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마음 밭을 찾아서
이 영화는 가족과 영화관에서 보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다 시간을 맞출 수 없어 혼자 올레 Tv로 보았다.
김수환 추기경 어린 시절 이야기를 모티브로 쓴 정채봉 동화 <바보 별님>이 원작이었다. 정채봉 작가는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시 한 편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은 분이다. 시의 전문을 옮겨 본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나는 아직도 80세 넘은 엄마가 살아계신 복을 누리고 있지만, "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는 부분에서는 나도 시인처럼 두 살 때 엄마를 잃은 아이 마음이 된다. 이 영화의 제작비를 전액 지원한 분은 논산 출신 기업가인데, 나도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불교신자다. 김수환 추기경도 경주 석굴암에 서면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종교심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렇게 종교가 넘나드는 영화 만들기 과정도 참 좋았다.
영화의 배경은 1928년 추기경 나이 일곱 살 때다. 부처님도 몇 대의 업을 쌓아 탄생했다 하듯이 추기경도 최소 3대의 공덕은 쌓아 나오신 분이셨다. 추기경의 할아버지 김익현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순교하셨고 아버지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추기경 어머니의 신앙의 뿌리도 대를 이어 이루어졌다.
인삼 장사해서 어머니를 편히 모시겠다는 아들을 앞에 두고 "내가 어머니의 아들로만 키운 것 같다"라고 자책하던 추기경 어머니는 아들을 사제로 인도한 첫 길라잡이였다
나를 가톨릭 신앙으로 이끈 이는 누구였을까.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다. 우선은 노령의 시어머니가 혼자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서였다. 가시는 길이 너무 외롭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다음에는 사춘기에 아파 학업 수행이 힘들었던 큰 애가 되리라. 욥기를 반목해서 읽으며 왜 주님의 축복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느냐고 주님을 들볶다가 어느 날부터 묻지 않게 되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항복하는 심정으로 가톨릭의 순명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엄마 노릇한답시고 자식을 내 소유, 내 책임으로만 여겼던 고달팠던 시간들. 그나마 신앙과 함께 걸어서 그 시간을 원망 없이 통과한 것 같다.
내가 교리를 받을 때는 공교롭게 대학원에서 한국 불상사를 공부할 때라 몰입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강진 무위사와 전주 귀신사 불상을 정리하였는데, 나는 이 경험을 늘 소중히 생각하고 가톨릭이 내게 맞는 옷이며 집이며 부름이라 여기고 있다.
구한말,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인들은 옹기장수가 많았다. 일반 백성들과 섞여 살지 못하는 그들의 처지가 산에 들어가 옹기를 굽고 직접 판매에 나서게 했다. 김 추기경의 아버지도 옹기장수를 하다가 추기경 8살 즈음에 해수병(천식의 일종)으로 돌아가셨다. 죽음의 기미를 알고 슬퍼하는 막내아들에게 “ 아버지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라고 안심시키고 떠나셨다. 임종을 앞둔 독백 -자비를 베푸소서-을, 오래 생각하게 했다. 이 말은 불교 신자인 어머니가 위급할 때마다 부르는 '나무 관세음보살'과 같은 의미처럼 생각되었다. 아버지 역 배우(안내상)를 맡은 배우의 연기가 훌륭하여 그동안 수없이 뇌였던 ' 자비를 베푸소서'의 의미가 새롭게 가슴을 울렸다. 가톨릭이 말하는 순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 명 장면이었다.
8남매를 낳으시고 7,8번째 자식을 신부님으로 만들어 꿈을 이룬 어머니, 그분은 자식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지 않았던 마음밭에 천주의 씨앗을 가진 어머니셨다. 자신의 마음밭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7살 아이 수환의 질문에 차근히 답하시는 신부님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각자의 마음밭에 뿌려진 씨앗은 성경에서 말하는 달란트 같은 것이리라.
영화 속 아이 수환은 수업 분위기를 흩트려 뜨린 반 친구의 방귀소리에 몹시 부끄러워한다. 선생님이 물었다. 왜 네가 뀐 방귀소리도 아닌데 그렇게 부끄럽냐고.
