌아가며 불 붙이더라고.
도두리마을에서 목격한 학살
우리 가족은 도두리 언니시집으로 내려가 탕건 파는 할머니집 방 한 칸 빌어 살았지. 10월 그믐날, 할아버지제사 해먹고나니 다음날 군인들이 도두국민학교로 다 나오라고 해요. 몽둥이 들고 쫓아내서 도두리사람이 다 나왔어. 아버지는 두 동생 양손에 잡고 앞에 걸어가고 나는 뒤를 따라가는데 뒤돌아보며 " 항아리 밑에 돌을 들어보면 뭐 있다"라고 하시는 거야.
학교 운동장에 모여있는데 사람 싣고 지프차가 왔어요. 세어봤지. 세 사람씩 세 줄 아홉이더라고. 눈 가린 채 그 사람들을 학교 앞 한길 건너 보리밭으로 데려가더니 담배 한 대씩 탁탁 물려주고 바로 빠빵 허더니 퍽퍽 쓰러지더라고. 그 장면 보지 않으려고 눈 가리면 뒤에서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보게 하는 거야. 그러고 난 후 연미동네 김 00 이가 나와서 사람을 지목하는데 ‘히매’하며 아버지를 가리키는 거라. 희매는 일본말로 수염이란 뜻인데 아버지가 수염을 길렀어. 지프에 이젠 눈도 안 가리고 아버지를 태워가는 거야. 나는 같이 간다고 매달렸지. 그때 9 연대장(그렇게 불렀어)이 내리라고, 조사하고 보내준다고 했어.
온종일 한길에 앉아 기다려도 아버지가 안 와. 아버지는 일을 한하니까 죄가 없을 줄 알았지. 붙잡혀갈 때는 그게 아니더라고. 제주경찰서로 갔다는 말이 들렸어요.
말도 같고 의복도 같은 데 뭣 때문에 남북으로 갈라 놔?
아버지 오버에 남색 코르덴바지 놓고 담배 한 보루 사서 새끼줄로 등에 지고 제주시로 갔어. 도로 차단될 때라 새벽 밀물 때 도두리 바닷길로 제주시 무근성에 도착하니 해가 져 가고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어. 바닷돌이 미끄러워 고무신은 손에 쥐고 바닷길로만 걸어 제주시에 간 거야. 경찰서마당에 가서는 종일 기다렸어. 그래도 아버지는 못 찾아. 경찰서 가면 도남 군부대로 가라 하고 여기 가면 저기 가라 하고, 관덕정 근처에 이모집이 있어서 거기서 자고 아침 밝으면 다시 가보고.
5일째 되는 날 지프차에 고개 떡 들고 아버지가 앉아있는 거야. 막 뛰어가서 ‘아버지 ~’하며 매달리는데 아버지는 고개를 딱 숙여버려. 군인이 타라고 엉덩이를 받쳐주더라고. 그런데 앞에서 9 연대장이 눈짓으로 내리게 하더라고, 군인이 손을 딱 떼니 나는 툭 덜어지는 거야. 다시 차를 뒤쫓아 달려가니 보초가 딱 막아서. 그렇게 아버지와 헤어져 봇짐 지고 오는데 막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더라고.
5일 만에 그 차가 오라리로 갔다는 말을 들었어. 칠성통 ‘갑자정마크사’로 가던 중에 ”오라리로 간 사람 다 죽였다“하는 소리가 들리는 거라. 어떤 사람이 지고 있던 멍석을 탁 놓으며 ‘아이고 우리 성(언니) 오리리에서 죽었수게(죽었어요)“하는 거야. 오라리 공회당에서 쏴 죽였다고. 그 사람도 소식 들으려 위장으로 멍석지고 관덕정 쪽으로 왔던 거지. 이모가 소고기를 사주며 가서 밥 해서 상에 올리라고 하는 거야. 상 차려서 상식(죽은 이에게 올리는 식사)하며 도두리에서 세 자매가 당분간 살았어.
우리 아버지는 그때 하는 일들을 알기는 다 알았지만 절대 안 받아들였어.
