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귀한 건 사람 (1937년 생, 김연심 씨)
김연심 씨가 살아온 세월 속에 4.3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어제 일은 잊어도 그날 일은 시간대까지 또렷이 기억한다. 생사의 문턱을 왔다 갔다 한 시간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김연심 씨는 이웃에 살던 '갑산집 며느리(박재옥, 당시 21세)'가 3.1절 기념식 구경 갔다가 총에 맞아 죽은 후 마을이 술렁이던 그때부터 제주 4.3이 시작되었다고 증언한다.
동네가 왈칵 뒤집힌 갑산집 며느리 죽음
어디서 연락을 받아 한 일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동네가 왈칵 3.1절 기념식에 갔어. 짚신을 끈으로 묶으면서 도두리에서 북국민학교까지 걸어서 가는 거라. 또래 아이들은 “우리는 싸웠다, 3.1 운동에” 어쩌고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다니고.
그날 갑산집 며느리가 궐기대회 갔다가 죽었어. 마을에서 인민장*을 크게 했어. 노래 잘하는 여자가 선소리하면서 상여 나가는 광경을 구경했던 생각이 나. 동네사람들이 애석해하던 표정들이 선해. 그 후 민밋(줄줄이) 죽는 일이 있었지마는 그게 첫 일이니까 기억이 선명하지. 그때 며느리 품에 돌이 안 넘은 아기가 있었어. 그 아기도 얼마 없어서 죽었어. 그땐 우유가 없으니 어멍젖이 없으면 아기 키우기가 그렇게 어려웠어. 내 생각에는 꼭 그때부터 불상사가 난 것 같아.
그 이유는 모르지만 산 쪽으로 붙은 사람들은 지금 생각하면 야당 같은 거겠지? 오라버니가 징병 갔다 온 후에 수군수군 어디서 연락이 왔는지는 몰라도 오빠는 군에서 사상을 가져온 거 닮더라고. 해방되고 도두리 청년들이 두 쪽으로 갈라졌어. 오빠와 친해서 서로들 불러간다 불러온다, 집에 와서 잤다가 가고 허물없이 친하게 지낸 사이였는데. 동카름(도두리 동쪽마을)은 청년 전체가 사상(사회주의) 쪽으로 붙었어. 서카름은 경찰 쪽이었고. 마음이 뒤바꿔 갈라지니 서로 보복이 일어난 거야. 이 물 막은 섬 제주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을꼬. 내가 열다섯만 되었으면 그 의미를 좀 알겠지마는.
대문에 붙은 빨간딱지
우리 집은 대문에 빨간딱지가 붙었어. 사상가의 집이라는 뜻으로. 어머니가 잡혀간 것은 아무래도 오빠행방 때문일 거야. 며칠 취조받고 경찰서에서 석방돼서 나왔을 때 어머니는 당신도 못 믿는 말을 하더라고.
“ 내가 이렇게 나와도 모른다. 이제 저 사위 중에서도 몰리면 몰릴 것이고, 아들 쪽으로도 몰리면 몰릴 것이니”
이런 말을 들으니 내 간이 어중간 했지마는(간담이 서늘했지만) 선뜻 죽일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그때 어머니는 고문받고 누워있을 때였어. 경찰서에서 처음에는 중산간에 있는 시댁이 소개당해서 와 있는 큰언니를 불러서 조사할 게 있다고 데려가는데 어머니는 돌아누운 채로 “아기 기저귀 잘 끄령(챙겨서) 가라”고만 하더라고. 조금 있다가 다시 와서 “어른들은 다 오라고 햄수다” 부르니까 누워있던 어머니도 안 갈 수가 없었어. 나막신을 신고 달곡 달곡 가는 뒷모습 보다가 난 댓돌 위 검은 고무신 안고 막 뛰어가서 “어머니, 이 신 신엉 갑서(신고 가세요)” 하니 “아이고, 몽둥이나 가져올 거 아니가” 하는 거라. 탁 신경 쓰니까 몸이 말아져 걷기가 힘들었던 거야.
가면서 어머니는 담 위로 큰 외숙모 부르며 “성님 성님, 우리 아이들 살펴 줍서” 하더라고. 그때 어머니는 큰사위가 없어졌으니 업(트집) 잡고 죽게 되는 건가 의심이 온 거 같아.
