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어버이날에
<어버이날에>
사랑하는 둘째에게
최근에 나를 '모성 주의자'라고 명명해 준 친구가 있단다. 그 친구와 나는 근 30년 만에 만나 일상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는데 불교신자가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모성 주의자가 되어 있더라는 거야.
어느 부분에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알았던 친구, 우리는 각자 다른 삶 속에서 변곡을 겪으며 자기 몫의 시간을 살았어. 에밀 아자르의 " 자기 앞의 생"처럼.
그 작가가 로맹가리와 동인물이였다는 것도 30년이 지나고야 알았지만.
십 년 전쯤 컴퓨터 중독에 빠진 너를 아빠가 사는 곳으로 전학시키고 엄마는 대전에 혼자 남아 " 새벽의 약속"을 새벽에 읽으며 로맹 가리가 얼마나 모성에 갇혀 정신적으로 속박된 삶을 살았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어. 내가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던 것들이 눈에 보였어. 로맹 가리의 작품은 아름답고 힘차지. 하지만 한 번도 자기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에게 세상의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일까 싶어.
세월의 더께 속에 닳고 바랜 감정을 너머 친구와 나를 단박에 결속시켰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문학일까, 푸르렀던(지나고 보니) 청춘의 힘일까, 소울메이트같은 우정일까, 어쨌든 우리는 시간의 긴 장벽을 간단없이 허물었어. 딱 지금 너의 나이에 만난 친구였어.
이제 나는 자식의 힘으로 살아가는 무력한 부모가 되었네.
건망증이 심각해 아침마다 들기름 한 숟갈씩 먹어 봐야지 하면서도 실천을 못하는 미련한 엄마에게 둘째 너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지 ( 어버이날이므로)....
저조차 이해하기 힘든 저라는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내면을 비우고 노력해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세상을 향해 고개 숙이게 만든 너희들, 언니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끼가 많고 무대체질인 언니는 전학 와서 학급 연극을 하게 되었다고 대본을 들고 왔지, 동생인 너는 대본을 죽 훑어보더니
' 언니 대사는 하나뿐이네' 했지, 나는 좀 긴장이 돼서 어떡하나 싶었는데 언니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어.
' 잘 보면 두 개야~'
그 말을 들으며 내 자리가 , 엄마 자리가 저기로구나 했었단다.... 그렇게 언니에 집중하다 보니 너에겐 신경을 덜 썼던 거지.
이제야 둘째, 너의 상처를 보게 되었구나. 너도 미숙한 아이였는데, 기대에 부응하려고 성숙한 척했던 건데, 그래서 짐이 무거웠다는 걸 엄마가 몰랐어. 그저 착한아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래도 엄마 건강에는 단결하여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보호하고 있구나.... 오늘도 미세먼지가 심하다며 언니는 외출금지령을 내리네, 엄마는 노약자라며.
언니가 며칠 전에는' 떠밀린 청춘'이 하도 힘들다고 하길래 내가 스물세 살 때 유서를 썼던 경험을 고백하였어, 혹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사랑하는 둘째야,
누구나 자기 몫을 사는 것이란다. 엄마인 나도 내 몫을 성심껏 살뿐, 남은 욕심이 있다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가고 싶지만 가당키나 하겠니? 여전히 너희들과 불화하고 화해하며 그물에 걸려 찢기는 일이 많을 거야~
그래도 go , 얽히는 일들은 시간의 도움을 받으며 가다 보면 해답이 나오더구나
너의 깊은 배려심은 엄마인 나도 못 따라가는 훌륭한 품성이라고 생각해, 그 귀한 품성은 내가 살아가는 큰 자산이 될 거라 믿어.
언제나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