" 우리 조선은 (연합국이) 독립시킬 때 북은 소련이 가지고 남은 미국이 가지게 다 계획이 있는 일이다. 이거 뭐 이제 난 일이 아니다. 일본 놈에게는 벗어났지마는 이제는 미국 속에 들어가는 거다. 나라는 두 동강이 나게 돼 있다. "
산 쪽에서 사람이 오면 "나는 그런데 발 들일 입장이 못된다"라고 하며 활동을 안 했어. 혀를 쯧쯧 하며 “대륙에서 일어나기 전에 이거 될 일이 아닌데 제주도사람들이 나선다” 했지.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우리에게 사상이란 걸 많이 얘기해 줬어. 그때 전쟁을 할 때 원자폭탄을 터트려 우리나라 독립을 시키면 북쪽은 소련 줄 거고 남쪽은 미국이 가질 거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때는 6.25 전이라 갈려지지 않은 건데 갈라지지 못하게 김구선생을 잡아야 그래도 통일이 될 건데 미국에서 이승만을 잡아다 맡긴 거야.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한 것뿐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 했지. 이승만은 절대 남과 북을 갈라놓을 거다. 그래서 우리가 5.10 선거를 반대한 거 아닌가? 그렇게 갈라놓고 70년을 흘려놓았어.
나는 남북통일이라는 걸 진짜 원해. 아직은 의복도 같고 언어도 같고 뭣 때문에 갈라놔? 왜 통일하자는 걸 빨갱이라고 해? 원인은 머리들 싸움이고 나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갈라놨다고 봐. 박정희 얘기는 일본에서 들었어. 그 사람 야비한 사람이야. 일본군인이었어. 그래서 조선피를 많이 먹은 사람인데 또 조선으로 와서 권력 잡고 해 먹은 거야.
희생자 명단에도 없는 언니네 가족
형부는 동네청년들이 다 대동청년단에 들어갈 때인데 안 들어갔어. 집에 없는 척 방안에서만 살았는데, 어느 날 새벽 도둘봉에 바람 쐬러 갔다가 대동청년단이 뒤에서 총을 쏴버려서 바닷가에 떨어졌어. 와이셔츠 찢어서 다리상처 매고 밤중에 집으로 기어와서는 마루 떼내서 땅 파고 보리낭(짚) 깔고 살았는데 마을 전체에 불을 질러버리니까 나올 수밖에 없었지.
도두리마을 불태울 때 모두 모이라고 해서 형부는 군인들이 부축해서 서쪽 제주시 쪽으로 가고 언니는 반대편으로 끌려갔어. 헤어질 때 형부가 "아이는 업고 가다가 ’오레물동산‘에 가면 내려놓고 가버려"하더라고. 어린것이 그러면 살까 하고. 돌이 안된 아기였어. 나는 그런 장면을 보기만 했지. 혈육이 볼까 봐 나서지도 못하고 숨어서 이 광경을 보는 거야. 그들이 나를 보면 나 가슴 아픈 것처럼 아플 거니까. 사람은 죽게 되면 살고 싶은 게 맞는 소리야. 붙들려가면 죽을 거니까. 그 순간도 죽고 싶지는 않은 거야. 언니, 형부, 언니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비슷한 시기에 다 돌아가셨어. 형부 동생이 산에 있어서 그렇게 됐을 거야. 그분들은 희생자 명단에도 없어. 신고해 줄 사람이 없어서. 그때 죽은 사람은 바른 사람이야.
항아리 씨앗돈
아버지 돌아가고 동생들과 항아리을 열어보니 밑에 돌로 눌러놓은 사락사락한 종이꾸러미가 있어. 그걸 펼치니 3만 원인가 30만 원인가 하는 돈이 들어있어. 그걸 며칠에 한 번씩 말렸어. 누가 볼까 봐 작은 동생은 밖에 세우고 큰 동생은 안에 세우고 나는 솥뚜껑에 위에 펴서 불 피워 말리면 또 싸놓고. 그걸 자본으로 세 자매가 살았던 거야.