그날 밤 빈집이 무서워 큰외삼춘네 집에서 잤는데 다음날 아침 부리나케 석방증 갖고 가보니 좁은 방이 빽빽하게 사람들이 있었고, 모두 나를 바라보는데 어머니는 고개 푹 숙여 앉아서 날 쳐다보지도 않아. 애기 업고 나간 큰언니는 하룻밤 동안에 눈가가 움푹 들어간 것이 밤새 심한 취조를 받은 모양이었고. 그 순간에도 어머니는 큰언니 죽을 것을 생각하며 더 낙심하는 것 같았어. 그때 누가 밥을 해온 것이 보여. 이제 생각하면 누군가 밥을 가져갔으으면 같이 한 숟가락 씩 먹었을 것 아냐? 난 ‘아이고 나만 밥을 안 가져왔구나’ 싶어서 한숨에 돌아와 밥을 하려니까 항아리에 물이 없는 거야. 대바지(작은 허벅)에 물을 길어 바쁘게 올레 안으로 들어오는데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어.
“ 돔방굴 트멍(돔박웃홈 골짜기)**에 데려가 다 죽었젠 햄져(죽였다고 한다)”
“ 아니, 총소리도 안 났는데?”
“ 아이고, 이칙에(아까) 총소리 났죠”
허벅에 물 진 채로 엉엉 울면서 집에 가보니 빈 집에 어린 조카(큰언니 아들)만 닭 졸 듯 졸고 있는 거야.
“아이고 수길아, 할머니도 어머니도 다 죽었잰 햄져(죽었다고 한다). 우린 이제 어떵허면 조으코(어쩌면 좋을까)”
이렇게 말해도 펀드룽***저렇게 말해도 펀드룽 4살 조카는 반응이 없었어.
그날 밤은(1948. 음 12.4) 비가 억수로 오니 피도 씻겨 내려갔어. 뒷날은 “시체를 치워내라”라고 관의 명령이 떨어진 거라. 그 장소를 치워야 또 데려다 죽일 거니까. 외삼촌아들이 그 와중에 죽어서 친척들이 그 오빠를 갈무리해서 흙이라도 덮고 오려고 한 것이 이제 나하고 같이 갈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고.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그곳을 알 수가 있어야지. 가마니 거적데기 짊어지고 동산으로 가면서도 어느 쪽으로 갈지 몰라 막막한 거야. 다행히 동네 어른을 만나 따라가게 되었어. 가보니 시체가 이리 쓰러지고 저리 쓰러지고, 모두 인친 척이 몰려와 묶으며 처리를 하는데 나 하나만 그냥 동동거리는 거라. 울면서 돌아다니다 시체를 찾았어. 어머니는 석방증 손에 쥔 채 어디 총 맞은 곳도 없고 보기 싫게 안 죽었는데, 큰언니 생각은 하면 정말로, 철창으로 몸을 이리저리 찢어 버렸더라고. 업은 아기도 같이 죽고. 동네에서 여자들까지 나와 시체 마주 잡고, 남의 밭에 민밋(줄줄이) 공동묘지 하듯 묻었어.
도새기와 말하면 덜 무서워
어머니 묻고 나서 조카랑 집에 왔어. 빈집이 무서워도 외삼촌네집 가고프다는 말을 노시(끝내) 못 하는 거라. 만일 내가 울며불며했으면 외삼촌도 난처했을 건데 우리 때문에 피해 볼 수 있다는 생각 하면 가겠다는 말을 못 한 거야. 우리 집은 빨간딱지가 붙었으니까. 외숙모는 딱하니까 “그러면 솥에 물 넣고 검질(마른풀)로 헛불을 놓아서 사람 사는 것 같이 해 두고 밥은 우리 집에 와서 먹어라”라고 하셨어. 그 집에서 사흘 자고 집에 가겠다고 했더니 큰 외숙모가 잡지를 않는 거야. 속으로야 더 있고 싶었지. 그 후로는 일절 큰 외숙모집은 얼씬거리지 않고 집에서 버텼어. 대신 말방아 찧을 때 물 없는 집에 물이나 길어가고 하면서 밥 얻어먹는 동양바치(거지) 할머니를 모셔왔어. 그 할머니 옷에 막 이가 괴어서 그 옷 다 벗으시라고 하고는 어머니 일복이라도 갈아입게 하고. 그 할머니가 발 자리에라도 누운 것이 한결 낫더라고.
오늘 밝아질까 하면 새벽이 오고 오늘은 밝아질까 하면 그날 넘어가고 하면서 4살 조카와 스무날을 어른들이 다 죽은 집에서 산 거야. 너무도 외롭고 무서울 때는 통시(변소)에 가서 돼지에게 말 걸면서. 그러다 안거리(안채)를 빌려줄 수 있었어. 해안마을에서 피난 온 아이들이 오망오망한(여럿 있는) 일곱 식구가 우리 집 곡식이며 우영팟(텃밭)의 채소며 다 갖다 먹어도 집 빌려준 것만 좋아했지. 저걸 놔두면 무엇을 하리, 죽으면 다 버릴 거. 아까운 생각이 조금도 없었어.
