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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경인 Oct 22. 2023

4.3을 걸어간 여성들-3

-  녹색 옷을 못 입는 삼촌 (1944년 생, 김신자)

 1942년생 신자삼촌*은 17살 아래인 내게 적당한 호칭을 못 찾았는지 '이모'라 불렀다.

 2022년 11월, 서울 인사동 유족모임에서 만난 신자삼촌은 전골 만둣국을 입에 대지 않고 바라보기만 했다.  

" 내일이 제사야"

7살 어린아이가 본 전쟁, 신자삼촌에게 4.3은 전쟁이었다. 가족들이 군인에게 죽는 광경을 목격한 신자삼촌은 평생 카키녹색과 11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75년이 지난 지금도 11월이 돌아오면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는 것이다. 이 때는 며칠이고  물만 마신다.

 신자삼촌은 국회에서 방영한 4.3 다큐 영화 " 돌들의 침묵"을 보러 갔다가 익숙한 오름이 나와서 눈을 가렸노라고  왜 그 장면을 자신에게 보게 했는지 원망스러웠다고도 했다.

 " 그 오름 장면 조천 함덕에 가서 틀면(상영하면) 큰일 나. 그 동네 사람들은 거기 학살 장면도 다 봤을 거 아냐? 내가 그 오름에 고사리 캐러 갔다가 웅덩이에 빠졌는데 그 밑에 해골들이 있었어."

 자신이 겪은 4.3 현장을 보는 것은 고통스러워 가족이 죽어나간 옛집 가까이 못 간다는 신자삼촌.  4.3 때 불타고 없어진 140여개 마을들, 그 속에 신자삼촌 고향도 있다.

 4.3을 살아낸 여성들은 " 덜 설워야 눈물이 난다"라고 한다." 4.3 얘기를 하는 것은 추접하다"라고도 한다. 제주어로 추접하다는 말은 더럽고 부끄럽고 추하다는 뜻이다. 이 말 속에는 군인 경찰로 부터 당한 성 추행, 강간 등 인간으로 차마 못 볼 것을 봤다는 뜻도 담겨 있다.


 제주도에 사는 친정어머니를 만나러 갔더니 한 달 사이에 쇠잔해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덜컥 겁이 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어머니 무슨 걱정거리 있수과(있나요)?"

" 며칠 잠을 설쳐서..."

" 왜요?"

"아, TV에서 이태원인가 하는 동네에 느랏느랏 누운 시체들을 보니까 네 할머니 학살된 동박굴홈에 시체 찾으러 갔던 생각이 나서, 어쩜 꼭 그때 장면 그대로 보였는지..."

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 걸까. 현장을 그 상황을 떠올리지 않게 하는 것? 적어도 맞닥뜨리는 게 방법은 아니지 싶다.


 젊은 시절 배우처럼 아름다웠던 김신자 삼촌은 글을 읽지 못한다. 4.3 여성유족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영원히 말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는 경우가 많다. 신자삼촌은 얘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며 나를 동두천에서 유명한 떡갈비 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싸주고 동두천중앙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역 앞에서 신자삼촌은 내 손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 이모, 전쟁은 안돼. 전쟁은 안 되는 거야."  


동두천 자택에서 증언하는 김신자 씨(2021년)


고향 수기동은 잃어버린 마을

난 1944 생인데 호적에는 1946년 생으로 올라갔어. 고향은 조천면 와흘리 수기동**인데 옛날에는 ‘물 터진 골’이라 불렀지. 바농오름 아래 바농뱅디(들판) 아래 당시 50여 호가 살았을 거야. 할아버지가 구장을 10년 하고 아버지가 15년 했는데 마을에서 세금 못 낸 사람 있으면 대신 내주기도 했대. 4.3 전까지는 농사도 짓고 소 30마리, 말 50마리를 키웠어. 중산간 마을이니까 어느 집이나 마소를 키웠고 소나 말에 새기는 낙인은 마을 공동으로 하는데 우리 집에는 낙인찍는 도구가 따로 있었어. 그 많던 소 말이 다 어디 갔는지 난리(4.3) 끝나니까 다 없어졌어. 지금은 다 떠나고 외지에서 온 도둑놈이나 살고 있겠지.

