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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Oct 22. 2023

4.3을 걸어간 여성들-4

- 바느질 매듭풀 듯( 1944년생, 신희자 씨)

30년 전 한림면 증언채록을 다닐 때 서청(서북청년)에 의한 여성 피해를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으로, 또는 가족을 살리려고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과 강제결혼을 하여 사는 여성들을 찾아가면 증언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미 가족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신희자 씨를 만나며 한림면 여성들 신변이 특히 위험하여 서울 대구 부산 방직공장으로 떠났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세금 제일 많이 내던 집

 난 한림면 대림리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4남 4녀의 6번째로, 그러니까 나와 큰언니, 큰 오빠하고는 나이 차이가 많지. 우리 집은 방앗간을 해서 부유했어. 아버지가 일본에서 기계 들여와 기술자 데려서 일했는데 그때는 제주도가 농사 위주의 삶이잖아. 엄청 바빴지.

 해방될 때 나는 6살인가? 큰오빠는 선린상고를 나와 서울상대를 다닐 때였고 둘째 오빠는 오고(제주시 오현고등학교) 다닐 때였을 거야. 그때 우리 집은 막 번성해서 일본에서 목화솜 트는 기계를 사 왔어. 목화를 담아 씨를 빗질하듯 빼고 이차적으로 태우는 기계인데 성산포, 서귀포같이 먼 곳에서도 목화솜 틀러 왔어. 올 때는 양식 지고 지들커(땔감)도 가지고 와서 며칠 밥 해 먹으면서 솜을 틀고 갔어. 잠은 마루에도 자고 난간에도 고팡(창고)에도 자고, 밥은 마당 구석에서나 우영팟(텃밭)에서도 솥단지 걸어놓고 해 먹으며 솜을 틀고 갔어. 그러니 한림에서 1등 부자로 세금을 제일 많이 냈다고 했어.

 우리 집안 어두운 그림자는 큰 형부의 죽음으로 시작되었어. 큰 형부는 해방돼서 경찰에 들어갔어. 감색 경찰복 쫙 입고 나타나면 내 어린 눈에 삐까뻔쩍(번쩍번쩍) 잘도 멋쟁이로 보였지. 그 형부가 무릉(지명) 지서장으로 발령 나서 곽지에서 애월로 옮겨 출퇴근을 할 때야. 그때 산사람에게 죽었어. 폭도들이 총이 없으니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해. 큰언니가 경찰서 가서 봤는데 펀직했던(멀쩡했던) 남편이 죽창으로 잔인하게 죽은 모습을 봤으니 병이 나버렸어. 형부가 돌아가시고부터 굿을 무지 많이 했어. 그래도 언니가 시들시들하니까 요양한다고 애월에 방 하나 빌어서 조카들과 살았어. 우리 집은 너무 시끄럽고 복잡해서 환자가 살 형편이 못 되니까.  

 큰언니 사는 집 가보니 이문 간(문간채)에 방 한 칸 빌려서 살고 있는데 조카는 돌이 넘었는데도 몸이 작았어. 난 아기구덕을 흔드는 일을 하고 언니는 겨우 걸어 다닐 정도였는데, 도저히 답답해서 못살겠더라고. 한 며칠 있었나? 내가 가겠다고 하니까 언니가 조금만 더 있어달라고 애원하는데 도저히 못 살 커라(못 살겠어). 한 참(4km)되는 길을 걸어서 와 버렸어.  오다가 돌아보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큰언니는 집 입구에 서서 나를 보고 있더라고. 나는 동산에서 내려가는데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서 있는 거야. 그게 언니와 마지막이야. 그때 생각하면(목이 멘다) 지금도 아파. 아홉 살 동생 의지 삼아 언니는 하루라도 연명했던 거야. 애월은 언니의 마지막 수순 단계였던 것 같아. 큰언니가 죽고 3남매였던 조카들도 모두 죽어 그 집은 온 가족이 몰살된 거나 마찬가지가 된 거야.


 큰오빠는 대학생일 때 결혼했는데  계속 공부하느라 서울 후암동에 살았어. 올케언니는 신랑 없는 시집에 있어봐야 일이 너무 많으니까 서울로 가서 영등포 방직(경성방직) 회사에 다니며 오빠를 만나고 했는데 6.25가 나서 북에서 서울대생들을 몰아갈 때 북으로 가버렸어.

 우리 동네에서 간 방직 아가씨들도 전쟁이 터지니까 걸어서 부산까지 와서 배 타고 제주로 들어왔지. 큰올케도 우리 집으로 들어왔어. 큰올케는 행방불명된 오빠 기다리며 우리 집 관리를 맡았던 것 같아. 아버지 돌아가시고 둘째 오빠는 폐병 걸렸으니까. 한 10년 우리 집 살림 맡아 살다가 애월로 재혼해서 갔지. 그 후 남북교류가 되어 이산가족 신청할 때 우리도 신청했는데 그때마다 오빠는 안 나타났어.    