폭도가 오면, 그땐 산사람을 폭도 폭도 했으니까, 나랑 조카가 이불 뒤집어쓰고 독독(돌돌) 떨다가 든 생각이, 폭도가 우리 누워있는 방문을 콱 열면 그게 더 무서울 것만 같은 거야. 차라리 미리 마중을 나가버리는 것이 견디기가 쉬울 것 같았어. 폭도 온다는 말이 들리면 이젠 조카 옷 입히고 미리 나가 기다렸어. 그들도 분별없는 사람들이지. 맨 얼굴에 왔더라고. 우리가 경찰주목을 받으면 산에서라도 우릴 보호해줘야 할 것 아니?
그 사람들이 산으로 돌아갈 때 집에 불 붙여두고 가버리면 처음에는 방 빌어 사는 사람하고 오줌 항아리 두 개에 가득한 오줌으로 끌 수 있었어. 두 번째 불은 집전체로 붙어 해볼 나 힘으론 도리가 없었어. 우영팟이 한 삼백 평 되니 그곳에 수길이 안아다 놔두고 불타는 집안에 들어갔는데 뭐 내올 것이 없어. 다 죽을 건데. 이건 꺼내서 무엇 하리. 그런 생각만 났어. 멍청하게 서 있다가 안방에 있는 사오기 궤 두 짝을 꺼냈어.
죽은 영혼에 숟가락 걸쳐놓고
집이 불타니 이젠 갈 데 올 데가 없는 거라. 하루 살기가 한 달, 1년만 하더라고. 다시 그런 시국이 오면 미리 약 먹고 죽는 게 낫지.
그때 집이 불탄 사람은 아무 데라도 들어가서 살라는 명이 있었어. “어딜 살 디?(어디서 살고 싶니?)” 외삼촌이 질문할 때, 마음은 친절한 큰외삼촌 집에 살고 싶어도 미안해서 그 말을 못 하는 거라. 그래서 성담 지키다 죽은 아들이 있는 샛외삼촌네 집에 조카 데리고 가재도구 몇 가지 들고 갔지. 외삼촌네가 밥을 먹으라고 할 때 내가 “ 밥을 올려야 할 텐데” 중얼거렸어.
“ 아이고 설운 애기야( 철없는 것아), 밥 안 올려도 어떤 안 헌다게(괜찮다), 귀신이 어디 시니?(있느냐)”
“ 경해도(그래도) 죽으면 어머니가 영혼 앞에 밥 올리는 걸 봐 나신데(봤었는데)”
“ 경허문 느네 밥을 따로 주커매 해요 난 대로 허라(정 그렇다면 너희 밥을 따로 줄 테니 했던 대로 하라), 밥 먹기 전에 어멍 숟가락 하나 걸치고 성(언니) 숟가락 하나 걸치고 해 두고 삼촌조카가 밥 먹으면 된다”
그 말 듣고 1살 조카까지 숟가락 3개 밥그릇 위에 걸쳐 놓아두고 밥을 먹은 거라. 동카름 삼촌네 집에 가도 밥 먹으라고 하면 똑 그같이 하고. 내가 분시(분별)가 없어서 삼촌들을 괴롭혀진 거지.
그때 화북지서에 있는 형부가 하늘 구신처럼 나타났어. 도로 통제가 돼서 다른 곳을 갈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우리를 제주시에 있는 큰아버지집에 데려다줬어. 그때서야 애타게 소식 기다리던 수길이 할머니가 당신 손자를 데려갈 수 있었어. 그 집 산천이 좋아 조카는 그 시국에 살아난 거지.
책만 펼치면 생기는 어지럼증
조카 보내고 나서야 누우면 눈물도 흐르기 시작하고 콧물도 나오고 하는 거라. 소리 들릴까 봐 이불 쓰고 계속 우는 거라. 이제 생각하면 우울증이지. 잠이 안 와서 오빠 보던 책이라도 펼치면 머리가 혀뜩(휘청거림) 하는 거라. 그 책을 탁 덮으면 괜찮고, 책만 보려면 머리가 빙빙 도는 거라. 그 후로 책을 일체 보지 안 했어. 그러니 평생 기억으로만 살았어.
대구형무소로 간 오빠도 소식이 끊어지고
오빠는 48년 봄인가, 처음 잡혀갔어. 큰아버지께 급히 연락하니까 경찰에 아는 사람을 찾아 밭을 출세(전세) 줘서 그 돈으로 오빠를 빼냈어. 그 후로는 큰아버지가 도두리에도 안 보내고 딱 임자 집의 방에서만 살렸는데 73일째 되는 날, 밀고가 들어와서 또 잡혀 간 거라. 그때는 큰아버지도 같이 들어갔지. 그날은 하필 큰아버지가 51세에 귀한 첫아들 낳아 돌잔치하는 날이었어. 큰어머니는 그 젊은 나이에 남편이 잡혀가니 애가 바짝 타서 눈이 푹 들어가고 젖이 말라버렸어. 큰아버지는 나중에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풀려났어.