아버지는 전부터 돈을 모으는 양반이었어. 그 돈이 씨가 되어 아직까지 내 손바닥에 돈이 없어지는 일이 없어. 내 평생 돈에 여유를 가질 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이날 이때까지 참말 남편은 환자로 살고 했어도 밭도 사고 그랬어. 나한테 가서 돈 못 꾸면 신용 없는 사람이라 했어. 그 집에 돈 없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내 결혼하고도 그 돈은 있었어. 솥뚜껑에 두 번 말리면 끝인데 그 돈이 얼마나 되겠어? 그걸 안 쓰고 제사 명절도 동생이 꿩마농(달래), 냉이 캐논 것을 팔아 그것 모인 걸로 곤썰 받아당(흰쌀 사서) 아버지 삭제(*한 달에 두 번 초하루. 보름 아침에 하는 제사)도 하며 산 거야. 그래도 친척들이 모여 와 ‘아이고아이고’ 해 주니까 고마워서 곤썰밥(흰쌀밥)을 해서 드리고. 그게 씨돈이 되어 오늘까지 돈은 내 수중에 늘 있어. 쓰지 않는 돈이.
남편은 맷독에 곯은 사람
내가 결혼을 안 하니까 올케가 사정했어.
“ 아시(동생), 아시, 우리 집안에 남자라는 이가 하나도 없으니까 아시가 결혼하면 남자가 생겨 동생들도 의지가 되고 나도 의지가 되어(되겠어)”
그 말도 맞아서 외숙모님이 소개해서 남편을 만났어. 결혼해 보니 남편은 4.3 때 경찰서에서 맞은 맷독으로 속이 곯은 사람인 거야. 형 둘은 목포형무소에 가서 행방불명되고 시어머니는 열안지 오름에서 총 맞아 죽고, 아버지도 죽으니 그는 혼자 남은 거라. 형 때문에 지서를 수시로 들락거려 그때마다 온몸이 검게 돼서 나왔다고 해. 그런 사람을 누가 숙모를 통해 소개한 거야. 그러니 결혼해도 남편은 일이란 걸 해보지 못했어. 폐가 약해 잘 먹어야는데 살기 바빠 영양가 있는 것을 먹여보지 못하고 집에서 연미동산 올라가는 길에 숨차 억하고 쓰러지니 그게 끝이야. 친척이 나보고 ‘형님 같은 사람은 없다’고 했어. 맷독에 죽어가는 사람 소개했다고 한 번도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연애편지
남편 삼 년 상 지나니까 자다가 보면 편지 말아서 누가 방에 툭 던져. 그리곤 덥석 법석 소리 나며 밭담을 턱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큰 여동생 결혼해서 나가고 작은 여동생 하고 딸 둘, 나, 이렇게 여자 넷이 사는데, 자다가 보면 마당으로 쪽지가 툭 떨어져 있고. 펼쳐보면 글귀가 근사하지. 근데 누군지 잡을 방법이 없어. 그때까지 날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날 건드린 사람은 없었어. 난 남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지 남녀로 대하진 않았지. 그때 나는 마을 부녀회장이고 그이(후에 남편이 된 사람)는 청년 회장이었어. 그래서 그이와 일로 만나는 일이야 있었지. 그때는 농협에서 비료가 나오면 땅 평 수에 따라 할당이 나왔어. 각자 분배를 일단 받고 나서 가지는 말라고 해. 비료가 남을 수도 있고 모자랄 수도 있으니까. 그날은 다시 얼마씩 덜어내라고 해서 내 비료를 퍼놓다 보니 아, 종이쪽지가 있어. 요게 죄인이었구나, 그 사람일 줄은 까마득히 생각했어. 당신네 집에 가자고 했지, 그 쪽지 들고. 그 집 올레 앞에 팽나무 거기에서 가만히 기다렸어. 쪽지 주인이 나오기를, 한참 안 나오길래 집 가까이 연못까지 가노라니까 그 사람 친구가 불쑥 나오는 거야. 친구는 “삼촌 갑주(갑시다)” 라며 나를 이끄는데 밤이고 하니 그냥 돌아왔어. 그 후에도 동네 반장이 우리 집 와서 이것저것 의논하는데 “반장, 여기 있는가?”하며 불쑥 들어와. 손님이니 방석 내고 고구마 대접 하고 잡담하다가 나간 후 방석을 걷어 보니까 또 쪽지가 있어. 그렇게 하면서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원수니 악수니 생각해도 항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 “꽃이 피는 시기가 따로 있다. 그 시기가 끝나면 져버리는 거다” 이런 글귀를 보내는 거야.