예비검속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잡혀가던 날은 아직도 생생해. 전쟁 나던 해 여름, 그날은 달이 훤했어. 낮이 길어져 방앗간 일을 7-8시까지 할 때였지. 늦은 저녁을 큰 평상에서 다 같이 몇 파트로 나눠서 먹을 때야.  아버지는 할머니와 겸상을 해고 먹고 있는데 총 멘 순경 두 명이 들어와 아버지를 찾았어. 그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바로 " 가자”라고 했고 할머니가 막았어.

“ 무슨 말이요? 지금 밥도 안 먹었는데 밥은 먹고 가야지”

“ 아, 금방 돌려보낼 겁니다”

그게 마지막이야.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버지가 미리 도망을 가면 되었을 걸. 어머니가 마지막 찾아간 곳이 한림 바닷가에 있는 수산물 창고(한림수협창고)였어. 거기 대림리 사람 10명이 있었어. 한림 귀덕 사람도 몇십 명 되는 것 같았고. 다 똑똑한 사람. 다 괜찮은 집 사람들로만 뽑은 거야. 어머니가 아버지 옷 보따리를 들이려 하니까 면회는 안 된다며 계란 100개를 가져오면 면회를 시켜주겠다는 거야. 그땐 독새기(계란)가 귀했거든. 어머니가 동네 계란을 다 모여서 가져가니 또 100개를 가져오라고 했어. 동네에서도 연구했겠지. 계란 100개를 또 모아 가져가면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갔어. 옷을 내밀며 입던 옷을 내주라고 하니 그때는 “여기에 없고 모슬포에 있다”는 거야. 거기서 다 총살시킨 것도 나중에야 들었어.  장마 막 지나고 나중에 소식 들리기를 모슬포 굴에 시체가 매장되었다는 거야. 근데 접근을 못했어. 누가 거길 지켰던 모양이라. 그러다가 몇 년 후 접근금지 해지되자 시체를 거두러 갔어. 갔는데 뼈들이 다 섞여 누가 누군지 모르는 중에 아버지는 찾았어.

 우리 집에서 일하는 도두리 기술자가 꿈을 꿨는데 그이는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진에서는 보았지. 모슬포 어디 가서 잠을 자는데 우리 아버지가 나타났대.

“마 편 쪽으로(마파람 부는 쪽으로) 세 번째에 있으니 그리 알아라”

거기를 찾아가니 정말 아버지가 나왔어. 잡혀갈 때 가죽구두를 신었고 삼베 바지를 입고 가죽 허리띠를 했으니 그걸 보고 아버지를 찾았어. 그래서 그때는 잘 살 때니까 어머니가 정시(지관, 묏자리 보는 사람) 데려다가 도시락 싸서 땅을 보러 다니더라고, 그래서 아버지는 개인 묘를 했어. 그때 신원이 확인된 몇 사람이 개인 묘를 만들 수 있었어. 나머지는 누가 누군 지 몰라 합동으로 묘를 썼고.  


 아버지에게 무슨 죄가 있었을까? 죄가 있다면 부자인 죄, 똑똑한 죄. 그때 대림리에서 잡아간 사람들은 모두 똑똑하고 잘 사는 사람들이었어. 왜 그런 사람들만 잡아갔을까. 그 동네에서 잘 사는 게 약 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했다는 말을 들었어. 마을이 뒤숭숭했지. 나중에 소식 하나를 들었는데 우리 아버지가 총 쏘기 전에 같이 쓰러졌다가 나중에 조용해지니까 일어서 나가는데 뒤에서 총을 쏘았다고 거기 있었던 사람이 말하더라고.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연루된 것은 맞아. 동네 사람이 왜 그 장면을 봐? 자긴 그걸 구경한 거지. 흉년 들어 배곯을 때는 쌀도 빌어가고 석유도 사가고 하던 사람들인데. 어머니는 나중에 그런 이들을 미워하더라고. 우리 집안은 망가지고 그 사람들은 버젓이 다녔으니까. 아버지 억울한 죽음은 몇 년 전 우리 셋째 오빠가 변호사 사서 재판하고 보상도 받았어.