오빠는 대구형무소에서 큰집으로 어머니 안부를 걱정하는 편지가 몇 번 왔어. 큰아버지가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너 오면 장례 하려고 남의 밭에 토롱(임시 매장)해 두었노라”라고 했을 때 “나를 기다리지 말고 큰아버지가 맡아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 하는 답장이 왔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
부산 영도로 떠나다
내가 육지로 나가겠다고 하니 큰아버지가 노해서 말도 안 해. 큰아버지는 “몇 목숨 죽어서 너 하나 있는데 나 얼굴 못 들게 하려는 거냐, 갈 거면 호적 떼고 가라”라고 호통치고. 큰어머니는 큰아버지 앞에서는 의견을 같이하다가 부엌에 오면 의견이 달라져서 “가면 살아진다, 살아진다” 하니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가 우겨서 가게 되니까 큰아버지는 내가 맡긴 돈에 주판을 놔서 이자까지 싹 계산해서 나에게 주라고 한 거야. 난 이자를 받으려 한 것도 아닌데. 이 바보가 너무도 큰아버지께 미안하니까 그 돈을, 나 돈만 세어서 갖고 이자는 다시 큰어머니 드렸어. “이건 큰아버지 드려 줍서(드려주세요) 이건 안 받으쿠다” 병신같이 말했는데 철이 들어가니까 이젠 그 돈도 큰아버지 안 드렸다는 걸 느껴지더라고. 그땐 이자가 막 비쌀 때였어. 큰아버지 집에서 12살에 가서 17살에 나왔으니 4-5년 산 거 닮아.
부산은 맨 하꼬방(판자집) 천지였어. 비 안 샐 정도로 도배나 겨우 하고 임시 지은 판잣집들. 방 빌리러 다녀보니 남항동은 두 집 걸러 한 집이 제주사람인 거라. 4.3 때 목숨이 위험해가니까 고향을 피해 온 사람들로 김녕, 함덕, 동복, 북촌 같이 동쪽 사람들이 주로 많이 와서 살고 있더라고. 고내, 하가, 애월.... 서쪽사람들은 범일동 방직공장에 주로 다니고 있었고. 그때 여섯 아이를 낳아 사는 집에서 방을 빌려주겠다는 거라. 아이들 둘이 잠만 자는 방이 있으니 와서 살라고 하는데, 대충 보니 방이 넓어.
“셋이 여기서 살고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너희도 물 떠 와야 먹을 거 아니가, 내 물동이 빌려줄 테니 물 두동이만 길어다 주면 방세 안 받으련다”
물이 그렇게 어려울 때야, 먹는 물이. 제주에서야 모두 물허벅에 지고 다녔는데 부산은 전부 머리에 이는 물동이더라고. 부산사람들은 이마로 물 한 방울 흐르면 휙 하게 뿌리면서 꽁골꽁골 잘도 걷는데, 우리가 물동이이고 걸으면 타울락탁 타울락탁 나도 잘 못 걷는데 내 친구들은 더 못 걸어. 물동이이고 우끗허게(벌떡) 일어나는 게 제주사람들은 잘 안 돼. 물 한 동이를 이고 나면 옷이 홀딱 한 벌 젖어버려. 그렇게 새벽에 그 물 두 동이 길어다 두고, 한 동이는 우리가 쓰고. 물동이 빌 맛으로, 물동이 하나도 어려워서.
하꼬방에 앉으면 한참 동안 앞사람 얼굴이 안 보여. 하이고, 난 지금도 그 하꼬방집 꿈을, 집 귀한 꿈을 꿀 때가 있어. 화장실은 더 기가 차요. 드럼깡(드럼통) 반 잘라서 그 위로 나무 걸쳐 놓으면 드럼깡 반 차는 것은 금방 올라오지. 똥 한 번 누는 것도 어려워요. 똥 누고 나면 주인이 문 톡 잠가버리고.
첫 직장은 남항동 통조림공장
사람 쓴다는 소문 듣고 맨 처음 찾아간 곳이 남항동 간스메(통조림) 공장이야. 고향친구 세 명이 판잣집 한 칸에서 별을 보며 공장 가고 별을 보고 퇴근하는 생활이 시작된 거지. 그때 내 나이 17살, 우리 나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깡통 닦는 일이었어. 그 통조림은 어디 군대에도 보내고 하는데 그게 막 비싼 거라 하더라고. 어딘들 별 수 있나. 그곳에서 스무날 일하고 도장 새겨 첫 월급을 탔어. 그때 새긴 나무도장을 70년이 지난 지금도 쓰고 있지.