음력 10월 13일,

우리 집은 대가족이 모여 살았는데그때 집안에 남자들은 없었어. 다 숨고 여자들만 남아있는 집에 들이닥친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질러놓고 집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쏴 죽인 거야. 내가 5살이지만 엄마 품에 있었으니까 다 보았지. 할머니, 어머니, 샛엄마, 언니가 죽는 것을. 할머니는 부엌 입구에서 군인에게 총대로 맞아 피가 사방에 튀었어. 지금도 할머니가 총대가리로 매 맞던 장면 생각하면 가슴이 이상해. 그런데 그 장면까지 기억나고 내가 혼자 큰 나무 밑에 있었던 것만 생각나지 다른 것은  기억이 나지 않아. 어른들 아래 내가 깔려 있어서 살아났겠지 뭐. 알면 군인들이 살렸겠어? 아버지는 당시 38세, 어머니는 35세, 언니 8살, 나는 5살이었어. 아버지는 그날 집에서 죽은 것은 아니지만 호적에는 그날 모두 사망한 것으로 했어. 언제 죽었는지 모르니까. 그 많던 대식구들 다 죽고 같이 살던 2살짜리 순자(작은아버지딸 )하고 둘만 남았으니 무슨 꼴이냐고.  나중에 모든 시신 처리를 할아버지가 다 했대. 할머니 창자가 다 나온 것을 수습하느라 멍석에 돌돌 말아서 장례 치르고.

 순자는 호적 올리기 전에 부모가 죽어서 할아버지 딸로 되어 있어. 그날 불탄 집에 아이 둘이 있으니까 순자는 외가에서 와서 데려가고 나는 토벌 왔던 사람들이 주워다 조천 어느 집에 수양딸로 줬다고 해. 6살짜리가 식모를 산 거야. 요강 씻어오라고 하면 씻다 깨어서 매 맞고. 한몇 개월 살다가 작은 삼촌이 소문 듣고 나를 찾으러 왔어.


연필을 잡으면 매를 들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이름은 김태욱, 한학도 하고 한의학도 하신 분인데  동네에서는 정신병자로 소문났어.

 나를 할아버지에게 데려다 놓고 군대 간 작은 삼촌에게서 전사통지서가 왔어. 내 아버지인 큰아들과 둘째 아들(순자 아버지)은 4.3에 죽고 막내는 군대 가서 죽고, 할아버지는 아들 셋을 다 잃은 거야. 그러니 정신 줄을 놓은 거야. 금방 했던 말도 기억 못 해.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면서 손이 덜덜덜 떨고 누가 통성명하면 금방 “누구시우꽈(누구세요)?”물어. 그리고 또 깨끗이 잊어버려. 정신이 제대로 있었으면 하나 남은 아들 영장 나올 때 일본으로라도 빼돌렸을 텐데, 동네에서는 하나 남은 아들 도망시키라고 했는데 그냥 군대를 보내서 전사한 거야.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죽은 후에 고기 한 점, 멸치 하나를 안 먹었어, 밥과 된장국에 간장 하나만 놓고 먹었지.

“내가 평생 사람고기 그만큼 먹었으면 됐지”

 내가 꿩고기 먹고 싶다 하면 잡아서 주는데 할아버지가 직접 잡아 장만해 주는 않았어. 죽은 꿩은 오래 두면 똥 피어서 냄새나 못 먹어. 내장을 빨리 뽑아야지, 두어 시간 그냥 두면 안 돼.

집이 불타서 도련으로 가 있는 할아버지와 몇 달 있으니까 외가에 가 있던 순자가 왔어. 그때부터 우리 둘은 오늘까지 같이 산 거야. 도련에 살 때도 마을사람들이 우리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어. 우리 보고 “ 터진 굴 손지(손주) ”라 그랬어. 다른 곳에서도 할아버지께 와서 글 배우고, 할아버지는 뼈 다친 사람에게 침을 놨어. 우리 집 들어올 때 업혀 왔던 사람이 침 맞고는 걸어서 나갔어. 우리는 빨갱이 하고는 거리가 멀어.

   

1960대 친척 결혼식에서 할아버지 모습( 둘째 줄 가운데)

 

 할아버지는 내가 연필 잡은 것만 봐도 회초리 들었어. 무식해야 잘 산다고, 똑똑하면 다 죽는다고 공부를 못하게 하는 거야. 한이 맺혀서 그런지 담배가 한 창고는 있어야 해.  매해 신년이 되면 우리 사주를 봐주셨는데 우리 둘은 같이 있을 인연이라고 육지로 나가야 명을 이을 거라고 하는 거야. 난 할아버지에게 대들었어.

“그렇게 똑똑하고 잘 알면서 아들 며느리 다 죽는 날은 왜 몰라?”

그러면 밥 먹다가도 매 맞았어. 할아버지도 제주를 떠나서 명 보전 하라고 하고, 사촌오빠도 우릴 그렇게 쫓겨내려고 하는 거야.