섯알오름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발발한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모슬포 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347명 가운데 195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모슬포경찰서 관내 각 지서에서는 6월과 7월 무고한 농민, 공무원, 마을유지 학생 344명을 모슬포와 한림에 분산 수용해 자의적 판단에 따라 A, B, C, D로 분류하며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정부가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으로 퇴각하는 와중에 모슬포 주둔 정부군은 210여 명을 집단학살 암매장한 후 시신 수습을 차단키 위해 이 일대의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고 군, 경에 의한 경비를 강화했다. 그 뒤 이곳 학살터는 7년 동안 출입금지구역으로 되었고 유족들은 이웃의 질시와 능멸, 그리고 연좌제로 시달렸다. 한림유족들은 1956년 3월 30일 심야를 이용, 시신을 수습해 만뱅디 공동묘역으로 유해를 운구 60위로 맞춰놓고 치아와 유품을 통해 가족으로 확인된 17구는 개인묘역으로 옮기고 43위는 한림읍 명월리 ‘개꼬리 오름’에 안장했다. 이때 신희자 아버지는 신원이 확인되어 개인묘로 옮겼다. 현재 모슬포 묘역에 132구, 한림 지역 희생자 63명의 시신은 만 뱅듸 묘역에 안치되어 있다.  


 우리 집이 기운 것은 아버지 죽음이지. 큰언니 가족 쓰러진 거야 감당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뿌리가 뽑혀 온 집안이 흔들려 버리더라고. 오현고 다니던 둘째 오빠가 공장을 맡게 돼서 학교를 중퇴했어. 난 초등학교 졸업하고 여중에서 입학시키라고 몇 번 찾아와도 어머니가 못 보냈어. 옆에서 심부름할 사람이 없어서 나를 의지하고 싶었던 것 같아. 어머니는 새벽에 달뜨면 허벅지고 봉천수 가서 물 길어 와야 그날 밥을 먹을 거니까 나를 벗 삼아 갔어. 집안이 몰아져 버리니 다들 정신을 못 차려, 이때 집안이 복잡하고 어려웠어.

 6.25 전쟁이 나고 일주일 만에 언니(둘째 언니)가 광목을 등에 지고 나타났어. 북한에서 와 공장을 차지하니 봉급도 못 받고 그 대신 광목 몇 필을 지고 왔더라고. 둘째 언니는 큰오빠가 행방불명됐다고 대성통곡을 했어.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당하며 서울대학생들이 무지 잡혀갔다는 거야. 큰오빠는 밤중에 다리에 총상을 입고 들어왔는데 다음날 학교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거야.


 둘째 오빠가 점점 성격이 이상해갔어.  난 오빠 옆에 붙어서 물 가져와라, 죽 쒀 오라 하면 바로 "예 예" 하며 시중을 들었어. 화를 잘 내고 나를 종같이 부리더라고. 오빠가 안방에 와 앉으면 우리는 무서워가지고 벌벌 떨고. 기운 없는 소리로 “ 희자야, 희자야...” 부르다 내가 못 알아들어 금방 안 가면 엄하게 눈을 부릅뜨고 무섭게 구는 거야. 내가 지레 겁먹고 벌벌 떠니까 그 이상 벌은 못 주는데 농고 다니는 셋째 오빠가 마당에서 기압 받는 걸 종종 봤지. 더 힘들었던 건 어머니를 못 살게 굴더라고. 학교도 중퇴하고 몸은 병들고 아버지 하나 기둥이 무너지니까 오빠 짐이 많아서 화병으로 그런 거야.  공장 운영하느라 스무 살 전에 폐가 나빠졌으니까 성질이 난폭 해진 거지. 기침하면 피 가래 나오고 그때는 폐병 걸리면 초약(약초)으로만 한 것 같아. 그때 우리 집 상황이 상당히 위험했던 것 같아.

 둘째 오빠가 아프니 방앗간 일은 거의 어머니가 했지. 어머니는 도두리에서 기술자를 불러다 일을 했어. 어머니가 기술자 데리러 가던 날이 생각나. 밤중에  “ 지금 새벽 한 시인데 이제 걸어서 갔다가 오마” 하며 나갔어. 버스가 안 다닐 때라 새벽 한 시에 걸어 도두리까지 갔다 온 거야.  정말 아침 식사 전에 돌아왔어.

“ 어머니, 그 먼 길을 어떵(어떻게) 다녀왔어?”.

“내리막길은 날아서 가고 오르막길은 뛰면서 갔져(갔다).”


보살이 되라던 친정어머니

어머니는 절간 다니며 모든 정성을 빌었는데 귀덕마을 설문대할망이 들어오는 곳, '복덕개'에는 갔어. 방앗간을 하니까 거기 가서 물 떠놓고 상 차려가지고 제를 드렸어. 집안이 쓰러져가니까 굿하려고 밭도 하나 팔았어. 심방(무당) 앞에 가족들 다 놓으면(운세를 보면) 내가 경(그렇게) 나쁘다고 하는 거야. 내가 엄청 고생하겠다고 하니 어머니가 말했어.