국제시장 양장점 시다
어느 날 주인집여자가 나를 보자고 하는 거라.
“ 너의 서이(셋) 중에 네가 젤 맘에 든다, 우리 아이 아버지는 저기 국제시장 안 있나, 국제시장 잘도 크데이, 거기서 수도양재점을 다닌다, 마침 시다(보조)한 사람 필요한데 거길 댕겨보지 않을래? ”
그 말 듣고 이젠 꽃무늬 면치마에 수놓은 옥양목적삼 한 벌 사 입고 주인집여자를 졸졸 따라갔어. 영도다리 올라가기 전에 지나가려고 달음박질하듯 갔지. 따라가 보니 골목 안으로 들어간 조그만 양재점이야. 얼마 후 일이 없어져가니까 옷 주문을 많이 받는 데로 옮겼어. 돈 있는 사람들이 주문복을 맡기면 미싱사 데리고 재단사 한 명에 시다 한 명 붙여서 옷을 만드는 데, 돈 버는 건 시다가 호랑이지. 시다 손이 고와야 그 일이 고우니까, 단추도 다 헝겊으로 싸면서 할 때였어. 다 이북사람이었어. 착착착 가위질을 해서 재단하는 것을 보면 아, 이건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허는 거로구나 했지. 이북사람들은 성격은 칼칼해도 말도 딱딱 결단성 있게 잘 허고, 그들이 일본말을 써도 내가 말을 알아듣는 데는 손색이 없었어. 어릴 때 일본 살다 온 어머니에게 좀 배웠으니까. 돈은 어디서 나서 하는지 큰 요리점, 큰 라사점은 다 이북사람이 잡더라고. 그들은 6,25 때 내려온 사람들인데, 힘이 있는 사람이 내려온다고들 했어. 전쟁이 끝나니까 다 서울 올라가요. 그렇게 올라가니 서울이 번창해진 것 아닐까, 다들 자리 잡았을 거야.
양재점 주문복 시다 월급이 그때 시청공무원 월급 4배야. 그래도 일하다 막 속탈 때가 있어. 고급 옷감이니까 다림질을 하다가도 약간만 손을 놓으면 몇 달 월급이 날아가 버려. 다리미불은 숯불인데, 다리미불 붙이는 아이가 따로 있어. 난 변상해 본 일이 없었지만. 다림질하는 아이가 잘못돼 속 타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서 ‘나 앞으로 이거 배워서 해야지’ 하는 마음은 없더라고.
국제시장에서 점심시간 되면 양재점 맞은편에서 장이 열리고 별 장사가 다 있어. 거기서도 이북사람들이 그렇게 떡을 맛 좋게 잘해. 그런 음식도 자주 사 먹지는 못했지. 돈 아끼려니까.
아주머니 나이에는 밤색갈이 남보왕(넘버원)
백금반지 팔아서도 옷 해 입으세요
여기는 국제시장 정말 좋아요
이런 노래나 ‘대전발 영시 오십 분~’ 허는 노래, ‘영도다리 난간 위엔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 허는 노래들이 막 유행할 때야. 나는 ‘미아리 눈물고개~~’하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올케생각이 나서 울었어. 내게도 소중한 오빠였지만 올케가 어린 조카 데리고 혼자 사는 생각하면서. ‘홍도야 우지 마라 ‘를 부를 때는 내 신세를 생각하며 울게 되고. 고향에서야 장항아리에 가서 장 뜨면 이거 장인가 하고 장이 줄어드는지 가늠을 못하고 살았는데. 딱 대문 밖을 나서니 저승길이고 객지다 하듯이 그때서야 장 귀한 것도 알았지.
첫 월급 타서 맨 먼저 질 좋은 만나표 흰 고무신을 큰아버지 큰어머니 것 사서 보내며 사과하는 편지를 썼어. 큰아버지 뜻 알겠노라고.
결혼, 부산생활 접고 다시 제주로
5년 동안 외지생활을 하다 제주항 부두에 도착하니 남편이 마중을 나왔는데, 언뜻 행색을 보니 기가 막혔어. 벤줄(병귤) 한 가지 꺾어 들고 누런 와이셔츠에 넥타이도 안 맨 차림을 보는 순간 그 배로 돌아가고 싶었지. 주선해 준 친척 면목 때문에 인사나 하고 그냥 부산으로 올라가려 했는데 남편친구들이 나를 잡아 사진 찍자고 우르르 사진관으로 몰려가서는 남편과 나만 두고 싹 사라져 버린 거야. 얼덜결에 한 번 박은 것이 약혼사진이 돼버렸어. 난 그 사진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이제야 아, 나도 시어머니 많이 속상하게 했구나 하는 것도 느껴지지. 부모로서 얼마나 속상했을까. 이 잔치가 될 건가 말건가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나도 애기들을 결혼시키면서 보니까 더 느껴지는 거야.