소년은 대답한다.
- 모르겠어요, 그냥 부끄러워요
그분도 유년의 고향을 두고 군위의 첩첩한 산을 너머 갔다. 사랑하는 어머니, 친구를 두고 저 산 너머 간 것이다. 내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꿈을 찾아 바다 수평선 너머 갔듯이.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1944.1 가족사진
(뒷줄 맨 왼쪽이 형님 부부. 안경 낀 이가 김수환 추기경, 그 옆이 신부가 된 형님 , 오른쪽 두 여성은 누님.
앞줄 흰 한복이 이모, 안경 낀 여성이 어머니, 아이들은 모두 조카들)
일제 강점기 끝무렵에 일본에서 신학대학을 다녔던 김수환 추기경은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분의 자서전을 보면 사제의 길을 걷는 중에도 위기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이들이 사랑하고 의지했던 성직자가 되었다. 자서전에서 그분은 " 내 마음 밭에 특별한 씨앗을 심어 준 것은 가족의 사랑이었다"라고 회상한다.
1987년. 6월 명동성당
"나를 밟고 가시오"
"... 그러고 나서 내 뒤의 신부들을... 다음엔 수녀들을 밟고 지나서야 학생들에게 갈 수 있을 것이오..."
1987년 '박종철'대학생 고문치사 사건 이후 <명동성당>에 모였던 학생들을 잡으러 온 군사 독재 정권을 향한 추기경님의 말씀이다.
그때 우린 군부독재에 추기경님이 미온적으로 대응한다고 불만이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신부님이 정치에 너무 관여한다고 걱정을 했다고 들었다. 그 균형을 위해 추기경님이 얼마나 애쓰셨는지는 가시고 난 후에 알았다. 그러나 내가 들은 더 귀한 말은 추기경님 운전수였던 분이 “그분은 30년 동안 한 번도 나에게 무얼 요구하거나 재촉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신 말이다. 이 말은 내가 추기경님을 생각할 때 맨 먼저 떠오르는 말이다.
자신의 삶에 기적의 신비를 체험해보지 못했다던 고백을 하신 적도 있었다. “낮은 대로 임하소서”라는 말씀을 나는 김 추기경님의 삶에서 보았다.
추기경이 되신 후 그분은 한 장 짜리 유서를 써 두셨다. 1971년 2월 21일이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가장 깊이 현존하시는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등 모든 불우한 사람들 속에 저는 있지 못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저의 부족을 용서해주십시오
추기경님은 말년에 이런 시를 남기셨다.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지 말고
나누며 살다 가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리니
나누며 살다 가자.
누구를 미워도,
누구를 원망도 하지 말자.
많이 가진다고 행복한 것도,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도 아닌 세상살이
재물 부자이면 걱정이 한 짐이요.
마음 부자이면 행복이 한 짐인 것을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는 것과 복 지은 것뿐이라오.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누군가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날도 많지 않은데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가슴 아파하며 살지 말자.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으니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다 가자.
웃는 연습을 생활화 하시라.
웃음은 만병의 예방약이며 치료약.
노인을 즐겁게 하여 동자(童子)로 만든다오.
화를 내지 마시라.
화내는 사람이 언제나 손해를 본다오.
화내는 자는 자기를 죽이고 남을 죽이며
아무도 가깝게 오지 않아서
늘 외롭고 쓸쓸하다오.
기도하시라.
기도는 녹슨 쇳덩이도 녹이며
천 년 암흑 동굴의 어둠을 없애는
한줄기 빛이라오.
주먹을 불끈 쥐기보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가 더 강하 다오.
사랑하시라.
소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오.
진정한 사랑은
이해, 관용, 포용, 동화,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오.
내가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칠십 년 걸렸다오.
위키백과에 기록된 그분의 생애는 이렇게 시작된다. 김수환은 대한민국의 천주교 성직자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이제부터는 김수환 추기경 유년시절을 보낸 경북 군위가 친근하게 될 것 같다.