“ 느랑(너는) 결혼하지 말앙(말고) 보살(菩薩, 절에서 살라는 뜻) 돼라”

어느 날은 명월(*한림면 중산간 마을) 절간에 데려가더니 내게 돈 주면서 12 조왕신에 돈을 올려서 절하라고 하시는 거야. 시키는 대로 절하고 돌아오는데 한림성당을 본 거야. 얼핏 들어가 보니 성당이 좋은 거야.

 “어머니, 나 불교보다는 성당이 마음에 드는데 성당 다니면 안 될까?”

“ 좋다, 좋다.”

어머니는 수녀님이 돼도 좋다고 했어. 내 고생을 어떻게든 막고 싶었던 거지. 난 오빠 간병하며 옆에서 뜨개질을 많이 했어. 그렇게라도 해야 견디니까. 그런 중에도 둘째 오빠가 나에게 알파벳과 방정식을 배워줬어. 그때가 초등학교 졸업한 때인데 난 볼 살이 쏙 빠지고 사람 꼴이 그래서 동네사람들이 수근수근 댔어.

“ 저 희자, 그대로 두면 안 되겠다, 오빠 심부름 하다 희자 죽겠다. 아들은 결국 죽을 거니까 희자라도 살려야 한다.”

 햇빛이 짱짱하던 날, 나는 오빠 간병에 지쳐 난간에 앉아 있는데 내 꼴이 반쪽 되어 죽게 생겼나 봐. 결국 어머니가 나를 제주시로 빼돌렸어.

“ 나 죄다, 자식들이 무슨 죄냐, 네가 무슨 죄냐, 제주시로 가라”

제주북초등학교 앞에 양재학원이 생겼는데 거기에 이불보따리 하나만 지고 나를 보낸 거야.

“희자를 빼돌렸다”라고 둘째 오빠가 엄마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몰라. 가끔 집에 와 보니 어머니가 엄청나게 고통받고 있었어. 오빠 성격이 날카로워지니 방애 지다가도(방앗간 일 하다가도) 쌀 고팡(창고) 문 잠가 때리기도 하고. 아버지 죽은 후 오빠의 인생이 확 달라져 버린 거잖아. 무서웠어. 어머니는 그냥 두면 나도 죽을 것 같으니까 결단을 내린 거지.

 양재학원에서 배우는 건 재미있었어. 천을 만지고 재단하는 일이 적성에 맞은 거지. 수강생이 한 30명 되었는데 1년 반 정도의 과정이 끝나니까 어머니가 나를 또 서울로 보내더라고. 후암동에 고모님 딸이 살았어.  큰오빠도 월북하기 전까지 살던 곳인데 거기서 살며 남대문시장 양장점 시다(보조)로 일했자. 그런데 서울은 벌써 제품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양장점이 어렵게 돼 있더라고.  더 나은 일자리 찾아서 방직공장이 있는 대구로 내려갔어.

대구방직회사 친구들(1950년대, 앞 줄 오른쪽 신희자 씨 )

 

  방직으로 몰려간 한림 처녀들

  4.3에 산에 폭도 막으라고 젊은 여자들을 보초 세우니까 어머니들이 머리를 써서 열 명 이상을 방직회사로 보냈어. 어린아이들도 커 가면 보내고. 둘째 올케도 같이 갔어. 그때 한림 처녀들이 방직으로 많이 갔어. 금성만 해도 그렇게 위험하진 않았는데 우리 동네가 특히 위험하더라고. 둘째 언니도 18세가 되니까 어머니가 보냈고. 그때는 집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어려워서 보낸 집도 있지만 4.3 끝에 마을이 젊은 여성들에게 위험하니까 어머니들이 연줄을 따라 대구로 서울로 보내는 거야. 그 험한 시국에 살아나려고. 그땐 해방으로, 4.3으로, 6.25로 사회가 어지럽고 난폭해져서 처녀들 밖에 다니기가 위험할 때야. 여자들이 걸어 다닐 수가 없었어. 그때 삼척대(?)가 만들어졌다고 해. 남자들이 너무 거칠어 보호하려고. 둘째 올케는 6.25 전쟁이 나니까 제주에 내려와서 오빠와 결혼했는데 집안일에 공장일까지 너무 힘드니까 다시 방직에 갔어.