“여기(할아버지 집, 도련)서 이렇게 있으면 안 돼. 서울 가면 일거리도 많고 화장도 배우고 옷도 세련되게 입고 집 밖으로 나가야 멋쟁이 되는 거야. 너희 또래들처럼”

  하나 남은 고모도 4.3에 남편 잃어 아이 셋 데리고 살려니 숯을 구워 팔았지. 제주시에 숯 팔러 하루 두 번을 갔어. 숯을 만들려면 한라산으로 들어가 남자들과 일을 해야 하는데 흠이 날까 봐 시누이 남편하고만 했다고 했어. 그렇게 살기 힘들었으니 우리까지 신경이 안 갔던 거야. 내가 12살에  식모 살러 서울 보내면 할아버지는 아프니까 어떨 수 없지만 고모라도 그 어린것을 보내느냐고, 좀 말려줘야 했을 건데, 우리 집은 밥을 굶는 집이 아니었거든. 그래도 내 옷은 고모가 자기 딸 것 만들며 꼭 같이 만들어 입혀줬어.

 아니 12살도 안된 나를 서울 남의집살이 보내면 나는 밥도 안 해 봤는데 어떡해? 그 시절엔 식모는 사람 취급을 안 했어. 셋할아버지 딸이 서울 식모살이를 해서 거기 찾아갔어. 이북출신 사장집이야. 가만히 보니 사촌언니가 물을 떠서 방으로 들어가는 거야. 뭐 하나 싶어 살짝 내다보니 그 집 아들, 그 새끼 발을 씻어주는 거야.

“ 고모 뭐 하는 거야?”

“ 이렇게 해야 돼.”

“ 그 오빠는 뭐 하고 고모가 그 일을 하는 거야?”

“......”

“ 나 안 할래.”

 집에 간다니까 나 꼬시려고 옷을 하나 사 입혔어. 그 옷을 벗어놓고 가라기에  벗고 나왔어. 이런 일을 누구에게 말하겠어? 자식에게도 못하는 말이 많아...  한 달도 못 살고 돌아오니 어떤 여순경이 기차간에서 배까지 나를 데려다주며 밥도 사주고 뱃사람에게 인계하며 부탁하더라고. 산지부두 도착하니 뱃사람이 다시는 집 떠나지 말라고 했어. 집에 도착하니 마침 제삿날이라 사람들이 모여 와 있었지만 나를 반기는 사람은 없었어. 오면 왔는가 보다 하지. 그렇게 할머니 곁으로 돌아왔어. 그래도 난 놀기를 좋아해서 사촌들이 제사 때 와서 흥얼거리는 노래를 배워서 방에서 불렀지. 

정말로 못 믿겠네

군산의 그 여학생

낮에는 책 보기로

밤에는 사바사바로

산지항에 도착하니

관덕정 마당 위에

남일버스 달린다


“ 할아버지 온다” 하면 동생 순자는 어리둥절하지. 신나게 부르는데 할아버지 회초리가 날아온 거야. 할아버지는 맨발로 다니지도 못하게 했어. 달밤에 친구들과 놀다가 할아버지 기척이 나면 우린 달아나고 눈이 어두운 할아버지는 우리인 줄 알고 비슷하게 생긴 애들이 대신 맞는 거야. 그러면 그 집에서 항의가 오고. 난 냄새를 잘 맡아. 벌써 할아버지 오는 기척을 담배 냄새로 아는 거야. “ 할아버지 온다” 하면 동생 순자는 어리둥절하지. 난 뱀 냄새로 잘 맡아 산에 가서도 끄떡없어. 뱀이 얼마나 노랑 내가 나는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냄새로 근처에 뱀이 있다는 걸 알지. 친구들은 “개 코 저기 있다” 하며 안심하고 산길을 가는 거지. 난 뱀 안 무서워.

 한 번은 집에 들어가니 동네 할머니들과 어떤 모자란 할머니를 앉혀놓고 상 차려 밥을 먹고 있는 거야. 새할머니가 나를 방 안으로 데려가더니 너의 할아버지는 아들을 낳아야 된다고 하는 거라. 아들, 할아버지 나이에 웬 아들? 난 그 할머니 숟가락 뺏어서 내쫓았어. 그러니 할아버지가 “ 우리 신자, 잘했다” 하는 거야. 할아버지는 양자 들이는 것도 싫어했어.