첫 남편이 김 씨인데 김 씨 집에서 내 소문 듣고 조농사 한 것, 소촐(꼴)까지 다 훑어 갔어, 난 김 집의 딸에게도 크게 당했어. (부도덕한) 내게 집 빌려 줬다고. 동네에서 모두 나를 손가락질했으니까. 본부인이 죽어버린 집에 갔으면 그럴 일이 없는데 내가 본부인 있는 집에 들어갔다는 거지. 한 번은 김 씨 집 사람 셋이 와서 나를 데려가더라고. 가보니 한쪽엔 남편 쪽 김가가 앉았고 한쪽에 친정 쪽 양가가 앉아있는 거야. 뭔 일로 오라고 했나 싶었는데 마당으로 탁 부축해서 오는 것 보니까 그 사람이라. 확 무릎을 꿇여 내 앞에서 닦달을 하는 거라.
“누가 시작을 했느냐”
“아직까지는 여론은 그렇지마는 아무런 관계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그러니 모여들어 멍석말이해서 두들겨 팼어. 그렇게 때려도 안 죽대? 내가 탁 일어서서 말했어. 내가 원하던 사람이라고, 김 씨 과부는 재혼할 수 없느냐고 그러니 친정 친척들이 “갈보 났네”하면서 흰 마후라(머플러)를 화악 잡아서 후려치는데 와작착 와작착 때리더라고. 그때 무릎 꿇렸던 그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내 사람이니 내가 살린다”라고 확 부축해서 나갔지. 그 밤 뛰쳐나가 무한정 헤매 다녔지. 동네 동생뻘 아이들이 “성님 성님” 하면서 그 밤길을 돌아다니며 나 찾아다니는 소리가 들려, 내가 죽어버릴까 봐 그랬겠지. 사실 우리 동네에서 그 사람 아니면 나 못 꼬셔. 그 사람은 내가 처녀 때 중신 왔던 사람인데 내가 결혼생각이 없을 때라 어찌 안됐어. 그러다 내가 홀몸이 되니까 다시 덤벼 든 거지.
난 아이아버지 집에서 받은 거라곤 양푼이로 보리쌀 두 되 하고 된장 한 사발 밖에 없어. 첫아들 낳았을 때 그 사람이 아기 업은 아내 대동하고 보리쌀과 된장 한 사발 들고 왔더라고. 난 평생 김 씨 집(전 남편)이나 고 씨 집(후처가 된 남편)이나 아무 데도 공짜로 먹은 게 없어. 그런 상대 안 하려고 제주를 나온 거지.
큰딸 초등학교 나오니까 오라리에서 중학교를 보낼 재간이 없어서 서울 사는 동생에게 보냈어. 나도 얼마 없어 갈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보리 베는 날, 어떻게 하다 또 하나를 갖게 되었어. 한번 봐서 막내가 생긴 거야. 막내 가져서 1년, 낳고 1년 살고는 떠난 거야.
아들은 우리 세대의 본능 같은 것
제주에서 살 때 너무 괴로워 아들을 그 집으로 보낸 적도 있었어. 아이 아버지 집 앞에 데려가 막 돌멩이를 던지며 가라고 했지. 작은 딸이 막아서더라고. 지가 앞에 서서 아기가 돌 맞는 것을 막으며 하는 말이 “조쟁이 달렸수게(고추 달렸잖아요)” 하는 거야. 아, 그 사람이 죽어버리고 나니까 이제는 ‘아 은인이로구나’ 생각이 들어. 그 사람 아니었으면 딸 둘 데리고 평생을 살았을 건데, 또 그 사람 아니면 더 나쁜 사람을 만났을지도 모르고.
올케가 딸만 둘이어도 난 양자를 권하지는 않아. 탱자에 밀감 접 붙이면 밀감 달리지, 탱자 안 달려. 지금 사람들은 부모가 죽어도 화장 안 하면 그 산소 찾아 올 사람 하나 없어. 옛날에 귀신 위해서 그렇게 하니 잘 살아졌나? 올케에겐 항상 미안해. 보면 부끄럽고. 그러니까 살 때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마음이 몸을 70% 지배한다고 해. 나 죽으면 그만. 난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려고 해. 그리고 과거를 안 떠올리려 해. 지금이 좋아, 하지만 성남 살 던 때가 그리울 때가 많아. 그때는 내가 힘이 있어 자식을 키워냈지만 지금은 자식이나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니까. 일할 때가 더 좋았어.