 난 대구에서 원대 시장 미도파양장점 재봉사로 취직이 됐어. 대구에는 방직 아가씨들이 많았어. 제주에서 온 아가씨들도 많고. 그들이  “ 양장점 해라, 우리가 밀어 주마” 그게 사업 연줄이 된 거지.  방직공장 아가씨들이 옷을 잘해 입더라고, 놀러도 잘 가고. 여름옷감으로 지지미를 많이 찾을 때였지. 깔깔이는 좀 고급이고. 일감은 엄청 많았어. 양장점이 잘 되어가니까 배움에 하도 목이 메어서 이젠 밤에 야간고등학교에 들어갔어. 대구 칠성통에는 야간학교가 있었는데 거기 유명한 선생님들이 와서 가르치더라고. 중학과정 건너뛰고 고등과정 다니는데 어느 날 야간학교 갔다 와서 지쳐서 폭 잠이 들었는데 도둑이 들었어. 옷 재단해 잘라둔 것까지 모두 가져가버렸어. 군인 가족들이 군복을 뜯어서 그걸로 뒤집어 바지 만들어달라고 할 때야. 그렇게 다들 못 살았어. 그때부터 내가 헤매어버린 거지.

 그때 둘째 오빠가 긴긴 편지를 보내왔어. 희자야, 내가 잘못이 많다,집에 들어와라, 뜨개질로 짠 옷을 보면 늘 너 생각이 난다, 내가 양장점 차려주마, 10장에 걸쳐 편지를 썼는데 눈물이 나게 쓴 거야. 그 후로는 미싱도 오빠가 다 사주고 그렇게 잘해주더라고. 오빠는 문학을 할 사람이었어. 궤(櫃) 안에는 원고지가 수북이 들어 있었다고 해. 오빠의 긴긴 편지를 읽고 22세에 제주로 돌아왔어.  


한림 최초의 양장점

 제주에 와서 내가 양장점 차릴 때가 1960년대 초반이었지. 내가 한림면에서 최초였어. 그때는 모두 치마저고리 입을 때라 아무도 양복 바느질을 못할 때였어. 즈봉(바지)은 상놈들이나 입는 걸로 알 때였지. 옷감은 목포배 타서 대구 원대 시장 가서 직접 사 왔어. 거기 가면 온갖 직물이 다 나와. 겨울 옷감은 뭐니 뭐니 해도 모가 최고지. 다른 계절엔 나이롱(나일론)이 대 유행할 때라. 방직아가씨가 나이롱 옷 해 입으면 와~~ 했어. 불에 놓으면 보르록(후다닥) 타 녹아버리는 천. 처음에는 블라우스, 바지, 몸빼를 주로 하다가 차차 원피스 투피스를 만들었어. 그런데 험한 시절은 갔어도 여전히 난 남자들이 무서웠어. 덩치 크고  힘센 남자들 보면 무서워 죽겠어. 걷고 있으면 뒤에서 안아버리고. 아는 오빠를 보디가드로 의지해서 지냈는데 점점 수녀가 되고 싶은 거야. 그래서 친구 2명 하고 수녀원에 들어갔어. 광주에 있는 까리따스 수녀원인데 고등학교 선생님들 배출하고 하는 좀 높은 곳이었어. 피정만 한 달 하고 돌아왔어. 꽉 막힌 갇힌 생활은 또 강박관념이 있어가지고 안 맞더라고. 수녀예비교육으로 한 달 피정해서 적성 보고 맞으면 들어가고 아니면 빠지는데 나만 빠졌어. 과정에서 또 한 명 빠지고 마지막엔 한 명만 수녀가 되었지. 그러다 보디 결혼이 늦어진 거야.


제주 한림성당에서 올린 결혼식 (1972년)


  결혼은 27세에 했어. 내게 대시하는(접근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남자들은 거칠고 무섭고 음흉하게만 보이더라고. 대구 양장점 할 때도 따라 다니던 사람이 있었는데 헌병대에 근무하는 사람이었어. 난 강한 사람이 싫었어.

우리 어머니(시어머니)가 일본에서 고등교육받은 어른으로 한림성당 전도회장이었어. 나를 점찍어 막둥이아들을 소개했는데 회장님 아들이면 괜찮겠다 싶었지. 그때는 정에 끌리거나 사귀어서 결혼하던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성당사람들 말처럼 회장님 보고 결혼한 셈이지. 어머니가 시집 식구 8형제 중에서 제일 순둥이라고 자랑했는데 웬걸, 말도 못 하게 폭삭 고생했어.