“내 팔자에 아들이 있다면 그렇게 다 죽겠냐, 내가 오래 살게 되면 아무도 모르는 굴에 들어갈 테니 나를 찾지도 말고 무덤도 할 필요 없다”


 그립고 고마운 새 할머니

 8살, 4살 여자아이에 정신병자 할아버지만 있는 집에 새할머니가 들어왔어. 우리를 길러준 그 할머니가 사실은 할아버지 본처야. 15살에 장가가서 아이가 없으니까 17살에 헤어졌다고 해. 그 할머니는 친정식구는 고모가 하나 있었는데 죽어갈 때 조카딸 보고 싶다고 전갈이 와서 신촌 갔다 오니 시할머니가 문 딱 잠그고 쫓겨냈다고 했어. 친정에 있다가 19살에 나이 많은 사람에게 개가를 해서 그 집 아이들 다 키우고 결혼시키고 53세에 할아버지에게 다시 온 거야. 새할머니는 와 보니 할아버지가 똑똑한 남자인 줄 알았는데 정신병자지, 나는 악바리지, 동생은 10살까지 오줌을 쌌으니 안 살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안 살려고 우리를 자꾸 밖으로(육지로) 보낸 거 같아.  그땐 방이 한 칸이었어. 새할머니가 오시니 할아버지 옆에는 내가 눕고 할머니 옆에 순자가 눕고 젖 만지며 잤어. 우린 서로 할머니 옆에 눕고 싶었지. 난 착하지 않았어. 할머니께 야단맞고 화가 나 돌멩이를 던졌는데 큰 장독이 깨졌어. 우리 집 장 맛이 참 좋았는데 줄줄 흐르며 장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 안에서 돼지고기 뒷다리가 나오는 거야. 할머니가 고기를 사 와서 금만 그어 놓고 장 속에 담아 둔 거야. 말하자면 장조림이지. 할머니는 부잣집 딸로 살아서 음식을 잘했어. 난 기 안 죽어. 왜 기죽어? 엄마 아버지 죽은 게 내 죄가 아니잖아. 할머니는 맨날 아파서 일을 못했어. 안 살려고 우리를 남의 집으로 보낸 거 같아. 

  할머니와는 그렇게 싸우며 지내다가 12살이 되어가니 나를 못 건들더라고. 내가 고자질쟁이거든. 할머니에게 꼬집힌 멍을 동네에 가서 보여주며 일러버리니까 때리지를 못했어. 그때부터는 우리를 육지로 보내려고 하더라고. 새할머니는 집안 정리해 주고 가려고 했던 것 같아. 애들끼리 싸우면 상대 아이 엄마가 “어미 아비 없는 것들이 사납기만 하다”라고 하지. 나는 누가 건들지 못했어. 순자가 어디서 맞고 오면 달려 가 머리끄덩이를 잡아 싸우면 그다음부터는 못 건들었어. 내 앞에서는 누구도 엄마 아버지 없다는 소리를 못했어. 그 소리가 제일 듣기 싫었어. 할머니는 내게 말했어.

 “네가 밉다가도 너 아비 생각해서 내가 참는다.”

 생전에 우리 아버지가 길에서 새할머니 만나면 말에서 내려 깍듯이 절하고  큰어머니 대우를 해 드렸대. 뭐 사드리기도 하고. 그런 말을 할머니가 가끔 했어. 난 살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해본 적도 없고 어머니 소리 해본 적도 없어. 어린 나를 두고 떠나다니, 나쁜 것들이야, 다.

 

 순자가 집 떠나고 나니 집안에 일 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지. 난 할아버지 지팡이 노릇도 해야 하고, 소 촐(꼴)도 베어 와야 하고, 늘 아픈 할머니 먹을 약초도 캐 와야 했어. 시로미 밭에 가서 나뭇가지에 천막 쳐 서 하루 자면서 시로미 해가지고 와서 할머니 드렸어. 새할머니는 늘 아파서 우리에게 약초나 산열매를 해오라고 시켰어. 몸에 좋다는 것은 다 해오라고 시켰어. 태역장오리에 가면 고대(조릿대) 밭 있고 그 위로 물장오리 지나면 시로미 밭이 나와. 허허벌판에 시르미가 가득 있어. 10월에 가는 거야. 항고에 자리(자리돔) 조려서 반찬으로 먹으며 나무에 이불 포 걸쳐 천막 만들어 하루 자고 다음날 오는 거야. 또 명도암 위 거친 오름에 가서 우슬(牛膝) 뿌리를 캐보면 밤낮 달여서 먹고, 할머니는 부자(附子)도 먹었어. 겉은 시커멓고 속은 빨간 부자를 뜨거울 때 안 아픈 사람이 먹으면 죽는다고 해. 그래서 사약으로 쓰는 부자를 일 년에 한 번은 먹었어. 아픈 사람은 차게 먹으면 되니까. 오죽하면 동네에서 “너의 할머니는 좋은 것 너무 먹어서 병 걸렸다”라고 했어. 꿩엿도 해 먹고. 꿩엿은 새콤해서 난 돼지머리엿을 더 맛있어했어. 꿩고기가 새콤하잖아.