우리 시대에는 아들이 본능 같은 거지. 늙으면 외롭다고 하는데 난 외로운 건 못 느껴봤어. 그래서 자식이 있는 게 좋아. 자식 없는 사람은 안 됐어. 아들이 더 의지되고. 나는 지금 주위에서 부잣집 마누라라고 해, “영감이 돈 많이 남겨놓고 갔나 봐” 하지. 난 남자를 이성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성남에서 다시 시작한 삶
내가 떠날 때 모기왓(동네이름) 사람들이 다 울었어. 친척동생이 나에게 “누님은 가면 간 디 만이(간 곳만큼) 살 거우다”라고 힘을 준 말이 안 잊혀. 누님은 어디 가도 가면 간 만큼 살 거라고. 큰아들 손잡고 돌바기 막내아들은 업고 목포배 타고 가서 완행열차 타고 용산 와서 동생 사는 정릉까지 버스 타고 가니 새벽이던가. 휴가 나온 고향 친척이 어깨에 요를 하나 툭 매고 정릉까지 우리를 데려다주고 군대 들어갔지.
자리 좀 잡히자 고향에 두고 온 작은 딸을 데려와 성남에서 4학년에 전학시켰지. 그때 돈 13500원 들고 제주 나가서 8만 원주고 성남에 땅 20평 사서 천막생활 시작했어. 천막 밖에는 성인 남자 신발 사다가 놓아두고 살았는데, 1년도 안 되서 그 자리에 집 지었어. 부엌 하나 방 하나, 한 칸짜리 집을. 큰아들이 여섯 살 때인데 공사장에 물주전자 가져가게 하면 올 때는 속에 토막나무들을 담고 와서 연탄불 붙일 때 쓰라고 주는 거야. 번개탄은 돈이 드니까. 물건 살 일 있으면 이모부와 같이 보냈는데, 한 번은 이모부하고 기와 사러 다녀와서 하는 말이
“어머니 교통비는 누가 내는 거예요?”
“우리 집 짓는데 우리가 내지”
“버스 타고 천 원 내면 잔돈을 수북이 거슬러 주는데 택시 타니 쓱 받고 끝나 버리데요”
집 짓고 나서 작은 딸은 식전에 버스로 20분 거리 천호동 시장에 가서 무, 배추 사다 주고 가면 그것으로 반찬 만들어 길가에 다이(받침) 만들어 장사하는 거야. 아침 해 먹고 딸이 씻어주고 가면 무는 생채 해서 팔고, 이파리는 삶아서 나물로 팔고, 배추는 겉절이로 만들고. 고춧가루를 6가지 종류로 나누어서 팔고, 철거민들이 모여 살 때라 잘 팔렸어. 아들은 10살쯤 되니까 관청 심부름 다니며 무슨 과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 조사하고 다니더라고.
아침에 “다녀오겠습니다”하고 나가는 아이들 다 보내고 나면 아침 먹었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하청 일을 하는 거야. 누가 일거리 갖다 주면 다 했어. 인형 만들고, 봉지에 사탕 담는 일도 하고, 아기 키울 수 있냐고 하면 키워 주고 그래도 저녁에 아이들이 올 때는 꼭 있어야 되고. 얘들이 돌아오면 만든 것을 돌려주고 일감을 받아오고. 잠잘 시간이 없으면 안 자면 되고. 제부가 서울 나와서 장사하라고 자꾸 말해도 아이들이 낯설어할까 봐 할 수가 없더라고. 집안에서만 일을 한 거지.