혼수로 경도양단으로 이불 두 채 하고 교자상에 찬장, 이불장도 하고, 큰 접시, 작은 접시 귀 갖춰서 한 세트씩 하고, 솥단지 3개, 함석 대야, 큰 양푼이, 주전자, 발미싱... 신랑이 마음에 안 들어 딱 기본 혼수만 했는데도 그때로서는 오라리 들어오는 새색시 중에는 내가 제일이라고 했어. 제주와 부산차이가 그때는 그렇게 크더라고.
1959년의 기억들
그 해는 사라호 태풍으로 곡식은 흉년인데 시집식구는 일본서 시아버지가 오면서 4명이 늘었어. '흉년에는 밭 하나 팔려고 하지 말고 입 하나 덜어라'는 말을 실감했지. 여름철 임신한 몸으로 볕이 과랑과랑 하는(내리쬐는) 더위에 메밀밭에 뿌릴 불치(짚을 태우면 나오는 재) 거름을 져 나르려니 죽을 지경이었지. 오죽하면 게(게)도 음력 칠월이 되면 메밀거름 지지 않으려고 등 곯아버리고, 메뚜기도 다리 빠진다고 했을까. 그래도 불치 지고 밭으로 갈 적엔 풍년이 눈앞에 삼삼했는데 생물은 손에 쥐어봐야 안다고 추석 전날 사라호 태풍으로 다 쓸어버린 거야. 게다가 1년 사이 다섯 식구에서 아홉 식구로 불어나니 보리쌀 한 말을 풀면 금방 없어졌어.
동짓달 밤에 먹는 써넝헌(차가운) 콩죽
새벽에 아기 배 맞춰 누웠는데 술시(저녁 8시경)가 되어가서야 아기가 나온 거라. 밤은 긴데 배고파 잠을 잘 수가 없어. 동짓달 밤이 그렇게 긴 줄 처음 알았지. 젖은 나오지 않고 아기는 콩 볶듯 울어대고 저녁으로 먹다 남은 콩죽 생각이 간절하여도 그 말을 못 하는 것이 시집이라. 열두 살에 죽은 어멍생각이 와싹 와싹 났어. 그때까지 나는 젖은 물리면 그냥 나오는 줄 알았지. 차가운 젖꼭지 물려 누워 있다가 죽을힘을 내어 남편에게 “저기~ 솥에 콩죽이 좀 남아 있을 건데...” 했더니 다음 날 시어머니께 전달되어서 자기 전에 죽 한 그릇에 수저 두 개 걸치고 윗목에 놓아주었어. 당신은 시아버지가 데려온 두 아이를 데리고 자야 하니까 나를 신경 쓰지 못하는 거라. 그 써넝헌(차가운) 죽을 내가 한 숟갈 먹으면 남편도 따라서 한 숟갈 먹고, 내가 한 그릇 다 먹었으면 싶어도 그 말을 차마 못 해. 그 양이 적기도 했겠지만 여전히 젖이 잘 돌지 않는 거라. 겨울음식은 뜨겁게 먹어야 젖이 나온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지. 친정부모 없는 삶은 울타리가 없는 삶이라는 것은 발자국을 뗄 때마다 느꼈지만, 이때처럼 어멍 생각에 복받친 적은 없었어. 긴긴 겨울밤 같이 울던 첫애는 아마 평생 울어야 할 울음을 이때 다 울었을 거야. 나중에 아이를 더 낳고 보니 젖은 아기 목에 넘기기가 벅찰 정도로 먹어야 하는 것을 알았지.
치마폭에 붙으면 살림이 되고
시아버지가 온 후로 시집에는 살 희망이 하나도 안 보였어. 뒷 해에 시집을 나왔어. 제주시 남문통에 방 한 칸 빌어서 사는데, 아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거라. 생각 끝에 시집에 아기를 내버리고 온 적도 있어. 그런데 아기를 맡기고 오니 아침에 일어날 생각도 없고 창문 바깥으로 나가도 할 일이 없고 이상허더라고. 종일 천정만 보고 누워 있었어.
