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선거 결과를 보며 다시 생각했다.
제주4.3과 4.16은 함께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2014년, 처음에 나는 세월호유가족이 부러웠었다.
- 그래도 당신들은 죽음을 밝은 대낮에 애도할 수는 있군요
- 그래도 당신들은 가족들의 죽음을 모두에게 알릴 수는 있었네요
제주 4.3 때 900 여명의 목숨이 수장되었으나 가족들은 풍문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 초기에는 시체가 밀물에 떠밀려 오기도 했으나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중에는 돌에 묶어 빠뜨리고 물고기의 밥이 되게 하였다.
그 영혼들을 무혼굿으로 끌어올려 빈무덤(헛묘)이라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안 되었다. 오랜 세월 강요된 침묵 속에 유족 스스로도 기억을 말살시키며 아직도 제주4.3평화공원 봉안실이나 4.3희생자 행방불명 묘역에 조차 이름이 없는 많은 주검들. 그래서 나는 세월호 유가족이 부러웠었다.
촛불집회의 혹한 속에서 나를 등 뒤에서 떠미는 힘은 세월호의 침묵이, 침묵 속의 아우성이 더 컸음을 알았다. 그 속에는 “나는 지금도 생생한 데, 왜 똑똑한 당신들은 그렇게 기억을 못 하느냐 “고 고위공직자들을 보며 탄식하였던 김관홍 잠수사의 죽음도 느껴졌다.
내 부러움(?)과 달리 그들 역시 몇 년 째 죽음의 원인에 납득할 만한 대답에 애가 타고 있었고, 무엇보다 애도의 시간조차 끊임없이 방해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진원지 출발이 어딘 지는 모르겠으나 그 동안 세월호유가족을 능멸하는 말은 참 많았다. 어묵, 오뎅, 회쳐 먹다, 찜쪄 먹다... 공감능력의 부재,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 우리의 부모들은 제주4.3의 과정에서 얼마든지 보았다.
촛불집회의 마지막 날 타오르던 416개의 횃불에 전율했던 것도 4.3에서의 횃불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하철에서 노란리본을 단 사람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동백꽃 뱃지에 잠시 밀려났던 노란 리본을 찾아 가방에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