성남은 처음 올 때는 장화 없이는 못 살 때야. 쌀을 봉투에 사서 밥을 하고 그럴 때 나는 그렇게는 안 살았어. 80킬로 한 가마니가 14000원 할 때인데 가마니로 놔서 먹었어. 신발도 그때그때 따른 걸 사줬지 아무거나 안 사줬어. 집이 있으니 고향에서 친척들이 오면 자고 가고. 손님 접대는 뭐 있나? 돼지고기 김치찌개하고 시금치 무침, 그게 전부야. 그래도 쌀밥에 고기 먹으니 잘 사나 보다 하는 거야. 손님이니까 그렇게 했지. 손님이 아이에게 천 원이나 주고 가면 내게 가져와. “엄마 고기 사요” 하면서. 난 눈물이 나.
큰아들은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다 예뻐했어. 중학교 국어담임이 ‘아드님 제가 돌보면 안 돼요?’ 하는 거라. “어떻게 돌보는데요?” 물으니 제가 잘 인도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중 2학년 땐가 약사암 절에 가서 살다 왔어. 절에 학생회장을 하게 되고 주지스님이 나이 들어 돌아가시기까지 살았어. 큰아들이 서울대학교 가니까 돈 안 들었어. 친척이 아이 데리고 살겠다고 공부 방법만 배우게 하겠다고 해서 매달 내 통장으로 10만 원씩 부쳐주더라고, 그 집에서 숙식하며 아들은 빨래까지 거기서 다 해버려 죽겠다고 했지. 나, 아들 모르게 파출부 생활을 3년 했어. 큰아들 고3 때 시작했는데 자기 집처럼 해주니까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아이가 학교 가버리면 파출부 가고, 돌아오기 전에 집에 들어가니까 몰라. 그릇 닦을 것 내놓으라고 하면 주인할머니가 일 많이 하지 말고 집에 오래 있어만 달라고 했어. 참 좋은 분들이었어. 그러다 큰아들이 서울대 들어갔다고 하니까 남자 주인이 “한번 데리고 와 봐요” 허더라고. 의사였어. 아들을 보더니 자기가 입었던 양복을 탁 벗어 입혀줬어. 그리고 자기 아들 과외를 부탁하는 거야. 그때(1984년) 돈 70만 원을 주더라고. 대학교 앞에서 기다렸다가 기사가 아들을 태워 곤지암 별장에 데리고 가서 과외시키고 나서 아들 자취하는 집으로 데려다주는 거야. 이불 빨래도 다 해오고. 그러다 아들이 시국 사건에 말려들어가니 학교를 못 갔지. 사복 경찰들이 집 앞에 줄지어 있어요. 이젠 파출부를 그만두었지. 아들도 나도.
매일 아침에 사복경찰이 집으로 출근했어. 아들은 집에 못 사니까 세을 얻어서 살렸는데 내가 일하는데 들이닥쳐 “몇 시에 나갔느냐”라고 물으면 아침 6시에 나갔다고 하지. 그러면 일하는 중에도 그 시간을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해. 대답이 똑같아야 하니까. 중간쯤에 와서 다시 물어, 몇 시에 나갔냐고. 그러다 가택수색 하면 “영장 보여 달라”라고 하며 버티고. 그러다 아들친구가 연락이 왔어.
“어머니, 저 보면 알 겁니다, 한 번 저를 만나 주세요”
“ 만나는 주겠는데, 아들을 한 번 보여 달라”
“ 언제 시간이 됩니까”
“ 나는 저녁 6시 넘으면 된다”
성남 태평동에 내리면 산이 있고 그 밑으로 밭들이 있어, 일 끝나고 거기 밭에 앉아있으니까 아들이 왔더라고. 첫 말이 그랬어.
“미안해요”
“미안할 것은 없는데 연락은 해라”
“연락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게 끝으로 행방불명이 됐지. 막 애가 타게 보고 싶고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환장하지, 하지만 딸들에게도 일절 말하지 않았어. 누우면 목이 울컥울컥 하며 숨쉬기가 힘들고 잠을 못 잤지. 6개월쯤 지나니까 제부가 아침에 전화가 왔어. 전화를 받자 우선 내게 하는 말이 “지금 섰습니까, 앉으십시오” 하더라고. 그리고는 “조간신문에 조카(아들)가 잡혔다고 이름 나왔습니다” 하는 거라. 나는 그 말 듣고 기뻐했지, 아이고 살았다 이젠 아들 얼굴을 볼 수 있구나, 제부는 내가 쓰러질까 봐 앉으라고 했는데 난 너무너무 기쁜 거야. 참, 험한 세상을 지나왔지. 고향 떠나고 그렇게 애탈 때는 없었지. 살아온 것이 서럽기만 하고. 나도 부모가 있으면 이런 사람은 안 될 건데 생각되고. 아이고 그땐 정말 뼈가 다 녹아버렸어. 내 인생이 여기서 이렇게 끝날 건가 생각해지고. 그래도 난 아직까지 자식에게 이래라저래라 해본 적이 없어. 아들이 한 일이 4.3이나 마찬가지는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 아들도 그 비슷한 일일 거라고 생각해. 전두환 반대였지만 그 뿌리는 박정희야.