  새할머니는 가죽과 가죽 사이에 부스럼이 나서 나사로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아물어야 될 상처가 더 벌어지는 거야. 그러다 새할머니가 딱 돌아가시니 내가 붙을 데가 없어진 거야. 지금 생각하면 피부암 같아. 병원 모셔 가면 의사가 “자시고 싶은 것 자시게 하고 편하게 해 드려라” 하는 걸 보면 고칠 수는 없는 병이었지. 뜨거운 찜질 하면 배의 살이 시뻘겋게 벌어지는 것이 꼭 말미잘 같았어.

 새할머니 돌아가던 날은 똥을 싸서 손으로 탁탁 던졌어. 그러면서 나보고 저 어린것을, 핏덩이 같은 것을 두고 왜 내가 죽느냐고, 저걸 두고 어떻게 가느냐고 소리소리 지르는 거야. 그런 와중에 작은할아버지 데려오라고 해서 모셔오니까 궤 속의 밭문서부터 챙기는 거야. 오촌당숙이 벌써 문서 찾아가지고 나가더라고.

그래도 난 새할머니가 좋았어. 그 할머니 생각하면 불쌍한데 딱 하나 공부만 시켜주었으면 싶지. 우리 집은 곡식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일 시키려고 그랬나 싶기도 하고. 새할머니 돌아가시고 나니 재산이 집 밖에 안 남았어. 할아버지가 나 이 집에서 절대 안 나갈 거니까 그리 알라고 해서 집만 못 팔아먹은 거야. 도련사람들은 그 집을 못 사. 나중에 고모가 모셔가면서 중간에 고모가 들어서서 팔게 한 거지. 집 팔고 여덟 마지기 밭을 가져갔어. 할아버지가 연금을 받고 있어서 모시기는 수월했겠지. 그러니 우린 발가벗겨 내쫓겨난 거야. 그렇게 되니 내가 순자 찾아서 서울 올라간 거지. 그래도 난 새할머니가 좋았어. 그 할머니 생각하면 불쌍한데 딱 하나 공부만 시켜주었으면 싶지. 우리 집은 곡식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일 시키려고 그랬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 할머니 밑에서 밥 먹을 때가 젤 좋았지.

  몇 년 전 4.3 추모제 때 내려가서 고모네 집에 잤어. 그때는 추울 때지. 고모는 자기 잘 방에는 전기장판해서 따뜻하게 하고 우리는 냉방에 자게 하는 거야. 그래서 다음부터는 여관에 잤어. 부모가 있어야 집이지. 우리 삶이란 것이 그랬어. 허허벌판에 갈까마귀처럼. 차라리 고아원 가는 게 나았지. 거기 가면 공부는 시켜줬을 거 아냐? 우리 동네에 10년 만에 돌아와 포주를 죽인 양공주가 있었어. 내가 나쁜 길로 안 빠진 것만도, 그 길로 안 빠진 것만도 다행이지.

 

평생 녹색 옷은 못 입었어

 내 아버지 호적이름은 김우석인데 부르는 이름은 김석홍이야. 아버지가 나를 말 태우고 다녔던 생각이 나. 내 위로 오빠가 있었는데 비실비실 했나 봐. 그래서 점쟁이가 신발을 두 군데 벗어 놔야 아들이 명 보전하겠다고 말했대. 첩을 얻으라는 얘기지. 어머니도 수긍해서 아들 낳는 조건으로 옆마을 궤드르 여자를 얻어 궤뜨르에서 오누이 낳고 따로 살 때였어. 그런데 오빠가 열다섯에 죽자 엄마는 계약 무효라고 했다나 봐. 어머니 마음이 괴로웠겠지. 엄마가 서른에 첩을 보았으니 기막히지 않았겠어? 아버지는 작은집과 궤드르에 살았어. 그 애들도 4.3에 다 죽었지.

 아버지는 굴에 여러 사람과 숨었는데 작은 아버지가 와서 오줌을 눕더래. 그래서 아버지는 뭐 먹을 거라도 가져온 줄 알고 굴 밖으로 나왔다가 잡힌 거야. 동네에서는 작은아버지가 밀고한 거라고 너의 아버지 죽인 사람은 작은할아버지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어. 난 제사 때면 따졌어

“ 작은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죽였잖아요”

 그러면 또 매 맞고. 작은할아버지는 죽을 때까지 “ 내가 안 그랬다”라고 했어. 그 후에 우리 집 재산 가져간 것 보면 재산 탐내서 그랬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하지만 누가 그 사정을 알겠어? 하느님이나 알겠지. 작은할아버지가 죽을 때가 되었을 때 나보고 “ 나 절대 안 그랬다”라고 하는 거야. 사람들 있는 데서 말을 해야지 나 혼자 있을 때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  

 난 지금도 생선 자르다 피가 나오면 일을 더 못하고 손 놓고 나와 버려. 그리고 그 생선 못 먹지. 평생 군인 색, 녹색 옷을 못 입었어. 그때 군인들이 생각이 나서.