며칠 후에 시어머니가 애기 업고 해도 뜨기 전에 왔어. 늦은 낮 되어가니 또 남편이 내려왔어. 아버지 하고 인연 끊고 왔노라고, 다신 오라리로 안 갈 거라고, 신발이고 옷가지를 모두 챙겨갖고 들어온 거라. 부모 인연을 어디로 가서 끊어? 아이고, 남편도 맏이로 나서 고통이 많았지. 스물여섯에 장가들었으니 스물일곱 밖에 안 되는 나인데. 불한당 같은 시아버지에 무능한 시어머니에, 어린 동생들에, 이복동생까지, 시집을 1년도 못 살고 나간 내 꼬락서니 하며..... 휴우~ 사는 게 무슨 유황놀이 하는 것 닮았을 거라. 그러니까 옛 어른 말이 후루매(두루마기)에 매달리는 살림은 안 되고 치마폭에 붙는 살림은 된다”라고 했는데 그래도 남편이 달라붙으니까 살아진 것 닮아.
친정제사 하는 심정
내가 남문통에서 방을 두 칸 빌리게 되자 이때부터 친정부모 제사를 했어. 대신 언니는 4번 명절을 했지. 그때는 단오 한식 명절까지 했으니까. 명절은 하려면 언니시집의 명절도 있으니까 아침 일찍 시집손님 오기 전에 친정명절하고 다시 차려야 했어. 우리 속은 아무도 몰라. 그때 법은 아들 없으면 몇 촌수 없는데 가서 양아들을 데려와 제사를 맡겼으니까. 친정은 올케가 바다 같은 넓은 밭도 집도 다 팔고 김 씨 집을 떠나버렸으니까 그럴 처지도 못 되는 거지. 올케는 우리 자매들에게 " 죄가 있으니 너의 식구들 총 맞아 죽었지" 하며 부모제사를 안 하더라고. 난 친정 쪽 먼 친척이 와야 제사가 되는 것 같았어. 죽은 부모 영혼이 오는지는 모르지만 네겐 그 사람들이 친정부모 같더라고. 죽은 영혼보다 산 사람이 더 좋은 거야.
남문통에 말뚝을 박다
작은언니는 내가 혼수하고 남은 돈을 꽉 쥐어 내놓지 않았어. 올케는 그 돈을 자신이 관리하고 싶어 했지. 내가 쌀 살 돈이 없어도 언니에게 맡긴 돈은 딱 감금해서 주질 안 해. “이 돈을 부모인가 친정인가 생각하라, 상애떡(밀가루로 만든 빵) 가져먹듯 쓰면 그게 남느냐”라고 하면서.
언니에게 맡긴 돈 40만 원으로 남문통(오현단 근처)집터 63평을 샀어. 둘째 낳고 집터 사서 넷째 임신한 몸으로 그 터에 집을 지으니 빚이 15만 원 났어. 그때 생각에는 평생 이 돈 갚는 낙으로 살아야지 했지. 새 집에서 넷째 딸을 낳았어. 딸 넷을 낳고 마루에 앉아 있으면 방 빌러 온 사람이 주인은 어디 갔냐고 물었어. 내 나이가 스물아홉이었으니 집주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30대의 김연심 씨(1960년대, 왼쪽))
너무 낳고 싶었던 아들
내가 다섯 번째 임신을 하니 동네사람들까지 적극 동참하여 각종 비방과 예언이 날아다니는 거라. 아들이라는 보장이 없으니 나는 소리 소문 없이 아이를 낳고 싶은 거라. 시아버지가 아들 작은 각시를 얻으러 다닌다는 소문에 시집식구 모두가 조마조마할 때니까.
솔직히 나 자신부터도 아들을 꼭 낳고 싶었어. 오빠가 대구형무소에서 행방불명된 후에 작은언니와 나는 시집 몰래 친정 일을 보면서 서러움이 만만했지(많았지). 친정부모 천리(이장)만 4번을 했어. 내가 돈을 벌지 않았으면 친정제사를 떳떳이 할 수 있었을까. 속 좋은 남편도 친정제사 대를 물리는 문제에서는 “누구 맘대로?”하여 간장(애간장)이 물이 되게 하더라고. 남자 하나가 걸으면 쉬울 일을 언니와 내가 꾸역꾸역 걸으며 겪었던 설움을 내 딸들에게는 주고 싶지 않더라고.
아들이 태어나던 날은 여름 복더위에 산파도 부르지 않고 낳았어. 12살에서 한 살까지 두 살 터울로 6명의 아이를 낳으니 옴짝달싹 못했어. 그때부터 몇 년 동안은 집에서 할 수 있는 뜨개질이나 발미싱으로 할 수 있는 부업거리를 했지. 집도 막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7 식구가 방 한 칸만 쓰고 나머지는 다 세를 주었어. 남편만 믿고 앉아있으면 아이들 고등학교도 못 보낼 것 같았으니까.