난 자식들은 사람답게 키우고 싶었어. 나란 생각은 못하고 산 거야. 나 진짜 육십 넘을 때까지 화장품 한 번 못 써보고 살았어. 그런 생각도 없고. 그저 부탁받은 일이 남았으면 밤새 일하고 그 일 하는 중에 누가 “수박 끈 매 줄 수 있어요?” 부탁하면 “그래요” 하고. 잠을 자야 된다는 생각도 못 해보고 남과 대화하는 생활도 안 해보고. 아침에 아이들 배웅하러 문 밖에 나가면 사람이 보이지. 그러면 고개만 끄덕하면 끝. 그렇게 살았어. 이웃집 사람이 나를 벙어리라 생각했대.
그땐 초등학교도 월사금 냈어. 외지에서 4명 키우려니 힘들었지. 그런데 그때가 좋은 거 같아. 나로 인해 살릴 존재가 있으니까. 지금은 말도 하면 안 돼. 나라는 존재가 없어. 좋은 말만 해야 하고. 나이 들면 나쁘지는 않은데 자식에겐 항상 걱정이 되잖아, 이제 드는 생각은 남처럼 다정하게 자식을 키워보지 못해서 내 생각은 안 나겠지 싶어. 아이들도 내가 너무 모질게 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럴 땐 눈물겨워, 자식에게 알랑알랑해주지는 못했지. 그게 가슴이 아파.
난 남과 싸움 한 번 안 하고 외상 한 번 안 하고 살았어. 공거 허위어와서 (공짜 끌어와서) 잘 사는 거 절대 아니야. 고향 나와도 인덕은 있더라고. ‘붉은 기와집 아줌마’라고 해서 인정해 주고 나보고 보증수표라고 그래. 난 자식에게 하라, 하지 마라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어. 자식에게 긴 말을 하지 않아. 어린앤가? 난 아이들에게 “그게 아닌데” 못 해봤어. 내가 해온 일을 입으로 변명할 필요가 없잖아. 보여주면 되는 거니까. 젊어서야 내 머리로 살았지마는 지금이야 자식이 날개지. 아들이 지금도 주말마다 오면 슈퍼 가서 장 다 보고 채워놓고 외식하고, 그래서 한 번은 아들에게 말했어
“자꾸 오지 마라”
“왜요?”
“나 100세는 살 것 같은데 계속 그러면 미워질까 봐”
집에 간 아들이 다시 전화했더라고.
“어머니, 거 무슨 말씀이세요?”
자식은 절대 의지하면 안 돼요. 독립을 시켜줘야 사는 거지. 내가 매달리면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나다. 부모가 아무리 잘 살아도 내가 벌어야 사는 거야. 내 생애 남자라고 해서 내 울타리가 돼 준 적은 없어. 그저 이런 거구나, 내가 움직여야 사는 거구나 할 뿐. 동생 데려 살 때도 사촌들 보리 벨 때면 나도 가서 같이 해야 돼, 내 동생 돌보는 일이 커도 가장의 노릇으로 가야 되는 거야. 덕이 없는 남편이라도 남편이 필요해. 지금도 남자신발 하나 신발장 앞에 놓아둬. 남편의 덕이란 게 꼭 돈을 벌어다줘서가 아니라 이런 게 덕이야. 만약에 누가 뭐를 빌려달라고 하거나, 뭣을 같이 하자고 하면 “ 아이고 나 의논해 봐야 한다”라고 이런 말 할 데가 없잖아. 내가 대답해야 하니 그다음에 계산해도 될 일이라도, 남편이 있으면 “물어봐야 돼” 하는데 미루는 게 없으니 그런 의지라는 것을 못 가져봤고, 평생을 그렇게 살았어. 어느 날 아들이 “어머니는 늘 혼자 결정하지 않습니까” 하길래 “그래, 나는 늘 혼자 결정했어” 하니 “어머니 지금 연세가 몇입니까” 하더라고.