 양장점은 한 6년 하다가 결혼하면서 치워버렸지,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이 키워야 하니까. 그때 돈 6만 5천 원 받고 팔았는데 초가집이 10만 원 일 때였어. 그때가 1968년쯤이니까 그 돈에 조금 보태면 집 한 채 사겠네 했는데 남편이 서무과에 있으며 공금을 막 쓴 거야. 감사 들어올 때니까 남편이 그 돈 좀 빌려주면 감사 끝나고 가져온다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이 된 거야. 그다음부터는 집 없이 새 빠지게 고생했어. 남의 집 빌려 살면 년 세가 50만 원도 되고 100만 원도 되고 시댁은 8남매인데 시댁대로 시어머니가 계하다 파산해서 집이 날아간 상태였고. 그러니 거기도 밑바닥, 우리도 밑바닥이야.

 남편이 이시돌 목장의 서무담당으로 돈 들고 다니며 직원들 월급도 주고 하는 역할을 했는데 임피제 신부님과 자꾸 부딪치게 되었어. 그때 임심부님은 이시돌 목장을 지으려고 외국에서 목재를 들여왔는데 이게 자꾸 도둑맞는 거야. 남편은 임신부님의 재산을 지켜줘야 하니까 자꾸 마찰이 생기는 거지. 그땐 나무 도둑질도 많았어. 임신부님 밑에서 10년 일 하며 사표를 여러 번 냈어. 세 번째 목재 도둑맞을 때에는 할 수 없이 사표가 수리 됐어. 그 후 은행이 있기 전 무진(상호 신용계)에서 총무로 들어가서 돈을 모집하고 그랬는데 나중에는 무진이 망했어. 부도가 나면 같이 망해야 하는데 우리는 거지가 되고 동업자는 부자가 됐더라고. 친구와 건축일도 하였는데 본인이 벌어오는 것은 없는 거야. 남 도와주기 바쁘고. 실속이 없어. 그래서 남들은 인정 있다고 다 좋아해. 지금도 남편은 그게 자존심이라.(웃음) 내가 60세에 집을 지었으니까 남의집살이를... 이사를 19번 했을 거야. 그래서 다시 양장점을 한 거야.

 남편과는 동창이야. 군대 지원해서 해병대로 갔는데 거기서 술을 잘 못 배운 거야. 술 먹으면 깡패가 되더라고. 심성은 착해. 그러나 술 먹으면 돌아버려. 남편 집안이 4.3 때 대림청년과 서북청년단 같은 단체들과 같이 뭐를 했던 것 같아. 남편 부모님 대는 그런 것 같아. 내가 사상 때문에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데 무슨 말을 하면 남편은 좀 다른 식으로 얘기해. 현 정부를 보호하는 듯한 말이 나와. 나 때문에 조심은 해. 남편은 어머니 앞에서는 차렷 경례해. 근데 술만 먹으면 무슨 마귀가 들린 것 같았어. 부수고 날리고, 어찌어찌 환경이 바느질도 못하게 됐어. 내가 삶에 허덕이니까 수녀님이 와서 권유했어.

“ 베로니카, 여기 와서 산아제한 교육 지도자 해봐”

 광주 가서 지도자 교육받고 신자들에게 교육하는 중 내가 임신한 거야. 1년 정도 하다가 신자라서 유산도 못 시키고 그래서 그만두었어.   그때는 인구가 폭발해서 줄이라고 하는구나 싶었지마는 하나 둘 낳으라고 하는 것이 마음에 맞지는 않더라고. 이제는 보험회사를 다니게 된 거야. 그래서 보험회사를 10년 다녔어. 삼성생명 7년 다니니 흥국생명 소장으로 스카우트되더라고. 그때 낳은 아이가 이제 47세야.


베로니카, 이혼해도 돼

 남편은 시발택시를 하다가 아이를 치어 감옥 갔다 오고 하는 일마다 안 돼서 50줄(50대)에 사우디(사우디아라비아)를 갔어. 거기서 1년 버니까 수협, 제주은행, 신협, 마을금고 등 은행마다 진 빚을 다 값았어. 나도 보험 다니며 보태니까 1년 만에 딱 값아지더라고. 남편이 와보니 빚이 다 값아졌으니 자기도 기분이 좋잖아. “이번 갔다 와서는 집사면 되겠다”라고 다시 가려고 할 때 남편 친구가 와서 꼬드겼어. 서방을 개떡 같이 알아 외국 외국 한다고, 내(남편친구)가 다 키워줄 건데 외국 가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그 사람 밑에 가서 아파트 공사도 하고 했지만 안 되더라고. 공사는 받았지만 이 사람은 성품이 직원 챙겨줘야지 친구인 사장 챙겨줘야지 하다 보면 자기 소득은 없어.

 어느 날 하도 갑갑하길래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기도하다가 십자가에 박힌 예수님 손등 구멍을 보게 됐어. 그 못이 손등 뼈에 박힐 때의 고통을 생각하다가 ‘ 아.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더한 고통도 이겨 내야 되겠다’ 하는데 그 시간이 한 3-4 시간 된 모양이야. 길 신부님이 나를 보더니 부르시는 거야.