 

 내 영혼을 지켜준 고마운 새할머니

 제주에서 할머니가 살아있을 때는 그래도 괜찮았어. 난 인조치마는 안 입어 봤어. 양단, 호박단 저고리에 비로드치마 두 개 해서 번갈아 입고 다녔지.  옷 사달라 해서 안 사주면 며칠이고 밥을 안 먹어 할머니가 사다 줬어.  밥 안 먹는다고 얼마나 매 맞았는데, 기분 상하면 삼 일도 안 먹어.  우리 집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부잣집 딸인 줄 알았대. 집안일은 안 했어. 난 힘들면 안 해. 소 풀이나 먹이고 4H 대학생들과 싸 돌아다녔어.  나 독했어. 사내아이(사내아이)가 내 가슴 부위라도 건들면 손목이라도 비틀어야 해, 그래서 사과받아야 되고. 그때 난 성가셔서 아예 코르덴바지 입었어.

 

 난 어려서 많이 아팠어. 부스럼이 많이 나고. 햇빛 나면 밖에 못 나갔어. 그러니 얼굴이 이렇게 뽀얗잖아. 생전 일 한 번 안 한 것 같이. 그래서 동네 사내아이들이 우리 지키려고 더 했지. 가설극장 구경을 가면 우리는 영화 보고 사내아이들은 보지도 못하고 밖에서 우릴 보호하는 거야. 난 일을 못해서 어디 일하러 가면 오히려 돈 물어줘야 해. 양녀로 맡겨진 조천 집에도 여러 해 걸쳐 돈 물었어. 나를 위해 굿도 했다 그러지, 요강 깬 값도 달라고 하지, 할아버지는 달라는 대로 다 주라고 했어. 내 자식 살렸다는 데 따지지 말라고. 서울 가서 1주일 만에 돌아오니까 그때 돈 3만 원인가 갚았어. 소개해 준 사람에게 주인이 나 먹였다고 한 계란 프라이 값까지 물었어. 가을이면 콩 팔아서 빚 갚고. 그래도 난 기죽지 않았어.

 우리가 좀 나은 삶을 살려면 새할머니가 좀 더 살았어야 했는데. 지금도 제주 가서 동네사람 만나면 우리 손잡고 울면서 “ 어이구, 그래도 너희들이 살았구나” 하지. 난 그렇게 생각해. 첫째 원수는 나이고 둘째는 부모라고. 그런데 어떤 돌팔이 점쟁이가 그러더라. 나는 항상 지키는 사람이 뒤에 있다네. 새할머니가 지킨대.  


4.3은 나라에서 금지한 이야기

 새할머니 돌아가시고 19세에 다시 서울 올라가서 처음엔 고아원 설거지부터 했지. 사실은 순자를 제주에 데려 오려고 인천에 있는 버스회사에 있다고 해서 찾아간 건데 순자는 일 나가 없고 기다리는데 버스사장 주인여자가 나를 방에 가두어 온 싹 벗겨갖고 돈도 다 빼앗고서 나가라는 거야. 다신 찾아오지 말라고. 그래서 남의 집 추녀 밑에서 쪼그려서 자고 있으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자기 집으로 날 데려갔어. 그 집도 가난한 집으로 누룽지 끓여 먹고 있더라고. 근처에 고아원 있는데 가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라고 소개해 줬어. 고아원 가서 설거지하고 아기 기저귀 갈고 하면 밥은 먹을 거라고. 동인천역 건너편 단독주택 같은 곳이었는데 나중에 가보니 그 집이 없어졌대? 고아원에서 3명이 교대로 4시간 자면서 기저귀 가는 일을 했어. 미국사람들이 와서 예쁜 것들은 데려가고 그러더라고. 가보니 검은 아이도 있었는데 그 아이가 죽었어. 그러더니 그 고아원이 문을 닫더라고, 그렇게 되자 고아원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아줌마가 친척집을 소개해 줬는데 경찰계장 집이었어.  

 어느 날 주인집 할머니 친구들이 툇마루에 모여 앉아서 6.25 때 피난 갔던 얘기를 하길래, 나도 덩달아 4.3 때 고아가 돼서 여기까지 온 얘기를 했어.  한 시간도 안 돼서 백차가 와서 경찰이 내리더니 나보고 타라는 거야. 성북경찰서로 데려갔어. 수사과장인가 하는 노란 띠 두른 사람이 나보고 4.3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는 거야. 언제 서울 왔느냐, 4.3 때는 어디 있었느냐 꼬치꼬치 묻기에 사실대로 말하고 본적을 댔어. 대흘리 수기동이라고.