잘못했다는 말 들어보는 게 소원
사실 살면서 뭐가 제일 부러웠냐 하면 나는 남이 ‘너 잘못했어’ 그런 말 듣는 게 소원이었어. 그렇게 부럽더라고. 사람들마다 잘한다 잘한다 하는 말, 그게 싫었어. 부모 같으면 잘못한 거 잘못했다고 할 텐데 그런 걸 꼬집어 말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궨당(권당, 친척)이고 뭐고 날 착하다고만 해. 잘한다 하니 더 잘해야 할 거 아니야. 깝죽대며 놀다 오면 왜 놀다 왔냐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늘 바르게, 올바르게만 하는 거야. 잘못을 못 하는 거야. 자식을 키우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잘한다 해야 더 잘하는 거로구나, 자식들이 시험 보고 와서 ‘이것도 틀렸어요’ 하면 다음은 잘하게 돼. 틀린 것이 배움이야. 그랬어.
사람들은 나를 성질 못 된 사람으로 봐. 말이 없으니까. 빙그레 웃기는 잘해. 난 좋은 게 노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 옛날에도 우리 집은 전축이 있었어, 이미자 <동백아가씨> 전축 판이 있었어. “황혼이 물들면 생각나는 그 사람...” 나는 매일 노래를 불러.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이 노래 부른 이도 좋지만 나는 그래도 이미자 노래를 더 좋아하지.
자식에게 말하지 못한 4.3
나는 인간이란 누구나 욕심이 있는 거니까 박근혜가 대통령 나갈 수는 있다고 봐. 그 사람을 찍는 사람들이 문제지. 나도 우리 아버지를 죽인 사람을 곱게 못 봐요. 그런 한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올바른 정치를 할 수가 있겠어. 지금도 노인회 가면 사람들이 박근혜 불쌍하다고 막 울어. 난 입 딱 다물지. 누가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 물으면 "난 정치가가 아니니까" 하고 말지.
독재는 안 돼. 독재는 나쁜 거야. 문재인이 아무리 잘해도 두 번 이상 못하게 해야 돼. 김정은은 오래 못 살아. 난 그 사람 각시가 행복해 보이지 않아. 우리끼리는 싸우면 안 돼. 우리끼리 싸우면 불행해져. 서로 죄를 물으면 불행해지지만 그때 그 명령을 받아들인 사람이 나는 안 옳다고 봐. 하지만 죽은 것도 이젠 원망을 안 해야 해. 덮어놓고 가야지. 4.3 때 늦게 산에 올라간 사람들은 무서워서 피한 거야. 살려고. 난 자식에게 살아온 역사를 다 말하는 사람 보면 부럽더라고, 난 말을 못 해봤어. 4.3 위령제 한번 참가하고 싶다고 하니까 아들이 데려다준 것 외에는 자식과도 그런 말 한 번 안 하고 이 날까지 살았어. 난 자식에게 고생한 얘기 안 해봤어. 왜 해? 잘해서 사는데, 얘기해야 아무런 대가도 없는 일을 왜 해? 어느 자식 하고도 한가하게 앉아서 살아온 얘기를 해본 도리가 없어. 딱딱 그 눈앞의 일만 하면서 살았지.
사실 내 마음은 4.3 일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도 있음 주고 싶어. 사라져 버리는 일을 되찾아 살려주는 데 그 보답을 해야지.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워, 그런 사람들을 월급 주면 좋겠어. 나한테는 배. 보상이 나와도 놓지 말아 줘. 이제까지도 살았는데 사라져 가는 것을 살려놓고 깨워준 사람이 고마운 거지. 이제 유족들에게 나오는 돈, 나 안 받아. 4.3은 어떤 대접을 받느냐가 중요해. 개죽음당한 것 생각하면. 난 아버지 영혼이 도와줘서 살 수 없는 삶을 살았어.
숙소에서(2018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