돌고 돌아 내게 온 사오기(왕벚나무) 궤
남문통 동네에서 ‘놋그릇 친목계’가 만들어졌어. 나보다 10살 위 어른들이 주선을 해서 나를 총무로 맡겼어. 친목에서 놋그릇을 담아 보관할 궤를 하나 사 왔는데 그 궤가 세상에, 도두리 친정어머니 궤였던 거라. 한 20년 잘 운영했는데, 후에 스테인리스 그릇이 나오기 시작하니 이젠 놋그릇제가 필요 없게 된 거라. 그동안 수고했다고 친목어른이 그 궤를 나에게 줬어. 그때 심정은 뭐라 말할 수가 없어.
어머니는 시국(4.3) 있기 전에 사오기 궤를 두 개 만들었어. 그 궤가 방에 있을 때 장롱보다 빈직빈직(번쩍번쩍) 붉은 나무태깔이 보기 좋았지. 느티나무로 만든 '굴무기 궤' 보다 한라산 왕벚나무로 만든 사오기 궤가 더 위로 보지.
도두리 집 불탈 때 나는 그 궤를 꺼내서 작은언니 시집에 맡겼어. 마차를 빌어 사람 죽은 시체 넘어가면서. 작은 언니가 보관하다가 하나는 수길이 결혼하니까 조카며느리에게 넘기고 하나는 내가 큰아버지 집 갈 때 따라온 것이지. 큰아버지가 저 궤는 나중에 나를 주겠다고 했는데, 큰어머니가 몇 푼 안 받고 그걸 팔아버리더라고. 어멍 얼굴 보듯이 그걸 죽게 갖고 싶어도 “그 궤 나 줍서게(주세요)” 말을 노시(끝내) 못했어. 세상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온 거야. 도두리목수가 그 궤를 만들 때 100년은 넘은 나무라고 했으니까, 이제 저 사오기궤 나이도 200년은 훨씬 넘었을 거라.
세상에서 제일 귀한 건 사람
당을 가는 것도 절에 가는 것도 믿음은 나 의지에 달린 것이라 생각하지. 덕도 있는 것이지만 덕지게 하는 믿음이 어디 쉬운가? 난 살면서 절에 가는 것이 쉬는 거야. 오전에 절에 갔다가 오후에는 밭에 가는 날이 더 많았지. 남편이 죽은 후에는 어디 가서 오래 앉아 놀려면 가슴이 더 탕탕 뛰었어. ‘내가 이렇게 앉아있으면 우리 집은 뭘 먹고사나’ 생각에. 그러니 몸이 늘 치쳐서 난 옛날부터 마음은 간절해도 절 100번을 못해봤어.
아이를 여럿 키우며 병원 갈 형편도 못되니 그저 정성으로 믿음으로 키우는 수밖에 없었어. 다행히 아이들이 큰 병 없이 커줘서 살림이 견뎠던 것 닮아. 결혼해서 한 15년은 할망당에 가서 빌고 그 후로는 부처님께 빌면서 오늘까지 살았어. 당이나 절이나 믿음은 매한가지일 거야. 대가족을 거느려 살려면 모든 사람, 산천초목에도 고개 숙이게 되는 거라. 그런 믿음 공력으로나 살아질 건가 하는 마음으로.
이제 난 6남매에 손주가 13명. 증손주까지 합치면 27명의 대가족이 됐어. 친정어머니는 경찰서에 있을 때도 ‘우리 족은 년 어떵 허코(우리 작은 딸 어떻게 하지), 우리 족은 년 어떻허코’ 내 걱정만 했다며 어머니 고문받을 때 같이 있던 어른은 어머니 제사상에는 물만 잘 올려놓으라고 했어. 전기고문받고 “물물” 하던 모습이 안 잊힌다고. 어려울 때마다 12년 인연 밖에 없는 친정어머니가 어디선가 나에게 의견과 지혜를 주며 살게 도와준 것 같아.
사람은 절대 이녁 힘으로만 살지 못하는 거라. 더불어 살아야지. 좋은 일보다는 궂은일이 더 많은 게 인생살이고. 그래도 속은 늘 자본주의로 살았어. 부모가 없는 자신에게 믿고 의지할 것은 돈의 힘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부산 영도에서 살 때부터 나에겐 돈과 신용이 친정부모요, 재산이라고 생각했어. 그래도 4.3 사건을 겪으며 억만금의 돈보다 사람 하나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늘 하면서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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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제주국제공항 서북쪽 활주로에 위치한 '돔박웃홈'은 도두마을 주민뿐 만 아니라 소개명령으로 도두리에 온 사람들이 수차례에 걸쳐 집단 학살된 곳이다
** 정신없이 물끄러미 앉아있는 모양을 뜻하는 제주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