“나라에서 4.3 얘기를 못하게 하기 때문에 다시는 어디 가서도 4.3 얘기를 하지 말아라”

우리나라에서 4.3은 쉬쉬 하는 얘기라고 하는 거야. 내가 스무 살 때 일이야. 그때 그 집에서 죽으려고 연탄가스를 먹었어. 밥을 제대로 해봤어야지. 고아원에서는 밥 하는 이가 따로 있었으니까. 난 지금도 나쁜 길로 안 빠져서 요렇게 산 게 천만다행이라 생각하지.

 

5살 여자아이 보고 결정한 재혼

 나는 어디 가서 물어도 서른을 넘어 시집가야 된다고 했어. 남편은 이북사람이야. 14살에 이북에서 넘어왔대. 아이 셋 있는 남자, 막내가 5살인데 내가 부모를 잃은 나이였어. 난 세상에서 엄마 없는 애가 제일 불쌍해. 새엄마라도 해서 사는 아이가 그렇게 부럽더라고. 재혼할 때가 스물아홉인데 다섯 살 딸을 보는 순간 결정해 버렸어. 머리는 긴데 서캐가 가득한 아이를 목욕탕에 가서 담아놓고 씻기고 시장에 가서 옷 사서 입혀 집에 데려왔지. 완전 거지더라고. 그 딸이 이제 56세야, 말 안들을 때는 내 그때 생각하며 키웠어. 내가 남편과 재혼 안 했으면 그 집안은 풍비박산 나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갔겠지. 전 부인이 아파서 죽었는데 병원비가 밀려 있었어. 아이 낳고 1년 반 동안 그 병원비 갚고 다 했어. 내가 전 부인 산소도 터가 안 좋다 해서 이장해 줬거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앉은뱅이가 되어 서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어디 가서 물으니까 큰부인 영혼이 붙어서 그렇다는 거라. 그이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인데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워낙 외로운 처지라 붙을 데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산소를 옮겨주려고 파보니 세상에, 물이 정강이까지 차 있었어.

 남편은 처음에 피엑스(PX) 들어갔다가 이젠 클럽 쪽으로 들어갔어. 미군부대 지배인으로 근무해서 딱딱 봉급 나오고 보너스도 나왔어. 그러니 내가 돈 버는 일을 안 하고 살림만 하며 살았지. 신랑밖에 없으니까  내가 낳은 아들이 이제 47세, 난 전 부인 낳은 세 아이 대학 못 보내니 우리 아들도 안 보냈어. 내가 공부 안 해서 천만다행이지 공부했으면 책을 몇 권 썼을 거야.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괜찮았을 거야. 내가 초등학교를 못 나왔으니 어디 가겠냐고? 식모살이나 하지. 살면서 “나도 공부했으면 ~” 그러면 남편은 “ 아이고 학교 다녔으면 내 차지가 됩니까” 했어. 남편은 대학 나왔어.  

남편이 간직했던 23세 때의 김신자 씨 사진


 남편 죽으니까 지갑에서 내 사진이 나왔어. 40년 동안 넣고 다니다가 정년퇴직하니까 딱 내놓더라니까. 23세 때 것과 결혼 직전에 찍은 사진이었어. 결혼하고 남편이 나 도망갈까 봐 엄청 감시했어. 서른 살에 아이 셋에 병든 아내 있는 것을 누가 거들떠나 보겠어?  나 40년 동안 살면서 남편에게 욕 한 번도 안 들어 봤어. 남편은 내게 잘했어. 신랑은 얼마나 선비인지 죽을 때까지 전철도 공짜로 안 탄다고 했지. 미군부대 2사단에서 부지배인으로 35년 있었어.  남편 죽고 힘들었는데 그래도 순자가 와서 사촌끼리 의지하니까 너무 좋아. 신랑이 죽고 아이들도 의정부로 나가 사니까 외롭잖아. 근데 동생이 내 집 근처로 이사 왔으니까 남편 대신 은행일도 다 봐주고.