“ 베로니카, 이혼해도 돼. 너무 고생하지 마. 못 견디게 그렇게 살 필요 없어. ”

“신부님, 괜찮아요. 예수님 앞에서 기도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고통만큼은 안 아프니까요.”

 내가 이래도 살고 저래도 살고 하니까 너무 그렇게 고생하지 말라고 성당 계율이 이혼하면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이혼 못하는 줄 아셨나 보더라고.

 오죽하면 나도 일본 갔어. 보험회사 나와서 쉰(50세) 될 때 요코하마에 갔어. 거기 가면 환율이 높잖아. 남편이 사업해도 70만 원 집세를 못 내길래 내가 슬쩍 말했어.

“게문(그러면) 어떻게 하나. 보험도 치웠고(그만둬 버렸고) 내가 일본 가서 돈 벌어 올까”

 남편이 아무 말도 안 해, 조용하는 거야. 그래서 아이 다섯 명 놔두고 일본 간 거야. 그게 무슨 될 법이나 한 일이냐고. 큰애가 대학 가고 둘째 셋째는 고등학생 막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 큰딸에게 1만 얼마를 딱 적어서 줬어. “아버지께 돈 타서 쓰되 정 궁할 때만 이 돈을 써라” 부탁하고 갔는데 큰딸이 천생 여자야. 아이가 그만 너무 부담이 되니까 질려서 아파버린 거야. 제주대학병원에 입원했어. 둘째는 자기가 주인 돼 보니까 동생들 챙겨야지, 부담이 엄청난 거야. 경 허난(그래서) 집에서 도망가 버렸어, 가출한 거야. 셋째가 초등 6학년 때인데 야무지더라고, 이젠 걔를 부렸어. 하루에 두 번 동전 딱 놓고 아침저녁으로 전화했어. 동전 달가닥 내려가면 간단히 묻는 거야.

“ 무슨 일 없어? ”

 7개월 만에 집에 왔어. 일본서 번 돈으로 집세도 물고. 그런데 집안 꼴이 뭐가 됐겠어? 나 있을 때는 아들이 경(그렇게) 똑똑하더라고. ‘쟤는 나 없어도 되겠구나’ 싶어 갔는데 아이가 헤매고 돌아다니며 방황을 엄청 한 거야. 아들 담임 선생님 만나니까 내 손을 탁 잡으며

“ 아이고, 동현이 어머니, 절대로 어디 가지 맙서(마세요). 동현이가 헤매는 걸 보니 안되컵디다게(안 되겠습니다)”

오충완 선생님, 잊어버려지지도 안 해. 그래서 딱 정리하고 들어오니까 애 성적이 싹 올라가는 거야. 안정감이 있으니까. 그렇게 이 남편이 계속 헤매는 생활을 만들더라고. 자기 가족은 못 챙기고 남의 가족은 챙기고.

 일본에서 돌아와 다시 양장점을 시작했어. 그때는 폐지됐던 교복이 재부활되어 집에서 교복을 만들게 되었어. 서섯동산에 “ 코스모스 양장점”이란 간판을 걸고. 그런데 기성복 시대가 다가온 거야. 그때는 여성학원에 가서 이공자 선생님에게 한복 만드는 법 1년 배우고 한복점 차려버렸지.  50세부터 30년간 한복집 해서 지금까지야. “전통인 한복” 상호로 나는 한림에서 제주시에서는 딸이 해. 양장이나 한복이나 어렵긴 다 마찬가지인데 한복은 한 땀 한 땀 하는 거니까 한 땀이 틀리면 옷이 틀어져버려,  그만큼 한복이 더 섬세하지.

 한복집에서 (2023년)


 난 돈 안 벌어다 주는 건 생각 안 해. 술 마시고 회장만(빙빙 돌지만) 않았으면 깡패 짓만 안 했으면 무엇보다 아이들 힘들게만 안 했으면, 그게 젤 가슴이 아파. 남의 집 장독이 온전한 것이 그렇게 부러웠어,

 어느 날인가는 밤새 아이들 잠 못 자게 고생시켜 놓고는 5시쯤 되어 밝아가니 자기(남편)는 침대에서 자는 거야. 두어 시간밖에 못 잔 아이들을 깨워서 학교에 보냈어. 내가 보험회사 다닐 때니까 세수하고 출근하려는데 내가 확 도는 거야. 울컥하니 부아가 올라와 참지 못하겠어. 세숫물을 자는 남편 얼굴에 확 지쳐버렸어.  그때까지 난 반항을 한 번 못해보고 살았거든. 그 후 남편이 이혼하자고 할 때 내가 적극적으로 “합시다” 하며 앞서가니까 풀이 죽으며 차츰차츰 달라졌어. 성당 피정하면서 달라지고 에이미 하면서 달라지고 나중에는 아버지신도 회장까지 했잖아.