저승 가면 부모에게 따질 거야

 바농뱅디에 어머니 무덤 있는데 난 8살 때부터 어머니 산소 벌초 다녔어. 벌초 끝내면 저물도록 발 뻗고 울었어. 왜 나를 같이 데려가지 않았느냐고, 언니보다 어린 나를 데려가야지 하면서. 난 항상 가족들에게 내가 죽어서 부모 만나기만 하면 가만 안 둔다고 그래. 귀싸대기를 때릴 거야. 왜 나를 두고 갔느냐고 따질 거야. 왜 날 두고 갔느냐. 어린 나를 데리고 가야지 왜 언니만 데리고 갔느냐고. 생각해 봐. 애기를 내버려 두고 가면 어떻게 해. 어린 나를 데려가야 옳지. 요새도 길 가다가 언제나 죽을 건가 생각하다가 또 하늘 보고 삿대질하지. 나 병들어 똥칠하다 죽게만 해 봐라, 두 연놈들(부모님) 좋은 데 있으면서 그 정도도 날 보살펴주지 않으면 내가 그냥 안 둔다 그래. 지금도 “개 같은 연놈들 나를 데리고 가지” 하면 우리 애들이 웃어. 엄마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저러겠냐고 그래. 나 낼모레 팔십인데 걸어 다니다가 그냥 죽기만 바래. 이렇게 길을 걷다가도 “너 개 같은 년, 나 이렇게 걷다가 죽게 해야지 아프게만 하면 그냥 안 둔다”라고 하지.

 우리가 동네에서 들었던 말은 잊히지가 않지.

“ 빨갱이 자식들”

 “부모 잡아먹은 자식들”

 “정신병 손자들”

  난 몇 년 전 어머니 이장하는데 가고 싶어도 못 갔어. 할아버지 아버지 이장하는데 가느라고. 아버지 묘를 파니까 인부들이 “ 아이고 괜히 팠다, 여긴 묘가 좋은데” 했다길래 속으로 “개새끼, 지만 좋은 데 가면 뭐 해” 했지


 아직도 4.3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내가 여기 사람들에게 4.3 때 일을 말하면 깜짝 놀라. 어떻게 군인이 사람을 죽이냐는 거지. 사상불순으로 돌아갔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아직 아는 사람 많지 않아. 손자가 고등학교 때 4.3에 대해 아는 사람 손들라고 하니까 혼자 손 들었대. 그때 선생님이 어떻게 아느냐고 묻고는 “ 얘, 너 할머니께 잘해라” 하더래.

 난 지금도 음력 10월 되면 몸이 아파. 제주에 추모제라도 가려면 청심환 3개 먹고 가. 4.3 얘기를 누가 하면 이상해, 막 가슴이 떨리고. 나라가 힘이 없어서 된 일을. 이승만이 우리나라 물정을 뭐 알아? 미국 가서 살다가 와서 우리나라에 살아봤어, 뭐 했어. 지금 제주도는 너무 파헤쳐져서 가보면 옛날 제주도 맛이 없어. 외국사람들 땅이지. 우리 어릴 때는 보리수 따서 털면 밑에 천막 펼쳐놓고 쓸어 담고 그 넓은 들판을 헤매면서 고사리 캤는데 이젠 다 땅주인이 있다며 못하게 한다고 하대? 이젠 시로미도 마음대로 못 따 먹는다고 하대?

 그때 제주사람들은 너무 똑똑한 거야. 할아버지는 내가 연필만 들어도 매를 때렸으니까. 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왕 마누라 된다, 똑똑하면 다 죽는다고 무식해야 산다고 했어. 지금 그때 사람들 살았으면 제주도 지금처럼 저렇게 안 돼.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윈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 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하였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머리를 쥐어짜며 힘겹게 얘기를 이어갔던 신자삼촌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정채봉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부모를 '개자식들'이라고 부르던 삼촌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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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에서는 친근한 윗사람을 남 녀를 불문하고 '삼촌'이라 부른다.


** 와흘리 물 터진 골(수기동)의 역사

1948년 10월 18일 계엄령과 함께 시작된 “ 초토화 작전” 전후로 지금까지 조사된 제주의 잃어버린 마을 숫자는 140여 개로 추산한다. 대부분 중산간 지역으로 몇 대, 몇십 대에 걸쳐 이루어진 마을은 구석기시대로 돌아갔고, 원주민들은 터전을 복구할 인력이 없어서 또는 장소의 악몽이 살아나서 등의 이유로 고향을 영원히 잃었다. 당시 와흘 2 구였던 물 터진 골(수기동)은 경주 김 씨의 집성촌으로 40여 호에 200여 주민이 목축과 농업을 겸하며 살던 마을이었다. 물 터진 골, 수기동은 당시 와흘 2 구였고 민간 학살이 있던 양력 11.13일은 11월 17일에 내려진 계엄령 선포 사흘 전의 일이었고 지휘자는 송요찬 연대장이었다.

1948년 12. 18. 로버트 고문단장이 한국 국방장관에게 보낸 기밀문서에는

“ 송요찬 연대장은 대단한 지휘력을 발휘했다. 이런 사실이 신문과 방송, 대통령 성명에 의하여 일반에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할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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