 

 셋째 오빠도 맘고생이 많았어. 농업학교 나와서 농협 들어갔는데 그때는 시험 보고 진급하는데 1등으로 붙어도 승진 안 시켜 줘. 그 때문에 오빠가 억울해서 병날 뻔했어. 농협에서 승진이 안 되니까 오빠는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잘 나가던 사업이 사기를 당해 어려움을 겪었지.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우리 집에 자꾸 누가 얼씬거린다고 오빠들이 하는 짓이 간첩 같다고 대공분실(안기부)에 신고하고 거기서 총출동했는데 간첩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안기부직원이었어. 양장점 하며 내가 서울에 물건 하러 갈 때에도 누가 뒤에서 쫓고 있다고 하더라고. 주위에서 “ 희자 뒤를 누가 쫓는다”라고.

셋째 오빠는 승진이 자꾸 막히니까 신경쇠약에 걸렸어. 결국  승진이 자꾸 막히자 농협을 그만두었지.

 

 아직도 이해 안 되는 죽음들

 이 동네에서는 우리 집이 제일 망했어. 우리보다 더 억울한 사람은 없어. 집안의 기둥이 없어지니 어머니가 기계 보는 사람하고 일하다가 기계가 고장 나면 소구루마(소가 끄는 마차)에 기계 싣고 제주시로 가서 고쳐왔어. 둘째 오빠가 몸이 아파 농사를 못 지으니까 정미소를 크게 확장시키려 밭도 팔고 했는데 결국은 무리가 돼서 삽시간에 집안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것을 내 눈으로 봤지.

 우리 동네 사람들과 4.3이나 시국 얘기 하다보면 생각이 나하고는 다르더라고. 내가 유튜브나 방송 보면서 중심 잡아 말하면 내가 하는 말이 틀린 얘기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 나도 이렇게 변화된 것은 글 쓰면서 “ 태백산맥”(조정래 대하소설)이나 “혼불”(최명희 대하소설) 같은 책도 읽으면서 알게 된 거지, 그전에는 나도 박근혜, 한국당(보수당) 쪽이었어,   

 생각해 보면 폭도에 연루된 사람들이 일본에 많이 간 것 같아. 어릴 때 생각에는 ‘도망간 사람이 폭도인가?’ 싶기도 하고. 난 지서장으로 있다 찔러 죽은 형부가 어떤 죽음인 지 그게 궁금해, 이것 좀 알아봐 줘.*

 지금도 가끔 아버지가 왜 돌아가셨을까 생각해 보게 돼. 그 당시 분위기가 산에 간 사람들은 똑똑했으니까 마을에서 똑똑한 사람을 골라내라는 명령이 와서 사살했다고 봐. 똑똑하니까 산과 연관되었을 거라 생각해서 죽였다고 생각해. 아버지가 유지여서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당시 신문을 보며 지금 북이 쳐들어왔다는 얘기를 해서 어머니가 걱정했다는 얘기는 들었어.

 

70대에 시작한 시와 그림공부

  나, 때로 미친년 될 때가 있어. 옛날 생각하면 북부기(허파)가 올라올 때가 있어. 뭔가 쏟아붓지 않으면 화가 나고 마음에 병이 날 것 같아서 70세부터는 제주대학교에서 수필 강의를 들으며 시와 그림을 시작했지. 그게 인연이 되어 76세에 심리학공부도 하고 자격증도 땄어. 심리상담 공부도 내 마음 다스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

 어릴 때 어머니가 실을 길게 늘어뜨리면 엉켜 매듭이 많이 생기잖아. 난 어린 마음에 그걸 똑 잘랐으면 편하겠는데 어머니는 그 매듭을 다 풀게 하셨어. 얽힌 실매듭은 꼭 풀어야 한다고, 그래야 세상사는 데도 풀면서 산다고 하셨어. 그래서 시집 이름도 <바느질 매듭 풀듯>이야. 세월을 엮고 보내는 것, 아까운 세상이잖아. 허송세월하며 살고 싶지 않아서 뒤늦게 시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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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희자 씨 부탁받고 나중에 조사해 보니 형부 장인근 씨는 곽지리 희생자 명단에 올라 있고 동네사람들이 보증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사망날짜는 1950년 12월 27일 군인에게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날짜도 안 맞고 피해 사실도 안 맞는데 직계 가족이 없이 동네 분이 올렸을 때 종종 이런 오류를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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